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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외로움을 무엇으로 채울까?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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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외로움을 무엇으로 채울까? (눅 19:1-10)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결코 먹고 입는 것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하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불행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소위 이 땅의 모든 부자들이 다 행복하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가난하면 조금은 불편할 것입니다. 물질이 넉넉하면 조금은 편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욕심이 판을 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떡으로만 살려고 합니다. 돈으로만 살려고 합니다. 인간의 정욕으로만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채우고 또 채워도 만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식증에 걸린 환자들처럼 채우고 또 채워도 끊임없이 갈증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더 고독하고, 더 외로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갈증을 해결하고자 일에 더 미쳐봅니다. 돈을 모으는 일에 더 미쳐봅니다. 술과 쾌락에 더 깊이 빠져봅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허전함과 허무함과 외로움과 고독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인간은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내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다 헛될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때인가는 살다가 자신의 삶의 진실에 대해서 목말라야할 때가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내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 것인가? 내 육체의 남은 때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우리는 끝없는 변명의 장막에다 자기를 감추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아직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너무 늙었기 때문에, 너무 젊었기 때문에, 여자이기 때문에, 남자이기 때문에, 애가 있기 때문에, 돈이 없어서, 질병이 있기 때문에, 실력이 부족해서….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자신을 감추고 있는 이 모든 변명을 십자가에 내려놓고 자유하는 경험을 체험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은 일평생 변명이라고 하는 콤플렉스 속에서 달팽이관에 자신을 감추듯이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키가 작았습니다. 삭개오의 신분에 대해서는 성경이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키가 작은 것을 보상하고 싶어서 자기의 키 작은 것만큼 돈을 높이 쌓기로 작정한 것 같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욕을 먹어가면서도 돈을 쌓았습니다. 그래서 돈의 디딤돌 위에 다른 사람을 위압하고자 자기 민족이 그처럼 싫어하는 세리라는 직업을 선택했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의 국가였던 로마가 황실의 호사를 위해, 전쟁으로 인한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각 정복지에다 할당을 해서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그러면 그 국가의 세금 총 책임자는 100이 할당되어 내려왔으면 150을 더 붙여서 세금 부과를 명령합니다. 그러면 고을에서는 50을 더 붙여서 세금을 부과합니다. 그래서 원래 로마가 부과한 것보다 어떤 경우에는 3배 이상의 과중한 세금을 정복지 사람들은 내어야 했습니다.

키가 작기 때문에, 그래서 더 많은 돈을 쌓아서 그 위에 서기를 원했던 삭개오, 일평생 변명이라고 하는 콤플렉스 속에서 자신을 감추듯이 살아온 삭개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인가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고독함과 외로움과 갈증을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누려보면서도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예수님께서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일평생 변명이라고 하는 콤플렉스 속에서 자신을 감추듯이 살아왔던 그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로 결심을 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냈을 때에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삶의 무한한 해방과 자유를 알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삶의 무한한 욕망은 자유입니다. 사람들은 더 큰 자유, 더 힘있는 자유, 뭔가 더 가치 있는 자유를 찾아서 끝없는 욕망을 가지려고 헤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핵심은 다름 아닌 자유입니다. 내가 믿음 안에 잡히면 잡힐수록 세상이 주지 못하는 자유가 있습니다. 내게 나타난 자유를 증거하기 위해서 저는 오늘도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잡힌 이 자유를 증거하기 위해서 삽니다. 오늘 여러분도 모든 삶의 환경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다른 사람들은 종교를 자유로 주지 않고 어떤 속박으로 주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끝없는 속박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은 끝없는 자유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마다 병에서 자유했습니다. 과거로부터 자유했습니다. 죄악으로부터 자유했습니다. 예수를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만나보십시오. 여러분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여러분의 심령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평안과 자유가 충만하게 넘쳐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여 살아오면서 이런 경험이 있습니까? 달팽이처럼 둥글둥글 뭉쳐진 자신. 자기만의 성막, 자기만의 성역, 자기만의 시각, 자기만의 삶…. 똘똘 꽈리를 틀 듯이 뭉쳐서 그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자기의 모습. 어느 날 객관적으로 한번 보십시오. 이것이 정말 나인가? 굳고 굳은 고집에 껍질을 뒤집어쓰고, 무서운 방어의 벽 속에서 자기를 감추고, 착각과 아집과 독선의 쾌감으로 내적공허 속에 썩어 가는 삶.

