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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이긴 아브라함의 간증 (히 11: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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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이긴 아브라함의 간증 (히 11:17-19)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다. 그때 시험 당한다고 말한다. 시험 당할 때, 어떻게 시험을 치르느냐에 따라,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결단을 잘하여, 올바른 길, 복된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시험에는 2가지가 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이 있고, 사탄이 주는 시험이 있다. 우리말 성경은 구분하지 않고 썼다. 그런데 사탄이 주는 시험은(temptation), 죄에 빠지게 만들기에 유혹이다. 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은(test), 더욱 믿음을 키우고, 더 좋은 복을 주시려는 시련(trial)이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원하지 않는 시험을 치른다. 왜 시험을 치르는가? 학생들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시험을 보지 않으면, 실력을 파악할 수 없다. 시험을 봐야만 실력이 얼마나 되며, 부족한 부분을 깨달아 보충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실 사람에게는, 큰 시험을 치르신다.

고등학교 시험보다 대학입학 시험이 더 어렵듯이, 큰 시험은 큰 축복의 전주곡과 같다. 따라서 큰 시험이 닥칠 때 “하나님께서 나를 크게 쓰시기 위해서 연단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할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약1:2)에, 시험을 만나면,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다.

그러나 사탄이 주는 시험은, 항상 우리를 달콤하게 유혹해서, 죄를 짓게 만들고, 하나님을 대적케 한다. 사탄이 하와를 유혹할 때,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창3:4). 오히려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같이 되리라(창3:5)”고 했다.

사탄은 하나님을 무자비하고, 엄한 분으로 비쳐지게 만든다. 인간을 두둔하는 편에 서서, 말씀을 약간 비틀어서 혼동을 준다. 동시에 합리와 인간주의를 바탕으로, 진리를 왜곡한다.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게 됨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날 수 없다고 했다(마16:21-22).

예수님을 위한 말로 여겨졌지만, 예수님께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23)하시면서 책망하셨다. 사단은 언제나 합리성을 가장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사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 합리성에 있음을 알기에, 합리적으로 사람을 현혹시킨다. 그래서 많이 넘어진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오늘 말씀은 또 다시 아브라함의 간증이다. 지난 번 간증은 갈대아 우르를 떠난 사건이 중심이라면, 본문은 100세에 이적으로 낳은, 독자 이삭을 제단에 드리는 간증이다.

이 일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그러나 믿음으로 극심한 시험을 이겼다. 고학년이 될수록, 시험은 더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교사 입장에서는, 그때마다 필요해서, 또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되기에 테스트를 한다. 따라서 시험을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시험지를 놓고, 시험을 치르게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 시험을 잘 치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만 한다. 시험을 통과해야, 우리 믿음이 성숙되고 성장된다. 우리 앞에 있는 모든 난관을 믿음으로 극복함으로,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가시기 바란다.

1. 아브라함의 생애에 주어진 시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생애에 있어, 4가지 단계적인 시험을 주셨다.

(1)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창12:1).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시험이다. 이 말씀도 순종하기 쉽지 않다. 왜냐면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곳은, 삶의 안정된 기반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정한 이웃들이 있는 곳이다. 더욱이 나이가 들면, 환경에 적응하는데 참으로 어렵다.

이렇게 안정된 생활 환경을 포기하고, 미지의 세계로 떠날 수 있음은 대단한 믿음이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과감히 모든 것을 털고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첫 번째 시험을 통과했다. 그러나 온전한 순종은 아니었다. 롯을 데리고 왔기 때문이다.

(2) 롯과 헤어지라.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와서, 유일한 혈육으로 서로 의지하며 사는 처지인데, 헤어지라고 하니, 참 어려운 시험이었다. 롯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세속적인 사람이었다. 세상과 타협하는 자였다.

세상이 악한 줄 알면서, 그 속에 젖어 사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롯과 아브라함을 분리시키기를 원하셨다. 사실 롯은 고향을 떠나올 때, 청산할 대상이었다. 그런데 정이 많은 아브라함은 항상 롯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사로운 정을 끊기를 원하셨고, 결국 정을 끊었다.

