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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때, 롯의 때, 우리의 때 (눅 17: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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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때, 롯의 때, 우리의 때 (눅 17:26~30)

1. 종말에 대한 무관심

한 해의 마지막이 다가옵니다. 늘 이맘때면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세”, 혹은 “종말”이라는 것입니다. 한 해의 끝자락이 온 세상의 마지막을 떠올리게 하고, 또 이렇게 한 해 한 해가 지나면 주님이 오실 것이기에 드는 생각입니다.

이 ‘말세’, 혹은 ‘종말’이라는 말이나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기독교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원래 의미와는 달리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1992년, 다미 선교회의「10.28 휴거론」을 중심으로 극단적인 종말론이 한국 교회와 우리 사회 전체를 사로잡은 적이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과 성도의 휴거가 일어난다던 그해 10월 28일 밤 12시, TV Camera가 다미 선교회 집회를 촬영하는 등 국민적인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휴거론은 불발로 끝이 났으며, 다미 선교회를 비롯한 휴거론자들과 정통 기독교까지 그들로 인하여 우스갯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성경적인 종말론에 대한 관심이나, 성도의 종말론적인 생활 자세가 점차 사라져 버린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경은 ‘늘 종말을 의식하며 살아라’, ‘다시 오실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와 신앙의 선배들은 모두 이와 같은 종말론적인 자세로 살다가 갔습니다. 그들은 마치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주님을 사모하고 소망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종말 의식이 우리 시대에 와서 사라져버렸습니다. 주님께서 곧 오시리라는 기다림이나 소원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집착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우리 시대를 향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인자의 때”, 혹은 “인자의 나타나는 날”이라고 하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의 사람들의 모습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때의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요?

2. 노아와 롯의 때, 우리의 때

1) “노아의 때”

노아는 인류에게 일어난 첫 번째 종말적인 사건, 즉 최초의 심판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으며, 그 심판에서 홀로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오늘 우리 시대를 향하는 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창세기 6, 7장의 기록을 보면, 정말 노아 시대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서 멸망당해 마땅한 사람들이란 생각이 듭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고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했으며(7:5) …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7:11,12)”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던 경건한 셋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고, 세속적으로 살아가는 가인의 후예들과 결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성적인 타락과 도덕적 타락, 그리고 사회적 무질서가 극에 달했습니다. 마치 세상에 하나님을 신앙하는 경건한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없는 것 같은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가운데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외롭게 신앙을 지킨 사람은 겨우 노아와 그의 가족뿐 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노아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지적하시면서 이상에서 말한 내용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노아 시대 사람들이 단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생활을 했는데, 이것이 그들이 멸망당한 이유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를 본다면, 그들이 심판 받아 멸망당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즉 예수님은 신앙, 도덕, 윤리 등 모든 면에서의 타락을 노아 시대 사람들이 심판을 받은 이유로 꼽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멸망당한 이유를 다른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사실 사람이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오히려 성스럽기까지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가장 기본적인 삶의 모습으로 주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도 이상하다거나, 잘못되었다거나, 혹은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인 일 때문에 노아 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멸망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지극히 당연하고 일상적인 삶이 그들의 삶의 전부였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 이것이 그들의 삶의 전부였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샀으며, 그 결과 그들은 멸망했습니다.