아십니까? 갇혀 있으면 썩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썩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달팽이관 같은 자기 속에 딱 갇혀 가지고 어느덧 자기도 모르게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삶이 텅 빈 것 같은 공복감, 공허감, 허전함, 정신적인 공백, 끝없이 틀에 박힌 생활, 삶의 반복적인 권태, 그 틀 안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 공백의 무의미.

그래서 자신의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내면의 소리가 있습니다. '자유가 그립다. 삶이 그립다.' 그래서 인간은 탈선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방황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언제나 뛰어나가고 싶은 것이 아닙니까? 어느 날, 제일 가까운 아내이지만 아내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제일 가까운 남편도 내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내 존재의 분신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뛰쳐나가고 싶은 욕구가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 앞에 나왔어도 위장술의 천재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가식과 가면의 천재가 되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진리 안에서 자기를 파괴하고 자유인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선택은 여러분이 하는 겁니다.

시대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세상이 각박하면 각박할수록 맛을 상실한 인간이 판을 치는 역겨운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위를 보면 맛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했는데 맛이 가면 되겠습니까? 맛이 간 소금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쪼록 여러분의 삶에 맛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 세상은 내가 있어 맛이 난다. 우리 집에는 내가 있어서 맛이 난다. 돌덩이 같은 인간들 속에 들어가서 아무쪼록 맛을 내기를 축복합니다.

제게는 확신이 있습니다. 주 앞에 나온 여러분의 문제의 매듭이 얼마나 얽혀있든지 간에 하나님이 풀 수 없는 매듭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리할 수 없는 문제는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모든 고통도 타락도 하나님을 잃어버린 결과입니다. 지혜가 부족하면 인생은 헛것을 찾아 헤매고 결국 낭비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찾으면 그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집에 돌아온 탕자를 보지 않습니까? 넓은 의미에서 보면 우리 모두가 현대판 탕자들입니다. 그가 세상 가운데서 친구도 찾아봤습니다. 쾌락도 찾아봤습니다. 화려함도 찾아봤습니다. 도시의 삶도 찾아봤습니다. 수많은 것을 찾아봤지만 거기에는 자유가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해방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얽히고 무너지고 굶주리고, 마지막 생명의 신분까지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아버지를 찾고 나니 모든 것이 회복되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찾으면 됩니다. 찾으십시오. 귀한 것을 찾으십시오. 큰 것을 찾으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도 "찾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찾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역대상 28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뭇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신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생각을 아시는 그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네가 진심으로 나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네가 진심으로 나를 버리면 나도 너를 영원히 버리리라! 여기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찾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마음에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출구가 없는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여러분에게 마지막 인생의 출구가 어디일 것 같습니까? 내 생명이 끝나는 날, 내 인생이 끝나는 날, 내 삶이 마지막 정리를 하는 날 내 인생의 출구가 어디가 될 것 같습니까? 혹시 나는 출구가 없는 미래에서 헤매지 않을까요? 대로를 헤매다 길이 막혀버린 그 쓰라린 경험, 내 영혼이 그렇게 되지는 않을까요?

생명의 문은 어디일까? 정말 진리의 문은 어디일까? 정말 삶의 평안의 문은 어디일까요? 넓고 편안한 문은 거의 거짓 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넓고 화려한 문은 틀림없이 거짓 문입니다. 타락과 파멸의 문은 넓게 포장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커서 그리로 가는 자가 많다고 했습니다.

한 번은 예수께서 여리고라는 도시에 오셨습니다. 여리고는 당시의 가장 부유한 도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오는 모든 육상 통로는 반드시 여리고를 지나서 유럽이나 중동 지방으로 갑니다. 또 유럽의 문물들이나 북쪽 바빌로니아의 모든 문물들이 이집트로 내려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길목에 위치했습니다.

