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 인생 (막 12:41~44)
본문
여러분, 강소국(强小國, Small but Strong Country)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아마 들어 보셨을 겁니다. ‘작지만 강한 나라’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스위스, 네덜란드, 아일랜드, 싱가포르 같은 나라들입니다. 비록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같은 강대국은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게 부강한 나라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자칫 약소국으로 머물 수도 있었던 나라들이지만 정부와 기업, 국민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최선을 다함으로써 성공한 나라들입니다. 이런 나라들은 비록 나라의 규모가 작아도 얼마든지 부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대한 인생이 물론 좋겠죠. 큰 권력자, 큰 부자, 큰 학자 등 ... 그런데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희소합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한 겁니다. 그러나 비록 평범하고 소박하더라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인생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인생, 칭찬받는 인생이 있습니다. 그런 인생을 ‘강소인생’(强小人生)이라 부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강소 인생을 살았던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소박하다 못해 초라했던 인생, 하지만 예수님이 극구 칭찬했던 인생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도로서 과연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런 인생 아니겠습니까? 세상에서 인정을 받든지 못 받든지 그와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예수님 앞에 칭찬받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게 바로 인생을 잘 사는 것이고, 복된 인생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인정하는 강소 인생이 어떤 것인지 살펴봅니다. 부디 이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 모두 강대 인생이 되지 못한다 해도 강소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삼일 전, 즉 고난주간 화요일에 있었던 사건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은 방금 전에 외식하는 서기관, 종교지도자 등 기득권층을 질책하는 교훈을 말씀하셨습니다(막12:38절~40절) 그런데 이번에는 비천한 여인의 이야기를 합니다. 양자를 대비해서 말씀하시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성전 뜰에 있던 연보궤(헌금통)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삼일 후면 유월절이라 많은 사람들이 성전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헌금을 드립니다. 당시에는 헌금을 할 때 얼마 하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헌금통이 나팔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동전이 떨어지면서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 어떤 종류의 동전을 얼마만큼 헌금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직접 제사장이 헌금을 수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그 광경을 지켜보시다가 한 가난한 여인이 두 렙돈 헌금하는 모습을 목격하셨습니다.
42절 보면, 그 여인은 한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당시 팔레스틴은 전쟁과 재난이 많은 곳으로 고아와 과부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로 빈궁한 삶을 살며 천대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생계조차 어려웠습니다. 그런 여인이 두 렙돈을 헌금했던 것입니다. 렙돈은 헬라의 동전인데, 로마 돈으로는 2분지 1 고드란트입니다. 1 고드란트는 64분지 1 데나리온(농장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됩니다. 지금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데나리온을 1만원이라 칠 때 1 고드란트 즉 두 렙돈은 약 156원이 됩니다. 100원 짜리 동전 두개도 채 안되는 푼돈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모으십니다. 마치 큰 일이 난 것처럼 말입니다. 43절(상).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 ” 아마 이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얘들아! 어서 모여라!” 그리고는 그들에게 여인을 칭찬하면서 교훈하십니다. 어떻게 칭찬하십니까? 43절(하). 그 여인이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액수, 양의 문제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높이 평가하신 것은 그 헌금 속에 담겨진 신앙적 가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일까요?
[1] 여인의 큰 마음 : 감격 감사
그 여인은 비록 궁핍한 형편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 감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어려운데 무슨 감사?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본래 모습을 알면 인간은 어떤 형편 가운데서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본래 모습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적신으로 빈손으로 왔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나의 모습이 어떻든 그만큼 감사한 것입니다. 많든 적든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게 바로 신앙이죠.
욥을 보십시오. 그는 동방의 부자였습니다. 그때만 감사한 게 아닙니다. 그에게 얼마나 큰 시련이 닥쳤습니까? 10명의 자녀 한꺼번에 잃고, 모든 재산 다 잃고, 아내는 욕하고 가버리고 ... 그런데도 그는 뭐라고 고백합니까? 욥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 ” 자신의 본래 모습이 적신이었음을 고백할 때 고난 중에도 하나님 앞에 찬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고난 중에만 감사하기 어려운 게 아닙니다. 형통하고 부요할 때는 교만해져서 역시 감사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전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모든 게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데 본래 자기 것인 양 착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육신적으로도 그렇지만 영적으로는 더더욱 감격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 같은 죄인 그냥 두셨더라면 영원히 지옥 불에 떨어질 운명이었는데 구원해 주셨습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죄 사함 받아 천국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면 만만 감사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비록 비천한 가운데 있었지만 감격 감사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 마음을 담아 두 렙돈의 헌금을 바친 것입니다. 액수는 적지만 그 마음은 엄청 컸습니다.