(3) 이스마엘을 내어 보내라.

정실부인에게서 얻은 아들은 아니지만,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피를 받은 친아들이며, 첫째아들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내 보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뜻대로 일을 저질러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에는, 반드시 때가 있다. 그렇지만 인간은 조급하여, 하나님보다 앞서려고 할 때부터, 철저한 실패와 아픔을 자초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분명히 약속의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주님의 약속이 늦어진다고 생각하자,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했다.

이런 방법은 좋게 보이지만, 이는 보이지 않는 실패의 씨앗을 심는 것이다. 그리고 실패의 씨앗은 반드시 열매를 맺어, 그 사람을 괴롭힌다.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을 보내라는 것은, 이삭을 바치는 만큼은 아프지 않아도, 피붙인 자식과 헤어지는 아픔이기에,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4)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약속의 씨로 주신 이삭을 아브라함의 손으로 잡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이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절대 순종하고자 하는 아브라함에게조차, 의심을 품을 만한 시험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 단을 쌓았다. 나무를 벌여 놓았다. 그리고 이삭을 결박하여, 손에 칼을 잡고, 아들을 잡으려고 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릴 수 있는 지를 묻는 시험이다.

2.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왜 시험하셨는가?(창22:1).

“그 일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그 일 후에”란, 무엇일까?

(1) 이삭을 낳은 후였다.

창21장 처음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삭을 선물로 주셨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았으니, 얼마나 예뻤을까? 그래서 창22:2에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드리라고 하였다. 이삭을 3중으로 말한다. 최상급으로 말하고 있다.

이는 이삭이 점점, 우상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우상이란 하나님이 아닌데도, 하나님보다 사랑하면 우상이 된다. 이삭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아주 소중한 선물이었다. 그러나 선물을 주신 분보다, 더 사랑한다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셨다. 우리 인생에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 선택하라는 말씀이다.

정말 잔인하게 보이는 명령이지만,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리라는 명령에 순종하였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최고가 아니라, 하나님이 최고였다. (히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이런 결단을 했을 때, 아브라함의 믿음의 우선 순위가 회복되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게 되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우선 순위가, 한 순간에 회복되는 순간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귀한 믿음을 밖으로 끄집어내어서,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소중한 존재였지만,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보다도 하나님이 더 소중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너무나 소중했지만, 이삭이 하나님보다도 앞설 수는 없었다. 아브라함은 이삭 때문에, 이삭을 주신 하나님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제일주의 믿음을 가졌는지 시험하셨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한다. 우리도 정말 사랑하고 아끼는, 이삭 같은 자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삭 때문에 우리에게 이삭을 주신 하나님을 잊고 지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강을 주셨다. 그런데 건강 때문에, 세상일에 분주해서, 하나님 일을 하는데 게으르지 않나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장을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직장 때문에, 오히려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등한시하지는 않나요?

우리에게 물질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다. 그런데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께 헌금 드리는 일에 오히려 인색하지 않나요?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 바란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겠다는 거룩한 결심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우리는 그 어떤 이삭이라도, 아브라함처럼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꺼이 드리겠다는 거룩한 결단이 있어야 한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신다.

(2) 문제들이 해결되었을 때다.

창21:8 이하에, 하갈과 이스마엘의 문제가 해결되고, 22절부터는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는다. 이후에 아브라함이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즉, 아브라함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 받고, 행복하게 된 때다.

이제는 더 이상 무엇에 쫓길 필요가 없게 되었다. 또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긴긴밤을 지새울 필요도 없었다.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아브라함에게는 이때가, 가장 중요한 때이다. 사람은 소원이 성취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원이 성취된 후가 더 중요하다.

성공을 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성공한 후에는 더 중요하다. 이때부터 사람들의 실제적인 인격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어려울 때는 사람들이 겸손하고 매어 달리지만, 안정되고 모든 상황이 만족하게 되면, 그때 사람들은 달라진다. 그래서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말이 생겼다.