먹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추억이 되어 버렸습니다만, 대부분의 친구들이 자취를 하던 대학 시절의 일입니다. 제 친구 가운데는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을 늘 긴장하게 만드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식사 시간만 되면, 옆 사람은 신경 쓰지 않고, 말 한 마디 없이 급하게 허급지급 먹기만 하는 친구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같이 먹는 사람들이 먹기 전부터 긴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친구와 같이 빨리 먹지 않고, 뜸을 들이거나 체면을 차리고 다른 사람 눈치를 보고 있다가는 얼마 안 되는 음식이 남지를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취방의 식사는 식사 기도가 끝나자마자 먹보들의 전쟁터로 돌변했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 중에는 이와 반대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대학에 와서 예수님을 믿게 된 친구였습니다. 한 선배가 이 친구에게 식사 기도를 시켰습니다. 다들 눈을 감고 그가 기도하기를 기다리는데, 한참이 지나도 그가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들 침을 ‘꿀꺽’ 삼키면서, 선배를 원망했습니다. ‘왜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저 친구에게 기도를 시켰을까?’ 한참 뒤에 그 친구가 말문을 열었는데, 그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지금까지는 저 자신을 위해서 먹었습니다. 그러나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하셨으니, 이 음식도 주를 위하여 먹는 음식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저는 그 전이나 그 후로 그와 같이 진지한 식사 기도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3:31)”고 말씀하셨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에도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바로 이것을 무시했습니다. 그저 먹고 마실 뿐이었기에 그 화를 당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먹을 때마다, 그것으로 그 뜻을 이루며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것은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결혼에도 이와 같은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온전한 하나를 이루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거룩한 씨를 통해 영적인 세대를 이어가야 합니다. 결혼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며, 자녀들을 통하여 자기 시대보다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확장되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노아 시대 사람들은 이것을 무시했습니다. 생각과 목적 없이,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자녀가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늙어가는 것,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었던 것이죠.

한 때 막스주의자였으며, 폴란드 출신의 망명 철학자인 레젝콜라콥스키는 “오늘 서구 사회의 세속화는 기독교가 세속화된 탓”이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인과 교회가 이 세상을 타락시켰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심판 받아 마땅한 곳으로 변한 원인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신자의 말일 뿐입니까? 이 사람의 말이 틀렸습니까?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면 교회만 생명을 잃는 것이 아니라, 세상도 변질되고 타락합니다. 성도가 성도답지 못하면, 그 사람만 영적인 맛을 잃고 빛을 잃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썩게 만들고, 세상을 어둡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노아시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그 이상의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사모하며 살지 않고 오히려 세상과 같아져 버렸습니다. 시대의 아픔, 경제, 정치, 사회 등 자기 시대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교회와 성도들이 회개하고 진실과 정직과 희생의 삶을 살기보다는, 오히려 그 속에 파묻혀 도리어 변질과 부패를 부채질 한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든 사람들이 노아 시대 사람들처럼 살아가면 바로 그때가 종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모습이 그들과 너무나 닮았지 않습니까? 먹고 마시는 일상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목적,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전혀 관심이 없이, 오직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일 그 자체에만 메여 있지는 않습니까? 일상적인 삶, 그러나 그 일상을 통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게 사는 것, 영적인 것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없으면 노아 시대 사람들이 당한 화를 우리 시대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롯의 때”

롯은 또 다른 종말, 심판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의 시대는 어떤 때였을까요? 창세기 18, 19장은 소돔, 고모라 성의 사람들이 정말 ‘패괴하며 추악하고 음란했다’고 증거합니다. 성과 폭력이 결합하여 온 성과 그 성의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성도착증 환자들 같습니다. 그때로부터 4,0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보다 더 심한 것 같습니다. 성안에서 그들의 가족이나 또는 그 성 사람들 간의 관계에 만족하지 못하던 그들이, 그 성에 낯선 사람들이 찾아들자 폭력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성적인 욕구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면 짐작이 갑니다. 이러한 타락의 모습은 그 문화에서 성장한 롯의 딸들의 도덕과 윤리 의식에서 드러납니다. 소동 성이 멸망한 후, 롯의 딸들이 아버지로 더불어 동침하려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이 문제 앞에서 그들은 별로 주저하거나 고민을 하지 않았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동생과 의논해서 ‘언니 먼저 동생 다음’해서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롯의 시대, 소돔 성 사람들이 멸망당한 이유를 이것 때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지었기’ 때문에 멸망당했다고 하셨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에게서 보았듯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는 행위’ 자체는 문제가 안 됩니다. 오히려 권장하고 적극 추진해야할 것들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사고팔고 심는 생산 행위, 집을 짓고 성을 건축하는 건설 행위들은 정말 필요한 것이고,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속하는 것입니다.