아프리카의 모든 문물이 올라올 때 사하라 사막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리고 밑에 있는 가사 지방의 황량한 들판과 사막을 경험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오아시스를 만납니다. 이곳이 바로 여리고입니다. 여리고는 물이 좋았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여리고에는 수많은 녹음이 우거져서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쉼터를 제공합니다. 중동지방 최대의 오아시스입니다. 당시 로마가 12만의 인구를 자랑하면서 세계 최고의 도시라고 할 때 이 여리고는 군락을 이루어서 5만명의 인구가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곳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성경이 늘 그런 것처럼 여기 도성에 한 사람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도성, 이 평화의 도성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이름이 삭개오라고 했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순수한 사람, 청결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에게서 이름을 받습니다. 부모님이 이름을 지을 때에 그냥 의미 없이 짓지는 않습니다. 그 아이의 생명의 제일 큰 가치관, 그 아이의 삶의 핵심적인 목적이 되라고 그 아이에게 바른 이름을 지어줍니다. 삭개오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삭개오', 순수한 자, 청결한 자 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볼 때마다 언제나 더러운 사람, 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 여리고 도성은 모든 물품이 모이는 중심지였습니다. 길르앗으로 향류가 모이고 모든 유통의 중심지였습니다. 무역의 길목에 앉아있는 여리고 도성의 세관장이 바로 삭개오였습니다. 로마의 권력을 힘입었습니다.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가장 순수하고 가장 청결하게 살라고 하는 아버지의 이름은 아랑곳없어졌습니다. 키가 작은 것을 보상하고 싶어서 자기의 키 작은 것만큼 돈을 높이 쌓았습니다. 돈으로 자신의 콤플렉스를 감추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없이 고독합니다. 한없이 소외감을 느낍니다. 내면의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외로움을 감추고자 더 많이 돈을 쌓았습니다. 그럴수록 더 강하게 외로움을 느낍니다. 세리장의 의자에 앉아도 그 의자가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그 사람들하고 자기는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 재물하고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고립감과 고독감과 소외감이 자신을 몸서리치게 합니다. 다른 길이 있을 것 같은데…. 누구는 고독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 최초의 절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인간 태초의 절규는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이고 하늘을 향하여 외치는 제일 무서운 절규였습니다. '아! 고독하다! 아! 고독하다!' 고독과 고립과 모든 사람으로부터 멀어진 외로움이 인간의 절규입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지상의 방랑자가 될 것이요, 지상의 고독자가 될 것이라는 선언과 함께 처절한 고독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해서 하나님 앞에서 처절하게 발버둥을 칩니다.
"하나님! 나는 더 이상 이 외로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외로워서 도저히 못살겠습니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감추고자 엄청난 돈을 쌓았지만, 권력을 얻었지만 더 깊은 고독과 외로움을 느껴야만 했던 삭개오. 그는 이 고독과 외로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자기 소외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발버둥을 칩니다. 어떻게 하든 삶의 또 다른 행복을 찾겠다는 희망만을 버리지 않겠다는 모습을 삭게오에게서 보게 됩니다.

오늘 여기에 나온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현실이 어떻든, 영혼의 모습이 어떻든, 여러분의 환경이 어떻든, 인간 관계가 어떻든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든 삶의 행복을 찾겠다고 하는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희망을 붙들어야 합니다.

어떤 소외감 속에 있든, 어떤 고립감 속에 있든, 어떤 비난 앞에 서 있든, 어떤 절망 가운데 있든 기억하십시오. 기회는 다시 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는 기회가 옵니다. 삶의 자유와 행복을 찾겠다는 희망을 붙드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쩌면 우리도 현대판 삭개오입니다. 진리를 찾는 패턴은 같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구경꾼의 위치에서 시작합니다. 멀찌감치 지켜보면서 예수가 누구지? 저분이 누굴까? 호기심은 있지만 나는 굳이 그 일에 관계되고 싶지 않다. 호기심은 있지만 나는 그 일에 굳이 직면하고 싶지 않다. 이것이 바로 현대판 삭개오입니다.

"내가 종교에 대해서 호기심이 있다."
"나도 예수에 대해 호기심이 있다."
"나도 교회에 대해 호기심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엉키고 싶지 않다."
"그저 멀리서 주님! 안녕하셨습니까? 왔다 갑니다."