(3) 믿음의 고백이 진짜인지 증명하기 위하여(창21: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이 일 후에”(ה󰗦󰔞󰕗 םי󰙞󰔧󰕖󰕘 ר󰖏אַ)라는 말은, “이 말씀들 후에”라는 말도 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지만, 그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많이 넘어졌다. 실수도 했고, 타락도 했다. 잘한 일도 있었지만, 잘못하기도 했다. 일어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자빠지기도 하면서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살아왔다.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웠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 하나님은 바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였다. 누가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도, 자기 몸으로 하나님을 배웠다. 그 당시 가나안의 우상 신들처럼,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신이 아니었다. 우상들은 제한된 신, 힘이 세어지기도 하지만, 약해지기도 하는 그런 신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시험이 주어졌다. 만약 영원을 내다보는 훈련이 없었을 때,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이 주어졌다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 영원을 바라다보는 시각이 주어진 다음,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시험하셨다. 폭풍우를 견딜 수 있는 훈련을 통과한 다음에, 마지막 시험을 하셨다. 영원히 존재하시기 하나님을 믿는 순간, 그 말씀대로 할 수 있는지 시험하셨다.

3. 아들을 번제로 바칠 수 있던 힘은?

믿음으로 드렸다. 이삭은 약속 받은 자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다. (히11: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통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땅의 티끌처럼 창대하게 되리라고 약속을 하셨다. 그런데 아직 이삭은 장가도 들지 않은 상태인데,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셨다. 모순이 되지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면,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한다. 칼로 목을 쳐야 한다. 팔 다리를 자르고 각을 떠야 한다. 불로 태워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야만 한다. 어떻게 아버지가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그처럼 끔찍하게 죽일 수가 있는가?

사람이라면 차마 그렇게 할 수 없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주저하지 않고,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었던 이유는, 부활신앙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믿었기에, 순종할 수 있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은, (창13: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17: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셨다. 그러나 처음에는 믿지 못했다. 그래서 인간적인 실수도 했다.

그러나 죽은 자와 방불한 자신과 아내가, 약속된 아들을 낳자,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부르게 됐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며, 영원하신 분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히11: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다.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굳게 믿었기에, 자기의 독생자 이삭마저도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었다.

비록 자기 아들을 번제로 드린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기에, 죽은 자 가운데서 능히 이삭을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다.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살리셔서, 큰 군대를 이루셨다.

아론의 마른 지팡이, 곧 죽은 나무에서, 생명의 싹이 돋아나게 하셨던 분이다.

(히11:19下)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물론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개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손을 막으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손을 막지 않으셨다면, 아브라함은 실제로, 자기 아들의 목을 내리쳤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림과 같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받으심과 다름이 없기에, 17절의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는 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이미 동작이 완료되었다는 말이다. 창22:5-6에는 아들과 함께 올라갔는데, 19절에 아브라함 혼자 돌아온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은 자로 간주하고 내려왔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도로 받았을 때, 너무나 감격하고 기뻐서, 이삭과 더불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라고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인생의 최악의 절망은 죽음이다. 사람들이 죽음을 왜 두려워하는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 저 건너편의 부활의 약속을 믿는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부활의 소망이, 성도의 소망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비유라고 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의도하고 있는바가 무엇인가?

(1)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극심한 시험을 이겨냄같이, 우리도 믿음으로 얼마든지, 우리 눈앞에 있는 난관들을 헤치고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히브리서는 네로 때에 쓰여졌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쓰여졌다.

네로에게 핍박을 당함이 힘들까? 아니면 자식을 번제로 바치는 일이 힘들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시험을 이기고 승리해서,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받음같이, 우리도 믿음으로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축복을 누리자.

(2)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예표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비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저 갈보리 언덕에서 번제물이 되게 하셨다.

손과 발에 못을 박으시고, 옆구리에 창으로 찔리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6시간 동안 메달아, 물과 피를 다 쏟아 죽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버린 사건이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최선의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자신에게 최선의 존재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내어 주셨다. 이렇게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자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축복, 최선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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