롯의 시대와 당시 사람들이 노아 시대와 다른 것이 있다면 롯의 시대 소돔성 사람들은 집을 짓는 것, 즉 주거문화가 생겨서 한 곳에 정착해서 촌락을 이루고 성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안에서 농사를 하여 심고 거두었으며, 그렇게 생산된 것을 사고파는 상행위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고도로 발전된 사회였고, 전체적으로 부유한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발전된 문화, 상류사회, 부유한 사회였음에도 하나님 앞에서 멸망 받은 죄인들의 사회였고, 무엇보다 비참한 것은 의인 10명조차도 찾아 볼 수 없는 사회였습니다. 어쩌면 10명의 의인은 적은 숫자일 수도 있습니다. 소돔성에, 아니 롯 주변에 10명의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롯이 자신의 가족들을 포함한 ‘10명’에게 조차도 하나님과 말씀과 법도를 가르치지 못한 삶을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롯은 가족들과 자녀들의 배우자들을 복음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는 무력하고 무능한 삶을 살았습니다. 비록 롯 자신은 비록 구원받았을지언정, 그 역시도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는’ 이유와 목적을 외면했고, 그것을 뛰어넘어 하나님과 그 법도를 가르치고 전하는 일을 외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성도는 일상적인 생활, 즉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거두고 집을 짓는 것 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주의 나라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이웃을 섬기기 위하여 자신과 시간과 물질 등을 드려야 합니다. 롯 시대 사람들은 이것이 없어서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멸망당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주님과 복음과 교회와 이웃을 위한 구체적인 헌신이 없다면, 그 삶이 바로 주님께서 보시기에 패괴하고 흉악하여, 불순종하는 죄악보다 더 큰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람들도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습니다.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살아가는 이유, 이 세상에 목숨을 이어가고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목적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크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나, 작게, 또 구체적으로 하자면, 먹고 마실 때에도 주님을 위해서 하며, 장가가고 시집가는 결혼과 가정생활도 주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건을 사는 사람은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콩나물 500원어치를 살 때에도 주님을 생각해야 하며, 물건을 파는 상인이라면 자신을 위해서나, 돈을 버는 것만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집을 짓거나 구입하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본이며 당연한 것이고, 이것 이상으로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위해 할 일이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여러분을 대신하고, 교역자들이 여러분의 봉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 여러분이 직접 해야 합니다. 이런 것이 없어서 노아 시대 사람들과 롯 시대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사람들처럼 살아간다면 그들처럼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될 것입니다.

3.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성경적이고 올바른 종말 신앙에 관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노아 시대 사람들과 롯 시대의 소돔사람들이 멸망당했을 때의 생활 모습이 오늘의 성도들에게 그대로 있다면 지금이 곧 멸망의 때요, 종말의 때라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 롯 시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사고팔며 심고 거두며 그리고 집을 짓는’ 행위, 이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오히려 고귀한 인간 삶의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죽을죄가 되었던 이유는 그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무시했다는 것과, 그것을 뛰어넘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죄 가운데서도 가장 치명적인 죄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떻게 삽니까? 먹고 마실 때마다 그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목적을 기억합니까? 결혼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은 어떻습니까? 자녀들의 결혼문제를 걱정하는 부모들은 어떻습니까? 사고파는 일상적인 행위, 집을 구입하거나 옮길 때 여러분을 무엇을 생각합니까? 여러분의 일상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복음이 세상에 침투하는 일에 얼마나 헌신합니까?

저 비참하게 죽어갔던 노아 시대, 롯의 시대 사람들을 기억합시다. 적극적으로 주님과 복음과 교회와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실패한 노아와 롯 시대 사람들을 보면서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힘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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