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 (욘1:1-3)
본문
본문 : 요나 1장 1 - 3절 마경훈 목사
본문 : 요나 1장 1 - 3절
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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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고을에 효자로 소문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효심이 얼마나 극진하고 마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한지 그 고을에 새로 부임해 오는 원님들마다 제일 먼저 그를 관가로 불러들여 상을 내리고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노부를 모시고 살아가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는 치하의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많은 세월이 흘러 새로운 원님이 부임해 왔습니다. 전임자들이 그랬듯이 몇 번의 만남 끝에 이젠 긴장감보다는 여유와 당당함이 엿보였습니다. “듣자하니 효자로 소문이 자자한데 어떻게 노부를 공경하는고?” “말씀드리기 황공하오나 아버님께서 아무 걱정 없이 아무 불편 없도록 편안하게 보살펴 드리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연세는 얼마시며 아버님이 혼자 되신지는 얼마나 되었는고?” “예, 금년 65세시고 홀로되진 지는 15년이 되었습니다.” 효자는 스스로의 대답에 만족해하며 ‘전임 원님들처럼 나에게 칭찬과 후한 상금을 내리시겠지’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원님의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저 불효막심한 놈에게 곤장 스무 대를 쳐라” 효자의 볼기짝이 떨어져나가고 심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는데 원님은 추상같은 한 마디의 훈계를 했습니다. “네가 나이 50에 혼자되었다고 생각해 보아라. 네 자식들이 무엇을 해 주어야 네 마음이 가장 기뻐하겠느냐?” 동네 사람들의 등에 업혀서 죽을 몸이 되어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가 무슨 큰 잘못을 했기에 심한 매를 맞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죽을 모습으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습니다. 끝까지 듣고 계시던 아버님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이제야 원님다운 원님이 오셨구나!”
요나의 문제와 오늘 우리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무심한 채로 자기 생각을 고집하며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잘한다고 칭찬 들으면서, 때로는 자신도 만족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신자들 가운데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즐겁게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이 달라서 순종을 하는데 억지로 순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하나님의 뜻은 알지만 자기의 뜻을 고집하고 하나님의 뜻과 반대 되는 방향으로 가다가 억지로 끌려서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요나는 세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요나서는 유대인들의 성경인 구약 속에 들어있는 신약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나서는 구약 속에 들어있는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전도서입니다. 요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직 이방인들에게 전달되어지기 800년 전에,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이를 것임을 이미 말씀하신 책입니다. 자신들만이 선민이요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이 없다고 생각하는 유대인의 정경 가운데 어떻게 요나서가 들어갈 수 있었는지 이는 참으로 놀라운 수수께끼입니다.
요나서에는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느니웨로 가라고 말씀하셨으나 요나는 불순종했습니다. 니느웨로 가야 하는 요나가 욥바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사공들에 의하여 바다로 던져지고 바다에 던져진 요나를 큰 물고기가 삼키게 됩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보내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기도를 하게 되고 하나님은 요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물고기는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게 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뜻밖에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느니웨의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백성들까지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금식하며 회개합니다. 요나는 느니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회개를 받으시고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으시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는 니느웨의 멸망하는 모습을 보려고 성 동편으로 올라가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늘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셔서 요나 위에 가리게 하여 시원하게 해주셨습니다. 요나가 박 넝쿨 때문에 심히 기뻐할 때 하나님은 벌레를 준비하셔서 박 넝쿨을 씹게 하셔서 박 넝쿨이 시들게 하셨습니다. 또 해가 뜰 때에 하나님께서 뜨거운 동풍이 불게 하시니 요나가 햇빛과 바람으로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박 넝쿨로 화를 내는 요나에 니느웨 백성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쳐주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하지 아니하냐”
사실 요나서에서 가장 강력하게 주는 메시지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한 인류구원의 도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마 12:40에 보면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주님도 사흘을 땅 속에 있을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멸망할 수 밖에 없었던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은 것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주어진 복음을 듣고 회개하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구원을 얻게 된 것은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죄 짐을 짊어지시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믿음으로 되이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요나서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과 사단 그리고 하나님과 요나를 비교하여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불순종한 요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신자들은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순종해야 하고 손해가 되어도 순종해야 합니다. 요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는데도 요나는 다시스로 가기 위하여 욥바에서 배를 탑니다.
