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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뱅이 신앙에서 벗어나라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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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뱅이 신앙에서 벗어나라 성 경 : 행 3 : 1 - 10


예전에 제가 토요일 저녁이 되면, 꼭 보는 T.V 프로가 하나 있었는데,
“MBC 느낌표, 눈을 떠요” 라는 프로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보셨을 줄 압니다. 6살 난 여자 아이인데요, 얼굴이 참 예쁘장하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양쪽 눈 다, 녹내장 장애를 안고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가 어린이 집에 다니는데, 글을 읽거나 그림을 볼 때는, 눈을 사물에 바짝 붙여서 보아야만 겨우 보이는, 그런 정도의 시력입니다.

그 아이가 이제 각막 기증 대상자로 선정이 되어, M.C인 김재동이 부모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엄마는 그 아이의 대한 이야기를 하자마자 눈물부터 쏟아냅니다. 아이가 너무 불쌍하다는 겁니다. 지금은 아이가 아직 어려서, 친구들과의 이질감을 잘 느끼지 못하지만, 나중에 커서는 다른 아이들과 다른 것을 알게 될 텐데, 그 때 느끼게 될 감정, 그 때 아이들이 따돌리고, 혼자 외로이 지내게 될 것을 생각하면, 지금부터 가슴이 미어진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엄마의 감정, 이 엄마의 고통, 얼마나 느껴지십니까? 아마 당사자가 아니면, 그런 감정과 고통을 다 느끼지는 못하리라 생각됩니다. 어찌 그 부모의 고통을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실제 그런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라면, 충분히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처럼 장애를 가진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은, 누구를 막론하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도 보면, 이런 장애를 가진 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입니다.
그가 태어나 정상적으로 자라다가, 어떤 사고로 인해 앉은뱅이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날 때부터 일어설 줄 모르는 앉은뱅이였습니다.
날 때부터 눈이 잘 안 보이는 아이를 둔 엄마의 마음과 같이, 이런 앉은뱅이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줄 압니다.

다른 아이는 세월이 지나면 기기도 하고, 다리에 힘을 얻어 일어서며, 걷기도 하고, 또 자라면서 키도 크고, 몸무게도 늘어나는데, 내 아이는 여전히 날 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일어서지를 못하고, 앉은뱅이로 머물러 있다면, 이를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참으로 아플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바라보실 때, 이러한 안타까움으로 지켜보시는 성도들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아멘!!! 고후 5 : 17절에 말씀하지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할렐루야!! 새 것이 되었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지요.
예전의 세상 속의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예수를 믿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은, 빈부고하를 막론하고 다 영적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서 세월이 한 참을 지났는데도, 어떤 이는 10년이 지나고, 또 어떤 이는 20년이 지났는데도, 처음 예수를 믿었던 그 신앙 그대를 간직한 채,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이 있다는 겁니다.

다른 성도들은, 세월의 연륜에 맞게 신앙도 자라가며,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하며, 하나님의 기대에 맞는 열매들을 맺기도 하는데, 여전히 처음 어린 아이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기대는커녕, 자기 앞 가름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세월만 보내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들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마음, 어떠하겠습니까?
우리가 죄 가운데 거할 때,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를 지켜보시던, 그 마음과 같을 줄로 압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할 지도 모릅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습니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기대대로 영광을 나타내며 살아갈 줄 알았는데, 세월이 가도 변화는 없고, 여전히 처음과 똑같은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을 바라보실 때, 하나님은 마치 장애인을 둔 부모의 심정으로 고통스러워하며, 마음 아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의 신앙은, 어떠한 모습입니까? 혹 이와 같은 모습은 아닙니까? 내가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해 보십시오.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어떤 분들은 보면, 그 처음 신앙마저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의 현재 신앙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제일 사람이 우습게 보일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왕년에 내가 뭐 어떻게 했다.” 이런 소리 할 때입니다.
왕년에 뭐하면 뭘 합니까? 꼭 그런 사람 보면, 지금은 별 볼일 없어요. 결국에는 자기만 우습게 된다는 것이예요. 오늘 여러분 가운데, 혹 그런 분 계십니까? 우리 성천교회에는, 그런 분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팔로 건져 올린 세상” 이란 책을 쓰신 분이신데, 부산에 있는 새누리 교회에 다니시는, 박세호 집사님입니다.
제가 부산에 있을 때, 또 울산에 있을 때 섬기던 교회에, 이 분을 소개해서 두 번 간증집회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