그저 팔짱을 끼고 "우리 목사님은 책을 많이 읽으시니까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지당한 말씀이지! 그러나 나는 아직 아니야! 이 좋은 세상을 좀 더 즐기고 와야지!" 하는 사람들, 멀리서 바라보기를 좋아하는 사람, 멀리서 바라보는 그 삭개오, 그러나 바라보는 가운데 갑자기 기대감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처음에는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하나님의 영이 찾아와 충동을 주면 기대감이 일어납니다. 혹시 저분 속에서 내 인생의 근본 문제의 해결을 찾을 수는 없을까?

삭개오는 자신의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뽕 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색은 믿음이 아닙니다. 사색이니 명상이니 다 좋은 것이지만 그러나 사색은 믿음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뽕나무 위에 올라가야 합니다. 뭔가 일을 저질러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왜 동양 종교에서 동양인들 속에 참된 그리스도인을 찾기가 어려운가? 동양종교는 거의 명상종교입니다. 요가니 단이라고 하는 것들은 다 앉아서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움직여야 합니다.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소금처럼 녹아 내려야 합니다. 뽕나무 위에 올라가는 자기 파괴가 있어야 합니다.

뽕나무에 올라가는 자기 가식을 벗어야 합니다. 자기 안전 조작이라고 하는 가면을 벗는 파괴행위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합니다. 반드시 벗어야 합니다. 모든 가식에, 모든 가면에, 모든 자기 조작에, 자기 기만의 탈을 벗어야 합니다.

계급장을 떼야 합니다. 지식의 계급장도, 권력의 계급장도 다 떼어버려야 합니다. 키가 작다. 이런 변명의 계급장도 다 떼어야 합니다. 변명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자기 파괴입니다. 썩은 달팽이 같은 껍질을 깨는 행위!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그만 깨고 나오십시오. 깨고 나오십시오. 깨고 나오면, 깨고 올라오면, 깨고 내려오면,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삭개오야! 아들아! 딸아!" 음성이 들립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리라!" 이 얼마나 성스러운 지명입니까? 내가 오늘 너의 아들에게 가리라! 내가 오늘 너의 가정에 거하리라! 내가 오늘 너의 기업에 거하리라! 내가 오늘 너와 함께 거하리라!

뽕나무 위에서 자기의 모진 지난날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서 숨어있던 삭개오가 하나님 앞에 드러났을 때에 미래의 창대한 삶으로 선포하시는 예수님. 이 위대한 대면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자유의 시작입니다. 해방의 시작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변화는 어떤 이론이나 어떤 기교나 방법으로 되지 않습니다. 변화는 일대일의 대면이 기본적입니다. 너와 나의 관계. "삭개오야!" 보십시오. 구경꾼들에게는 대화가 없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일대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모든 가식과 기만과 변명을 다 내려놓고 주님 앞에 일대일로 서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보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를 만나는 순간 거룩한 변화는 시작이 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순간 여러분의 심령에는 말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과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의 변명과 고독과 외로움과 콤플렉스를 안고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변의 모든 비난과 과거를 문제로 삼지 않고 너의 집에 간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랑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듣는 자는 심령에 자유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의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이 음성을 듣는 자에게는 그 내면의 깊은 곳에서 말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인간을 고를 때에는 인간만큼 그렇게 까다롭게 고르지 않습니다. 인간은 대단히 까다롭게 고르는데 하나님은 어떤 역사의 충족을 위해서 인간을 고를 때 그렇게 까다롭지 않습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십니다. 우리 주님의 진리 중에 하나를 보면 어떤 사람을 용납할 때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될 모습, 가능성, 미래의 모습으로 선포하고 용납해서 최선의 지원을 합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네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기가 막히는 이야기입니다. 삭개오는 자기의 신분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돈을 가졌지만 권력을 가졌지만 힘은 가졌지만 명예는 가졌지만 자기 신분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이런 그에게 너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삭개오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문제가 해결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여러분, 삭개오의 마지막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든 자유가 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한 인생이 이 세상에 살면서 마지막 문제가 무엇일까? 마지막 자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소유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물질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삭개오가 그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물질로부터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그 많은 재산, 어마어마한 여리고 도성의 최고의 갑부였지만 그는 물질로부터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삭개오가 가지고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소유로부터의 자유, 물질로부터의 자유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자유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 여정에서 누구와 걸어가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름다운 공원도 혼자서 걸어가면 외롭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칠흙 같은 어두운 길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걸어가면 행복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삶을 푸른 초장 쉴만한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이것은 환경이 주는 어떤 것보다 더 힘있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송명희 시인을 여러분은 아실 겁니다. 이 분은 부모로부터 이 땅에 태어날 때 의사가 아이를 집어내면서 뇌를 손상시켜 한 번 울지도 못하고,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비참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온몸은 삶은 계란처럼 누르면 푹푹 들어가고 갈라지는 몸이 되었습니다. 아무 데도 쓸모가 없습니다. 모든 몸이 국수같이 휘감기는 그런 팔 다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애를 업으면 머리가 바로 뒤로 넘어가 닿을 정도로 그대로 그냥 뒤로 넘어가는 겁니다.