요나의 불순종의 원인은 두 가지입니다. 국수주의 즉 극단적 민족주의와 니느웨의 구원을 원하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과 반대되는 잘못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민족을 사랑하는 것은 좋으나 극단적 민족주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이르기 전까지 요나는 이스라엘 국내에서 활동하던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예언은 언제나 정확하여서 그의 명성이 이스라엘 가운데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열광적일 정도로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애국적인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이기에 앞서서 이스라엘이 근방에서 가장 번성하고 강대하기를 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 요나에게 원수의 나라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로 가서 전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그가 가진 선민의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불순종했습니다.
사실 요나가 가진 잘못된 생각은 요나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열린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딤전 2:4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반대되는 오직 자신들만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눅4장에 보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과 자기 민족의 구원만을 생각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충돌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동네 낭떠러지로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메시지가 사람들의 속을 뒤집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엘리야 시대의 사르밧 과부와 엘리사 사대의 문둥병자 나아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과부가 아닌 이방인인 사르밧 과부에게만 엘리야를 보내셨다는 말씀과 엘리사 시대에 수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지만 엘리사는 오직 이방인인 나아만만을 고쳐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때 선민의식이 충만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민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과 충돌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 것처럼 지금 이 시대의 믿는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으로 가서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요나가 극단적 민족주의 때문에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것처럼 지금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나름대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는 어떤가?’ 입니다. 요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구원 받아야 할 사람에 대해서 이미 각 사람들의 영혼 가운데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복음을 들고 그 사람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든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이유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면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나아갑시다. 내 마음에 하나님이 주신 부담감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 나섭시다.
불순종에 대한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요나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나게 되고 뱃사공들의 노력에도 풍랑을 이겨낼 수 없을 때 그들은 누군가가 하나님을 진노케 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가 걸리게 되었고 그 결과 요나는 풍랑 이는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지옥의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육신이 원하는 일을 행할 때가 있습니다. 그 길이 아님을 알면서도 돌이키지 못하고 그 길을 갑니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댑니다. 환경 때문에, 사람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목사인 저도 이해하고 그 길을 가라고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목사가 이해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은 분명한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안개가 짓게 깔린 날 낭떠러지를 향해서 걸어갑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혼자만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족들까지 데리고 죽음의 길, 저주의 길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망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자신도 그 길이 어떤 길인지 모르고 가족들도 그 길이 어떤 길인지 모른 채 환난의 길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열어주는 사단과 막으시는 하나님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도망가려고 욥바에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게 됩니다. 마침 준비된 배, 때에 맞게 열리는 길, 이것을 하나님이 하셨는가 사단이 했는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사단이 열어놓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고 도망가는데 하나님께서 요나의 가는 길을 열어주셨다고 보는 것은 이치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사단은 니느웨가 구원 얻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가는 요나의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다가 길이 열리면 무조건 하나님의 뜻으로 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방향을 정합니다. 그리고는 며칠까지 응답하지 않으시면 그것이 주님의 뜻인지 알겠다고 기도합니다. 그리고는 응답이 없으면 자기가 정해놓은 방향으로 갑니다.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고 응답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응답을 어떻게 해주시느냐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응답하십니다. 응답의 방법까지 내가 정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마다 열리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은 열어주실 것은 열어주시고 닫으실 것은 닫으시는 분입니다. 육신의 부모도 자녀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지 않습니다. 아무리 자녀가 원해도 아닌 것은 막아야 합니다. 아무리 자녀가 원하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을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가장 선하신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원한다고 다 열어주실까요? 열린다고 다 하나님의 뜻일까요?
사단은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막으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을 열려고 할 것입니다.
열리느냐 닫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열려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닫혀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3. 기도하는 요나와 응답하시는 하나님
2장에 보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합니다. 요나의 기도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① 환난 중에 드린 기도입니다. 1절에 보니 그는 자기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기도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만날 때 문제에 집중하기보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그 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② 믿음의 기도입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아직 받지도 못한 응답을 받은 것처럼 기도합니다. 2-6절에 보니 자기가 부르짖으니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덩이에서 건져주셨다고 믿음의 고백합니다. ③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극한 고난 속에서 부르짖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나의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10에 보니까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해냈는데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가 육지에 토하니라.”