제가 왜 이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느냐? 이 분은, 일급 중증 장애인입니다.
손이 뒤 틀려서 혼자서는 물도 마시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부인이 옆에서 항상 동석을 하며, 500리터짜리 페트병에 빨대를 꽂아 수시로 물을 마시게 합니다.
그 분이 말을 하면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통역이 필요합니다. 누가 통역을 합니까? 부인 집사님이 통역을 해 줍니다.

그런데 간증하는 내내 얼마나 웃기고 또 감동적인지, 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는 그 분이 간증 집회를 하면서, 마지막에 성도들을 향해, 외친 말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마지막에 그 분이 이렇게 외칩니다.
“여러분, 제가 장애인으로 보이십니까? 맞습니다. 저는 일급 중증 장애인 입니다. 그러나 제 눈에는 여러분들이 장애인처럼 보입니다.
그것도 중증 장애인처럼 보입니다. 저는 육신의 장애인이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힘차게 걸어가는 정상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육신적으로는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정상인이지만, 영적으로는 아무데도 갈 수 없는 중증 장애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이제 일어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무엇을 보시겠습니까?
우리의 육신입니까? 아닙니다. 이 육신은 아무리 멋있고, 잘 생겨도, 100년이 지나면 썩어져 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 썩어질, 육신을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무엇을 보십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속 사람을 보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모습을 보신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속 사람, 우리의 영적인 모습이 정상적이냐? 또 얼마나 자람이 있느냐? 이것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눈에 비친 우리의 영적인 모습, 현재 여러분의 신앙의 모습은 어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상적으로 자라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날 때부터 앉은뱅이인 채로,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만 하고 있습니까?
이제는 일어서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제는 일어나 걸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다시금 하나님이 안도하시고, 나를 향해 기대를 하실 수 있도록, 자라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자랄 수 있겠습니까? 그에 대한 방법이,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앉은뱅이가 다시금 다리에 힘을 얻고, 일어나 걸었던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앉은뱅이는 어디에 있었다고 했습니까? 날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성전 미문에 앉아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걸을 하기 위함이지요. 성전이라는 좋은 몫에 앉아, 성전에 드나드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수입을 좀더 늘여보려고 하는 목적으로 앉아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배를 드리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는 날마다 성전에 왔지만, 들어가지를 않고 있었습니다. 그저 성전 밖에 머물면서, 구걸만 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꼭 이와 같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교회에 나옵니다. 그런데 교회는 어떤 장소입니까?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세상에 속한 성도들이 다시금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 분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예배하며, 기도하며,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 드리는 곳이, 바로 이곳 성전이요, 교회인 줄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을 보게 되면, 이러한 신앙적인 목적으로 교회에 나오질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목적으로 나오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오시는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천 교회는 그렇지 않겠습니다만. 오늘날 현대 교회에 속한 많은 성도들이 한 주간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을, 주일을 통해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교회에 나온다는 겁니다.
복된 주일날, 하나님께 예배함으로 그 심령에 새로운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 좋게 표현하자면 성도의 교제를 통해, 지극히 인간적인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이러한 모습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와 무엇이 다를 것이 있습니까?