어느 것도 힘이 없습니다. 그냥 누워만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삶은 짜증스런 삶이었습니다. 그래도 말은 할 줄 아니까요. 항상 원망하며 불평하며 살았습니다. 부모를 원망했습니다. 세상을 비관했습니다. 하나님을 제일 원망했습니다.
'왜 나를 이렇게 태어나게 했습니까?'

16살, 그는 어머니 등에 업혀서 교회를 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거든 저 좀 만나 주세요. 저를 제발 만나주세요.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나 좀 만나주세요.'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매여 달렸습니다. '나는 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싫습니다. 죽고 싶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두루마리가 내려오면서 영어도 아니고 한국어도 아닌 글이 적어 내려옵니다. 이것을 알려 주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계속해서 두루마리가 내려오고, 이것을 적어서 이 글이 전 세계의 베스트셀러가 되고 수십 개국에 번역이 되고, 수십만 부가 팔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빛을 보았습니다. 어두움은 떠나갔습니다. 마음에 답답함은 떠나갔습니다. 똑같은 송명희인데 주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다음이 전혀 다릅니다. 똑같은 삭개오인데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다음이 전혀 다른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는 철학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감상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수양하고 교양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만남의 종교입니다. 창조자 하나님과 우리와의 만남입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하루하루가 천국 같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짜증스러움이 하지만은 우리에게는 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삶의 불편함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누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 전혀 의식이 되지 않았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진정한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왔습니다.

그는 연희동에서 살았는데 집이 가난하여 방을 비어 달라고 하는데 돈이 없어서 낼 수가 없었습니다. 글을 썼지만 그때까지 출판을 하지 못했습니다.
20살 때 그는 하나님께
"저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휠체어도 없습니다. 이제 가야할 집도 없습니다. 기쁨을 주신 것은 너무 감사한데 나는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난 아무 것도 없어요. 내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럴 때 또 하늘에서 두루마리가 내려 왔습니다. 적어라고 하는 겁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갖고 있지 않은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나중에 공평하신 하나님을 쓰라고 할 때 아닙니다. 이 세상은 공평하지 못합니다. 누구는 저렇게 편한데 이게 뭡니까? 그런데 어떻게 공평하다고 쓰라고 합니까 못 적겠습니다. 그래도 적으라고 하셨고 오늘 이 노래가 우리 복음성가의 히트곡이 되었습니다.

방송국의 부사장이 그녀의 어머니에게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미국은 의학이 많이 발달했으니까 송명희에게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어떻겠느냐?"
미국의 병원에서 너를 원하는데, 좋아질 수 있다. 가면 어떻겠느냐? 그러니까 어머니가 명희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 송명희가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대로가 좋아요. 하나님이 주신 이대로가 좋아요. 물론, 조금은 좋아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전체가 좋아집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나는 이대로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갖추어야 행복을 누리는 줄을 알았는데 이 분은 우리들과는 상상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지금 온 몸에 고통을 느끼면서 죽어가고 있는 몸이지만 더 큰 기쁨과 힘과 자유함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많은 사람처럼 이 세상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뛰어가야 하는 겁니까?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까? 더 많이 소유를 해야 하는 것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세상의 것은 가지면 가질수록 더 고독감과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의 것은 얻으면 얻을수록 더 두려움과 소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고독과 외로움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예수님만이 답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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