눅7:37~38 보면 이와 비슷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어느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되어 가셨습니다. 그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모셔놓고 뻐겨 보려는 데만 관심이 있었는지 대접이 소홀합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한 여인이 슬며시 그 집에 들어옵니다. 그러더니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 발에 붓고 눈물을 흘리며 자기 머리카락으로 씻겨드립니다.
눅7:37~38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그 여인의 마음은 정말 큰 것이었습니다. 죄에서 구원해 주신 은혜가 하도 커서 눈물로 감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다윗도 시51:17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 하시리이다” 상한 심령이란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그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입니다. 이게 신앙의 진수입니다. 이걸 잃어버리면 이미 신앙에 병이 든 겁니다. 감격과 감사가 빠진 신앙은 마치 ‘타다 남은 장작’과 같고, ‘김빠진 사이다’와 같습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은 비록 부족한 게 많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감격 감사하는 마음만큼은 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여인의 큰 삶 : 최선
흔히 많은 사람들이 ‘사이즈 콤플렉스’에 걸려 있습니다. 특히 우리 한국인들이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작은 땅덩어리에 많은 인구가 복닥거리며 살아서 그런지 세계 최고, 동양 제일 ... 이런 걸 너무 좋아합니다. 물론 크면 좋죠. 하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크다고 다 좋은 게 아닙니다. 오히려 커서 탈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히틀러 같은 인물을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큰 인물입니다. 한 시대에 세계를 쥐고 흔든 사람 아닙니까? 그러나 역사 앞에 큰 죄인입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사람입니다. 차라리 작은 인물로 남았었더라면 좋았을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고나 최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천만 다행이죠. 만일 최고를 요구하시면 100명 모인 중에 오직 한 명만 해당됩니다. 나머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최선을 요구하시니까 100명 모두 해당될 수 있습니다. 물론 최선을 다하지 못하면 100명 모두 해당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비록 비천한 삶이지만 최선을 다한 사람으로 짐작됩니다. 그날도 어쩌면 남의 집 과수원에 가서 무화과 열매 몇 개 따느라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혹 구약 성경의 룻처럼 남의 밭에 가서 눈치 보며 서 있다가 장정들이 추수한 뒤끝에 이삭을 주워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형편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자신의 형편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 가운데 두 렙돈을 헌금한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 큰 삶입니다.
열왕기하 5장을 보면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아만은 아람 나라의 군대 장관으로 유력 인사입니다. 그런데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그 집 계집종이 그 부인에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땅에 가면 엘리사 선지자가 있는데, 그를 만나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아만이 가서 고침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아람 나라에 돌아와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그 계집종은 전쟁 통에 포로 된 이스라엘의 작은 소녀지만 그렇게 큰일을 했습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그 큰일을 이뤄주신 겁니다. 최선을 다하는 게 큰일입니다.
달란트 비유를 보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면 그 자체로 큰 일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더 큰 일을 맡겨 주십니다. 두 달란트 받았다 두 달란트 남긴 사람에게 주인이 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 ” 이게 성경적 승진의 원리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지만 본래부터 왕이었던 게 아닙니다. 그는 어린 시절 목동이었습니다. 그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자 하나님이 골리앗을 만나 이기게 해 주시고, 그 후 군인이 되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무공을 많이 세운 후 사울 왕의 사위가 됩니다. 사울이 다윗을 견제하고 핍박해서 오랜 세월 망명 생활을 했지만 최선을 다할 때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왕이 되니까 겸손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군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현대판 다윗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랜 전 이야기인데, 영국의 왕자가 시골에 여행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한참 헤매다가 목동을 만났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안내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그 목동이 구두로 안내해주고는 앞장서 안내해 주지는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왕자는 자기 신분을 밝히고 요청합니다. 심지어 하루 일당이 얼마인가 묻고 1년 치 품삯을 주겠다고 설득합니다. 그래도 주인의 양들을 책임져야 되므로 안 된다고 거절합니다. 화가 치민 왕자는 권총을 빼들고 위협해 보았지만, 그래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화를 버럭 내고 가버렸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왕자는 왕이 되었고, 그 목동은 자기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왕이 된 후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때 그 목동만한 인물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수소문해서 찾아내 수상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그가 곧 존 제임스 수상입니다.