또 어떤 분들은 체면 때문에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성도의 교제를 통한 신앙생활에 대한 재미도 없습니다. 체면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겁니다. “그래도 명색이 집사인데, 봉사는 못해도 예배는 드려야지” 이런 마음에 교회에 나와 예배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예배시간이 조금만 길어져도 참지를 못합니다. 좀이 쑤십니다. 어떤 분은 축도도 하기 전에 일어서서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이런 행동을 합니까? 지금 예배 외에 다른 할 일이 많이 있는데, 지금 드리는 이 예배 때문에 그것을 빨리 못하게 됨으로 조급해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우리의 모습과, 오늘 본문의 앉은뱅이의 모습과 무엇이 다를 것이 있습니까? 몸이 왔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이 나와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요 4 : 23절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아멘!!!!
하나님은 오늘도 찾고 계십니다. 누구를 찾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오늘도 찾고 계시며, 이런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고, 축복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와도, 예배를 드려도, 기도를 드려도,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를 위해 깊숙이 들어오지를 못하고, 항상 겉 언저리에만 머물러 있다가 돌아가는 신앙, 오늘 본문의 앉은뱅이와 같이, 성전에 왔지만 하나님께 전심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단순한 성도의 교제로만 그치며, 그저 체면치레 하는 정도로, 자기 편한 대로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은, 이사야 1장에서 표현한 대로, 수많은 제물을 이끌고 하나님께 나왔지만, 하나님과 상관없이 제사를 드리며, 성전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신앙이 되었기에,
여전히 처음 신앙만을 간직한 채로 머물러 있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조금도 신앙의 자람이 없는 앉은뱅이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먼저 이 예배의 의미를, 예배의 본질을 회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신앙의 출발은 예배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에 예배가 온전하게 바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한 걸음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여전히 구원에 대한 감격만을 않고 살아가는 앉은뱅이 신앙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저와 여러분 모두는, 아니 우리 성천 교회 성도들 모두는,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신앙으로, 현재의 앉은뱅이 신앙에서 일어나, 언제나 힘 있게 하나님께로 달려가는 신앙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로, 오늘 우리의 신앙이, 앉은뱅이 신앙에서 일어나는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세워 주신 주의 종을, 잘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과 4절 말씀을 보세요.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보라 했습니다.