환난 중에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미국 L.A에 있는 바이올라 대학(Viola University)의 교수이자 목사인 어느 분의 간증입니다. 그는 십대 때 친구의 인도로 바이블 캠프에 참석했다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님은 신학교를 가려면 모든 인연을 끊고 집에서 나가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부모를 설득시키려고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서 그는 어린 나이로 부모의 도움 없이 대학에 입학하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많은 갈등 속에서 6개월이 지났을 때 그의 생활비는 바닥이 나고 친구가 조금씩 도와주던 것 마저 끊어져서 더 이상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어머니에게 편지로 써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답장은 냉담했습니다. “너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 네가 집을 나갈 때 무어라고 했니? 너는 나에게 분명히 큰 소리쳤다. ‘내 하나님이 나를 돌보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너를 돌보시지 아니하느냐? 네 하나님께 구하라.” 이 편지를 받고 그는 너무 막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다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부모님도 저를 돌보지 않습니다. 저의 어머님이 ‘네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는데, 왜 저를 돌보아 주시지 않습니까?” 수 일 후에 어머니로부터 또 편지가 왔습니다. 그 내용은 앞으로 일주일 후에 어머니가 로스앤젤레스에 갈테니 공항으로 마중을 나오고, 그때까지 하나님이 돌보아 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음이 분명하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함께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일주일 동안 열심히 기도를 했지만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어머니가 오시는 아침이 되었어도 응답이 없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은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짐을 쌓습니다. 그리고 실망하여 축 늘어진 모습으로 학교 문을 나서다가 그 학교 교무과장을 만났습니다. 그의 표정을 보고 그 선생님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며 잠시 함께 이야기를 하자고 했습니다. 그의 절망적인 이야기를 듣던 선생님은 “아침에 네 편지가 온 것 같은데 못 보았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확인해 보니,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백 불짜리 수표가 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 속에 그 수표를 들고 공항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를 보자 어머니는 “네 하나님이 너를 돌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가만히 있자 하나님이 안 돌보신 줄 알고 집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때 그가 말했습니다. “어머니, 이것을 보십시오. 저는 어머니께 60불을 구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40불을 더 보태서 100불을 주셨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화가 나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에 어머니한테서 편지가 왔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믿는 그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믿을 수 있는지 가르쳐다오.” 그로 인하여 그의 온 가족은 구원을 받았고 그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게 된 것이다. 사람은 기도하고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죠지 뮬러는 그의 자서전에서, 간절한 기도에 관한 원칙을 “기도를 시작하는 것으로는 또는 기도를 올바르게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또 몇 시간 기도하느냐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기도는 응답을 받을 때까지 인내하며 믿고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렵고 힘든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 엎드려 보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시 50:15에 보니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4. 말씀을 선포하는 요나와 역사하시는 하나님
3장에 보게 되면 요나가 니느웨성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대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임금으로부터 모든 백성들까지 조복을 입고 금식합니다. 심지어는 짐승까지 금식하며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요나는 자기가 니느웨성에 가서 외치게 되면 강퍅한 니느웨 사람들이 자기를 핍박할 것이고 자기는 그들에게 매를 맞아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났더니 의외의 반응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우리의 작은 노력에도 크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요나가 하룻길을 가면서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요나는 큰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역사하시니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1년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찬양합니다. 부족한 종과 여러분들이 작은 힘을 합쳐서 하나님의 일에 헌신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통해서 엄청난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전파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인격이나 능력이나 신앙과 상관없이 말씀 자체의 능력으로 역사가 일어난 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나는 올바른 맘보를 갖고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죽기 싫어서 할 수 없이 순종하고 말씀을 전했는데 그 말씀이 니느웨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
롬 1:16에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말씀합니다. 전하는 사람에게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불치병을 고치는 약이 있습니다. 누가 환자에게 약을 주든지 환자는 그 약을 먹으면 살게 됩니다. 약을 주는 사람이 배운 사람이냐 못 배운 사람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약을 주는 사람이 부자이냐 가난한 사람이냐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불치병을 고치는 약을 받아서 먹느냐 먹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적인 불치병을 고치는 복음의 약이 있습니다. 누가 되었든 그 약을 받아먹기만 하면 그 사람은 영적인 불치병을 고치고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먹느냐 먹지 않느냐는 받은 사람 책임입니다. 우리는 주기만 하면 됩니다. 열매는 하나님의 역사와 약을 받는 사람의 반응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주는 복음을 받기만 믿음으로 받아먹기만 한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든지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책임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신비의 약인 복음을 우리가 전파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에게는 이 약을 전파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12월 24일도 2주 남았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가지고 불신자들을 찾아갑시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약을 나눠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