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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질 수 있나 (막 15: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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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질 수 있나 (막 15:16~24)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마 16:24). 이 말씀은 훈련된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그 소임을 다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가르치신 제자의 도를 익히 알고 있었던 제자들은 모두다 십자가 현장에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구레네 시몬이 그 현장을 따라가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지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골고다 언덕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구레네 시몬의 사건을 중심으로 성도와 십자가의 삶을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1. 십자가의 의미

사람들은 ‘십자가’라는 말을 입에 올리면서도 그 바른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아는 사람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본래의 십자가

본래의 십자가는 죄인을 징벌하는 사형 도구입니다. 크고 무거운 통나무를 십자 형태로 만들어 그 위에다 범죄한 사람을 묶거나 아니면 손과 발에 못을 박아 죽을 때까지 버려두는 잔인한 제도입니다. 그 당시 사람을 죽이는 사형의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것은 가장 흉악한 죄수에게 가장 가혹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하는 제도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를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고 할 만큼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2) 예수님의 십자가

성경에서 십자가를 논할 때는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연상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재판한 총독 빌라도는 유대인의 송사를 받아 몇 차례나 심문했지만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요 19:4). 그러나 유대인들의 집단행동으로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그들의 요구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주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사실을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작정으로 보았습니다. 이사야 53:5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범죄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주신 희생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의 상징인 것입니다.

3) 십자가의 양면성

본래의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잔인한 사형도구로써 모든 사람이 혐오하는 저주의 대상입니다. 자다가도 소름이 끼치게 할 만큼 두려움과 공포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오히려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주고 평화와 소망을 안겨주는 축복의 도구가 되어졌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죽음과 생명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성경적인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인간이 저지른 죄와 죽음의 비참함과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기서 해방되는 사죄와 생명의 원리를 증거하게 됩니다(롬 8:1-2).

2. 십자가를 질 수 있나

그리스도인들이 성지순례를 가게 되면 예루살렘에서 반드시 들르게 되는 코스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 길입니다. 일명 “슬픔의 길”(Via Dolorosa)이라고 불리는 이 길은 브라이도리온이라는 곳에서부터 갈보리 언덕 못 박히신 곳까지 14코스가 있습니다. 그중에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진 곳은 5코스부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지는 장면을 통해서 성도에게 십자가의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예측 못한 상황입니다.

본문 말씀 21절에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로마 군병들이 계획적으로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우려 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지치시고 쓰러질 때 군병중 하나가 그 옆에 있는 사람을 잡아서 억지로 지웠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정황으로 보아 구레네 시몬은 전혀 예측 못한 상황에 부딪쳤고 어쩔 수없이 십자가를 지게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십자가도 미리 알고 그 길을 찾아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다만 예수가 좋아서 그를 따르다 보니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억지로 진 십자가

마태복음 27:32에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고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겠다고 다짐하지만 실제로 그런 상황에 이르게 되면 베드로처럼 어떻게든지 이를 모면하고 피하려고 애를 씁니다(마 26:69-72). 하나님께서 직접 명령하시며 억지로 밀어 넣는데도 못하겠다고 떼를 쓰곤 합니다. 모세도 그랬고(출 4:10), 예레미야도 그랬습니다(렘 1:6).

오늘도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성도들은 억지로라도 그 길을 좇아야만 됩니다. 베드로전서 2:21에는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3. 십자가의 신비

일찍이 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십자가에 두고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18).

1) 기독교의 심벌(Symbol)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과 그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십자가는 여러 가지 색깔과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그 근본은 죄인을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역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표시가 있는 곳에는 사랑과 희생과 평화의 정신이 있고 또한 구원과 소망의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특징을 부활과 생명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결국 십자가 죽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죽음이 있으므로 부활이 있고 영생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성령 받은 베드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행 2:36).

2) ‘임마누엘’의 특징입니다.

성도의 복된 삶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임마누엘의 특권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과 함께 하면 만사가 형통케 된다고만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라면 주님의 십자가도 같이 지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이 영광 받으실 때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했을 때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마 20:22).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멍에를 같이하는 사람이며 십자가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갈 6:14).

3) 신령한 축복의 근거입니다.