이 두절 말씀에, “본다” 는 말이 두 번이 나오지 않습니까? 3절에도 “보고” 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보는 것입니까? 앉은뱅이가 사도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4절에 나오는 “보라” 라는 말은, 누가 누구를 보라는 것입니까? 앉은뱅이를 향해, 사도들이 자신들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이 앉은뱅이가 사도들을 본다는 말씀이지만, 그 의미와 내용은 상반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사도들을 바라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구걸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인가를 사도들을 통해 얻을 수 없을까? 하는 바램에서 바라보았다는 거지요. 그러나 사도들이 앉은뱅이에게 바라보라고 한 데는, 다른 목적이 있었습니다. 무슨 목적입니까? 그에게 예수를 전하기 위해서였다는 겁니다. 자, 보세요. 앉은뱅이가 사도들을 바라보고, 사도들은 앉은뱅이를 바라보는데, 그 마음이 일치하지를 않습니다. 서로 어긋나고 있습니다. 서로의 관심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또 이와 같을 때가 많다는 것이지요. 성도들과 목회자의 바램이 틀립니다. 서로의 관심이 일치가 되지를 않습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주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요, 복음의 진리인데, 성도들은 자기만족의 은혜만을 달라고 하고, 세상적인 축복을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핀트가 도무지 맞지 않는 가운데서는, 신앙생활을 백날 해 봐야 성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의 성장은 목회자의 지도함을, 특별히 교회에 세워주신 담임목사님의 지도함에 잘 따를 때에 이루어지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공부를 합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그것만 가지고 여러분 만족하십니까? 다른 아이들보다 앞서가려면, 더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부족한 과목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원으로 아이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학교에서 배운 것만을 고집하며, 자기 방식대로 공부하기를 원한다면, 어찌 학업의 성적이 오를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여러분, 교회에 목회자들이 왜 필요합니까? 여러분의 모든 신앙생활을 지도할 뿐만 아니라, 각 개인의 부족한 부분들까지도 파악을 해 지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육신적인 장단점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영적인 장단점은, 목회자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목회자들이 성도들 개인을 향한 권면이 있고, 지도함이 있을 때는, 무조건 순종하며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합시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아멘!! 그래야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 스스로는, 자신의 신앙에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목회자들은 잘 압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장단점을 잘 알고 있는 목회자의 지도함에, 이제까지 여러분의 신앙만 고수하고, 자기 신앙이 다 옳은 줄 알고 따르지 않는다면, 그 신앙이 어찌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은 목회자들도 배우는 세상입니다. 왜 배웁니까? 배워야 성장하기 때문 입니다. 뭘 배우겠습니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선배 목사님들부터, 또는 앞서가는 목사님들을 통해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목회를 해도 자기 생각대로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도 배우지 않으면, 자칫 인간적인 생각으로 교회의 성도들을 이끌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목회자들도, 신앙의 성숙과 교회의 발전을 위해 배우는데, 여러분은 무슨 용가리 통뼙니까? 안 배워도 잘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들이 앉은뱅이를 어떻게 보았다고 했습니까? 주목하여 보았다고 했습니다. 주목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관심있게 살핀다는 말입니다. 목회자가 여러분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늘 관심있게 살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심을, 우리 성도님들이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성도들뿐만 아니라, 우리 성천 교회 모든 성도들은, 다 이러한 목회자의 관심과 지도함에 잘 순종하며 따르시기를, 그래서 영적으로 더욱 더 성숙한 가운데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 날마다 동행하는 신앙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세 번째는 무엇입니까? 세상적인 욕심을 포기해야, 앉은뱅이 신앙을 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적인 축복만을 추구하는 신앙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욕심을 포기하고, 신앙의 주된 목적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그 분만을 붙잡을 때, 우리는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 6절에 보니까,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앉은뱅이가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얼마를 바랬겠습니까?
그저 동전 몇 푼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한 말은 무엇입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이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앉은뱅이는 사도들이 무슨 큰 권세를 지닌 자들인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큰 능력을 행하고 다니니까, 돈도 많이 버는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입으로 표현은 안 했겠지만, 속으로는 다른 사람들보다 큰 돈을 바랬던 것 같습니다. 사도들이 그러한 생각을 읽었기에, 다른 사람보다 더 큰 돈은 내게 없다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앉은뱅이에게 금을 주고, 은을 주면 뭘 하겠습니까? 그는 여전히 앉은뱅이입니다. 여전히 앉은뱅이인 채로, 평생을 그렇게 지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신앙이 꼭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잘 하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에게도 그러한 것을 요구합니다. 기복적인 설교를 원합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심방을 갔더니, 한 여 집사님이 그런 말을 합니다.
우리 교회는 아닙니다. “목사님, 이 가정을 위해 기도 찐하게 해 주세요!”
아니 그러면, 제가 언제 기도를 묽게 했습니까? 목회자는 성도들의 모든 가정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찐하게 하지 말라고 해도, 찐하게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복은 목회자가 주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줍니까?
하나님이 주십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십니다. 다만 목회자는 복을 청원 하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 청원을 거절하시면, 아무리 찐하게 해도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복 받을 짓을 해야, 복을 받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기도를 묽게 해도, 복은 찐하게 오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현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에 가장 큰 문제점은, 우리의 신앙이 자꾸만 기복신앙으로 치우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센가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도 물질의 축복이, 가장 큰 축복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물질적으로 좀 여유로우면, 마치 하나님의 복을 다 받은 것처럼 생각 합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에 게을러지지요. 막말로 받을 것 다 받았는데, 뭐가 아쉬워 하나님 찾습니까?

그래서 신앙생활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보면, 대부분이 물질적으로 여유로움이 있는 분들일 때가 많습니다. 별로 부족한 것을 못 느낍니다.
경기도의 신도시 분당에 사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한다고 합니다.
“분당은 너무 살기 좋아 999당이다.” 여러분 무슨 뜻입니까?
천당 바로 밑이라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한 집사님이 부러운 듯이 제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제가 이런 말 했습니다.