[3] 여인의 큰 헌신 : 희생
그 여인의 헌금은 액수가 너무 적어서 아무 효용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가장 큰 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44절. ‘구차한 중에’ 드렸습니다. 그것도 자기 생활비 전부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희생입니다. 큰 헌신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헌금했기 때문에 그 날 저녁 끼니를 걸러야 됐을지 모릅니다. 자기는 물론이고 자식이 있었다면 그 자식도 끼니를 걸러야 했을 겁니다.
반면 많은 사람들, 특히 부자들은 큰 액수의 헌금을 했지만 예수님은 그런 것을 큰 헌신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헌금을 해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도 남은 돈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희생이 없는 것은 헌신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오병이어(五餠二魚) 기적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무리들을 가르치는데 해가 저뭅니다. 제자들은 무리를 그냥 보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먹이려고 합니다. 제자들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는데, 그 중에 안드레가 무엇이 있나 알아보다가 소년의 도시락 한 개를 구해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든 오병이어 도시락! 작은 것이지만 예수님이 기뻐 받으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나눠 주는데 5천명이 넘는 무리들이 다 배불리 먹고 남았습니다. 작은 헌신이 큰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그 소년으로서는 희생을 한 것이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신 겁니다.
엘리야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엘리야가 가뭄 통에 피신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과부의 집을 찾아간 엘리야는 떡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조금 남은 기름과 가루를 갖고 자기 아들과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고 하던 차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도 엘리야는 먼저 자기에게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여인은 주의 종의 말에 순종합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왕상17:15~16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 하니라” 희생적으로 헌신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큰 헌신을 하겠다며 실천을 미룹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도 못합니다. 현재 할 수 있다면 작은 것이라도 헌신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 사람이 나중에 큰 것도 헌신합니다.
옛날 미국의 작은 마을 교회에 주일학교 예배 시간이었습니다. 헌금 시간이 되어서 모두 헌금을 하는데 한 소년이 눈을 감고 있습니다. 담임교사가 나중에 따로 불러서 물어보니까 헌금할 돈이 없어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 저는 돈이 없어서 헌금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 마음을 드립니다. 제 생명도 드립니다.” 그 말에 감동을 받은 선생님이 지폐를 주면서 잔돈으로 바꿔 헌금하라고 합니다. 다음 몇 주일 동안 그 소년은 그 돈으로 헌금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 보니까 또 다시 눈을 감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은근히 화가 나서 왜 헌금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님! 호주머니에 돈을 갖고 있으니까 너무 사먹고 싶은 게 많아요. 견딜 수 없어서 한꺼번에 헌금하고 지난번처럼 눈을 감고 기도한 겁니다.” 그 소년은 작은 것이지만 희생한 것이고, 그것은 큰 헌신이었습니다. 나중에 이 소년이 자라서 목사 선교사가 되어 큰 헌신을 하게 됩니다. 그가 바로 1885년 4월 우리나라에 개신교 최초 선교사로 입국한 언더우드 목사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우리 자녀들 가운데 강대 인생이 나올 수 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강대 인생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 누구라도 강소 인생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고 최선을 다하며 주의 선한 일에 헌신하면 얼마든지 강소 인생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깜짝 놀랄 일들이 벌어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칭찬했던 사람, 기대했던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반면에 연약하고 미미한 존재였던 사람이 큰 영광과 상을 받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과연 나는 어느 쪽이 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고 강소 인생을 살아 이 세상에서 승리하시고, 저 천국에서 상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