마가복음의 기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사람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시몬”이라고 소개 하였습니다. 본서의 기자 마가는 이 성경을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면서 구레네 시몬의 아들인 알렉산더와 루포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이들 형제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바울이 로마에 보낸 서신중에도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고 한말이 있습니다(롬 16:13).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한바 있는 구레네 시몬은 자기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이 모두 그리스도를 위하여 크게 봉사하면서 초대교회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고 하신 말씀은(마 13:43) 마치 이들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지금 주님께서 나를 향하여 “십자가를 질 수 있나?”하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미국 보스턴 대학교에 재직하던 E. B 마랏 교수는 헌신예배 때 부를 찬송시를 지으면서 “나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어떻게 대답해야 될까를 고민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십자가를 질수 있나 주가 물어 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오리 저들 대답하였다”고 519장 찬송의 가사를 써 내려갔습니다. 마랏 교수의 이 찬송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고백이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목회자 칼럼 - 청지기 정신과 이어지는 행복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기는 먹거리 중에 향토색 짙은 브랜드가 있다. 거기에는 고집스러운 장인 정신과 함께 정성이 담긴 손맛이 들어 있다. 예를 들자면 경주의 황남빵이나, 통영에 있는 충무 할매 김밥, 그리고 천안 의 명물로 불리는 호도과자가 그런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음식 문화도 사람들의 입맛과 기호에 따라서 많이 발전해 왔고 또 대부분 값싸고 편리한 인스턴트식품이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그렇지만 천안의 명물 호두과자는 고속도로 휴게소를 비롯해서 전국 어느 곳이나 없는 곳이 없고, 또 남녀노소 모든 계층이 다 선호하는 식품중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호도과자가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수익성 있는 상품으로 인기를 누리게 되자 여기저기서 유사품이 나오고 또 자동 기계화 시설을 갖추어 대량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70년이 넘도록 호두과자 하나에 전념하면서 살아온 사람이 있다. 올해 92세인 심복순(沈福順)할머니…. 천안 성심교회 권사님이신 이 할머니는 어린 시절 측량 기사였던 아버지 덕분에 부유한 가정에서 불편을 모르고 자랐으며 대전 정명 여학교를 졸업하고 열아홉 살에 결혼을 했다고 한다. 남편 조귀금씨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는데 일찍부터 대전에 있는 한 제과점에 점원으로 일을 한 것이 빵과의 인연을 맺은 계기가 되었다. 그는 13세 때 일본인 주인을 따라 일본에 가서 본격적으로 제빵 기술을 배워 왔다. 이후 이들 부부는 천안의 특산물인 호두와 흰팥을 원료로 하여 그 유명한 호도과자를 개발한 것이다. 그 시절만 해도 먹거리가 흔하지 않았던 때에 비싸지도 않고 오며 가며 쉽게 먹을 수 있는 호도과자가 오래도록 인기를 누리며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을 길들여 놓았다.

이토록 70년이 넘게 한길을 걸어오면서도 변함없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성공하게 된 것은 심복순 권사님의 청지기 정신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결혼하기 전부터 교회에 나가고 독실한 기독교 신앙으로 훈련된 심권사님은 평생 동안 하나님과의 약속을 소중히 간직하면서 초심을 잃지 않고 살아오신 분이다. 그분의 신앙은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신 28:1)고 하신 말씀을 확신하고 따르는 삶이었다. 권사님은 “선선자(先善者) 후득복(後得福)”을 가훈으로 하고 언제나 선을 베푼 다음 반드시 축복이 따라온다는 믿음을 자손 대대에 실천하도록 가르치신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어느 때는 천안에서 열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재산가였다고 하는데 그 재산을 자기와 가족들만을 위해서 쓰려 하지 않고 베푸는 삶을 실천한 것이다. 그분은 “돈은 언제나 돌고 돌다가 잠시 내 손에 머무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곧 썩는 냄새가 나는 법”이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께 자기 평생 10개 이상 교회를 세우게 하여달라는 기도를 했고 결국 그 약속을 지켜 지금까지 10개가 넘는 교회를 지어서 봉헌했다. 그뿐 아니라 수많은 신학생들을 뒷바라지해서 목회자로 배출하는가 하면 장애인 단체와 선교 사업에도 아낌없이 지원해서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기여하고 있다. 지금 92세의 고령인데도 흔들림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3대째 가업으로 계승하는 자손들에게 돈을 벌고 쓰는 것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청지기 정신으로 실천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여기 심복순 권사님의 신앙과 삶처럼 어떤 경우에나 초심(初心)을 잃지 않고 감사하며 보답하는 삶을 살게 되면 주어진 행복도 흔들리지 않고 대대로 계승되어 가는 것을 배우게 된다. (손상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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