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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옮겨 놓으라 (요 11:17 ~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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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옮겨 놓으라 (요 11:17 ~ 44)


성경이 합리(合理)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합리와 합리주의는 다릅니다.
전자는 논리와 이치에 합당한 것을 말합니다. 후자는 비합리와 우연적인 것이나 초자연적인 것을 배척하고 이상적 논리가 일체를 지배한다고 하는 사상입니다. 계몽시대의 종교비판을 대표하는 사상이 바로 합리론(合理論),혹은 합리주의(合理主義 rationalism)입니다.

합리주의를 성격상 이성주의(理性主義)와 동일시하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합리주의는 존재의 원리를 철저히 이성에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합리주의는 인간 이성이 용납할 수 없는 모든 현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아니합니다.
합리주의는 실천의 지침을 오직 이성의 원리에서만 구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합리주의 정신은 비합리성과 싸우면서 형성되어가는 성질의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합리주의에 대하여 방관하지 아니합니다. 성경에서 이성주의는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합리주의는 성경의 초자연성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초자연성과 초이성적 현상에 대한 도전은 거침이 없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초이성적 사건은 이성주의자들과의 한판 전투가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항상 배우나 진리 지식에 이를 수 없는 초등학문(딤후 3:7), 즉 이른바 과학지식으로는 성경과 논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의 기록은 예수께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린 사건입니다. 죽은 나사로의 누이동생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다고 전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예수님은 요한복음 11장 4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대로 다시 가자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깨우러 가노라』고 했습니다(요 11:11).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들었다는 말을 나사로가 잠들어 쉬는 것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1장 15절에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와 보니 나사로가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 가족들과 문상하려고 온 유대인들 앞에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요 11:23)고 하는 기상천외한 폭탄적 선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기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요 11:25-26). 그리고 『그를 어디 두었느냐』고 하셨습니다(요 11:34). 예수님은 속으로 통분히 여기면서 나사로 무덤에 도착하니 무덤이 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굴 문을 돌로 막아놓았습니다. 예수님은 굴을 막아 놓은 돌을 보시고 사람들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였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는 말씀은

Ⅰ. 예수 자신과 믿는 자들의 부활을 증거 하기 위함입니다.

본문 11장 24-26절에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했습니다.
여기 마지막 날은 세상 종말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미래에 있을 일반적인 부활을 뜻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마르다의 부활 신앙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는 죽을지라도 영생의 부활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께서 생명과 부활을 수여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이 곧 부활과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 자신이 부활과 생명의 주체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과 생명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활과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는 예외 없이 생명의 부활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본문 11장 27절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는 말씀은

Ⅱ. 예수 자신의 기적에 동참시켜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본문 11장 3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이적에 사람의 도움이 전혀 필요치 않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적들이 다 한결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를 때 모세에게 명하시기를 출애굽기 14장 16절에서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행위가 홍해를 갈라지게 하는 데 영향력이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요단강을 건너게 할 때 여호수아 3장 13절에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제사장들의 행위가 백성들이 요단강을 마른 땅 같이 건너는 데 무슨 능력이 되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 여호수아 6장 3-4절에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결국 여리고성은 무너지고 말았으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와 같은 행위가 철벽금성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데 직접적인 연관은 찾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삼만 이천 명 중에서(삿 7:3) 선발된 기드온 삼백 용사에게 미디안을 붙이셨습니다(삿 7:4-9). 이것은 군대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이때 기드온의 삼백 용사는 피를 보는 전투를 하지 않고 승리했습니다.
기드온의 삼백 용사가 승리의 주체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드온에게 승리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때 기드온은 사사기 8장 22-23절에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고 했습니다.

기드온의 이 말은 전쟁 승리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엘리사가 문둥병에 걸린 나아만 장군을 요단강에 일곱 번 씻으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요단강이 문둥병을 낫게 하는 약효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나아만 장군은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가야만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왕하 5:14).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하라고 했습니다(민 20:8).
민수기 20장 11절에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반석은 그의 몸을 찢어 우리에게 영원한 생수를 먹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벳세다 광야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축사하신 후에 오천 명을 먹이고 열 두 광주리를 남겼습니다.
오병이어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는데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이 기적에 동참한 사람들은 말하기를 요한복음 6장 14절에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기적을 골라서 말하면 다른 기적들이 서운해 할 것입니다. 성경자체가 벌써 인간 이성을 초월한 하나님의 기적으로 충만합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첫째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에 동참시켜 증거를 삼기 위함입니다. 둘째는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기적의 수혜자가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셋째는 이러한 기적으로 말미암아 인간들로 하여금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과 그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 돌을 옮겨놓으라는 말씀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도하는 가운데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된 나사로가 살아났다는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돌을 옮겨놓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마르다는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요 11:39) 라고 함으로 완전히 죽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게 된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합리주의자들에게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예수께서 행하시는 기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을 옮겨놓는 일은 예수께서 인간에게 시켰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기적을 멀리서서 바라만 보고 의심하지 말고 기적의 수혜자가 되어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체험하라는 말씀입니다. 돌을 옮겨놓으라는 말은

Ⅲ.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본문 11장 40-42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 자신이 이 기적을 통하여 메시야적 능력을 보이고자 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성부 하나님과 관련하여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메시야임을 확증시키고자 함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자신을 친히 이 땅에 보내신 것을 증거로 삼기 원했습니다. 본문의 이러한 기도를 통하여 그 기도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 자신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 자신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증거하여 자신의 신적 권위를 나타내고자 함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성부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3절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을 유감없이 증거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35-36절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돌을 옮겨 놓는 일은 그 자체가 기적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돌을 옮겨 놓는 일은 나사로를 살리는 일과는 무관합니다. 그러나 기적을 보려고 하면 돌을 옮겨 놓아야 합니다. 돌을 옮겨 놓지 아니한다고 해서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릴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돌을 옮겨 놓지 않는 사람은 그 축복의 기적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을 옮겨 놓는 일은 기적에 참예하는 복된 일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5절에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도 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로부터 좋은 것을 받기를 생각하지 마십시오. 전도도 못하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부흥시킬 생각을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다면 복 받기를 생각하지 마십시오.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믿지 못하면 구원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믿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신 이가 예수님이십니다. 돌을 옮겨놓으면 즉시 주께서 나사로를 일으키시는 순서가 있을 뿐입니다. 성경이 명할 때 즉시 행하는 자가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30절에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했습니다.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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