“집사님, 부러워 하지 마세요. 999당은 지옥 스카이 라운지입니다.
지옥에서도 가장 화려한 불 쑈가 진행되는 곳입니다.” 돈 세는 재미에, 돈 쓰는 재미에, 자기 신앙 까먹는 줄 모르고 지낸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뭐라고 합니까?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수지맞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밑지는 신앙생활하고 있습니까?
지금 세상 재미에 빠져 있는 분들은 잘 모르실 겁니다. 그러나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실 날이 옵니다. 언제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을 달아보십니다.
그 때에, 세상에만 관심을 가지고, 늘 처음 신앙만 유지하며 살아온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무슨 뜻입니까? 저울에 달려서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천국이라고 모두가 평등합니까?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 천국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세운 공력에 따라, 그 상급이 저마다 다 다릅니다. 남들이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는 모습을 보면서, 부러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머무는 곳은 천국이기에, 시기심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회함 속에 부러워하는 감정은 있을 것입니다. 이 감정을 영원토록 품고서 지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 길어야 백년입니다. 그렇다면, 이 짧은인생, 여러분은 어디다 투자하시겠습니까? 이 땅에 투자하시겠습니까?
세상적인 축복이 전부인 줄 알고, 신앙은 기본만 유지하며 살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축복을 바라보며, 신앙적인 삶에 투자하시겠습니까?

이 시간 새롭게 결단하시길 바랍니다. 결단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일어서시길 바랍니다. 누구를 바라보며 일어서야 합니까?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되시며, 영원한 소망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일어서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앉은뱅이는 은과 금은 포기하고, 대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았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고, 시간만 낭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앉은뱅이는, 그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비록 사도들로부터 그가 원하던 물질, 동전 한 닢 얻지를 못했지만, 그들로부터 가장 귀한 것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앉은뱅이가 물질적인 욕심 포기하고, 주님의 손을 붙잡았을 때에, 그는 일어서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앉은뱅이 신앙이 언제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주님 바라보며, 그 분의 손을 붙잡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한 신앙의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의 신앙은 일어서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7절, 8절 말씀을 봅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그 앉은뱅이가 일어섰을 뿐 아니라, 이제는 사도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성전 미문에서 구걸이나 하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이,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는, 귀한 인생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신앙적 삶을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스스로의 신앙을 돌볼 줄 알며, “그들과 함께” 라고 했는데, 그들이 누구입니까? 사도들입니다. 여러분 앞에 세워 주신 담임 목사님이십니다. 우리 성천교회를 이끌어 가시기 위해 세워 주신 담임목사님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러 성전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신앙이 되어지기를, 하나님은 원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런 신앙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1차적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앙으로 복을 받기 위함이겠지만, 2차적인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우리의 신앙적 삶을 통해, 세상에 파급되는 효과가 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9절, 10절 말씀을 봅니다.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앉은뱅이 신앙이 이렇게 변화되었을 때, 우리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놀라며, 더불어 하나님을 향해, 그들의 발걸음을 돌이키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 이라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의 신앙이 달라지면,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앉은뱅이 신앙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모습이 아닙니다. 어떤 신앙이 앉은뱅이 신앙입니까?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으시는 분이 계십니까? 정적인 신앙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수동적인 신앙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남이 움직여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동적인 신앙, 무슨 설교를 들어도 도무지 꿈적도 하지 않는 정적인 신앙을 가지신 분들이, 바로 앉은뱅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는 동적인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능동적인 신앙인, 적극적인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매사에 앞장서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 나가시는 신앙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를 위한 일이, 곧 하나님을 위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이, 곧 내 일입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교회는 일꾼을 필요로 합니다.
그 일꾼이 누가 되어야겠습니까? 바로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변에, 아직도 앉은뱅이로 머물러 있는, 성도들이 있다면, 여러분들이 그 분들을, 또한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우는, 능력있는 주의 종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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