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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신앙을 가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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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신앙을 가지십시오
에베소서 4장 13-16절

< 티켓 신앙을 주의하십시오 >

지난 7월, 우크라이나의 키에프에 사는 한 사람이 현대판 다니엘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키에프 동물원에서 로프를 타고 사자 우리로 내려갔습니다. 당시 동물원에는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는 우리에서 사자에게 접근하며 외쳤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저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저를 구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때 사자가 그에게 달려와 그를 넘어뜨리고 그의 경동맥을 끊어 거의 죽었다가 살아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가끔 보면 신앙의 참 의미를 모르고, 이상주의에 빠져 성경의 참된 메시지를 간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알고 믿음생활을 하는 것보다 이상주의를 믿는 것이 더 쉽고 화려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이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삶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일을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지는 보자!”고 하는 것이나 하나님 말씀과 반대로 살면서 마지막 죽기 전에 회개하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입니다. 그런 신앙을 어떤 목사님은 ‘티켓 신학(ticket theology)’이라고 명칭을 붙였습니다.

티켓 신앙인은 구원과 천국 티켓을 얻는 것을 신앙의 전부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성도의 삶’은 무시하고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만 중시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잃지 않습니다.” 그 말까지는 맞는다고 해도 나중에는 이런 논리로 삽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조금 엉망으로 살아도 괜찮아.”

티켓 신앙인들은 오직 구원만 중시합니다. 그들은 제자도나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삶의 스타일로 삼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옥만 피하기를 원하고 천국 티켓만을 원합니다. 그들은 천국에서 어떻게 행복하게 살까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고 그저 천국만 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은 사실상 천국에 가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 티켓 신학이 잘못된 이유 >

우리는 티켓 신학을 거부해야 합니다. 왜 거부해야 할까요? 티켓 신학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잘못이 있습니다.

1. 티켓 신학은 성도의 삶을 가볍게 봅니다.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이 구절은 믿음만 강조하지 않고, 믿음과 더불어 주님을 알기를 힘쓰고 온전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즉 이 말씀은 ‘믿음’과 더불어 ‘삶과 행위’도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성경공부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르칠 때 요절로 외우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에베소서 2장 8-9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티켓 신앙인들은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이 말씀을 대단히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은 외면합니다. 그 다음 구절인 에베소서 2장 10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하고 예수님의 뜻대로 행하도록 구원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즉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행위가 따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닙니다. 성도의 삶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몇 달 전에 미국에서 철로의 살인자(Railroad Killer)로 알려진 엔젤 매튜리노 리센디즈(Angel Maturino Resendiz)가 처형되었습니다. 그는 아주 잔인한 연쇄 살인범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처형 직전에 이렇게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님! 저를 용서해주세요. 저를 용서해주세요.” 또한 그는 창문을 통해 자신을 보고 있던 희생자 가족들을 향해서 “저를 용서해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자신은 희생자에게 전혀 자비를 베풀지 않았으면서 자신은 자비를 구하는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입니까? 그런데 자세히 보면 죄질은 덜해도 리센디즈와 같이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살면서 천국 티켓만을 원합니다. 그들은 성도다운 삶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천국만 가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구원과 은혜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성도답게 살려고 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2. 티켓 신학은 신앙의 성숙을 가볍게 봅니다.

본문 13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즐거움과 유익을 위해서 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드리고, 우리의 창조 목적대로 사명감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우리가 죄 사함 받고 천국 가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미국의 워렌 버핏(Warren Buffet)이 자신의 재산 440억 달러 중에 370억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말했습니다. “하늘로 가는 길에는 여러 길이 있습니다.” 그 말은 돈으로 천국 입장 티켓을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돈이 많을수록 천국행은 유리해집니다. 그러나 천국 티켓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천국은 돈 많은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주님 안에서 사랑과 용서와 감사와 기쁨을 가지고 산 사람들의 것입니다.

성숙한 믿음이란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내 삶을 희생하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따라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처럼 자신을 부인하고, 원수를 용서하고, 연약한 사람을 사랑하고 돌보는 신앙의 성숙함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3. 티켓 신학은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합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이 말씀은 신앙이 구원과 천국을 얻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티켓 신앙을 가진 사람은 구원과 천국이라는 결과만 얻으면 만사가 오케이지만 참된 신앙은 사랑 안에서 참된 일을 하며 주님의 형상이 되기까지 자라는 과정을 중시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과정보다는 결과를 더 중시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결과보다 과정을 더 중시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성공하는 것’보다 어떤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성공이 아니라 성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우리로부터 주님의 형상이 나오기까지 끊임없이 주님을 더 알고, 더 사랑하고, 더 헌신해야 합니다.

어느 날, 교회는 다니지만 술을 끊지 못한 한 집사님이 술집으로 전화한다는 것이 자기 교회로 전화를 했습니다. 마침 그 전화를 담임목사님이 받으셨는데 그분은 목사님을 술집 주인으로 착각하고 말했습니다. “여보세요? 저 아무개인데요. 소주 10병만 빨리 배달해 주세요.” 목사님은 그 교인이 무안해 할까봐 모른 척 전화를 끊으려는데 그분이 목사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말했습니다. “아니! 목사님께서 술집에는 웬일이세요?”

그때부터 목사님은 그분의 금주를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무개 집사님이 빨리 술을 끊게 해주세요.”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그 집사님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술 먹으면 천국에 가지 못하나요? 예수님 믿으면 천국 가지 않나요?” 목사님은 잘 설명해주었습니다. “집사님! 술 먹어도 천국에는 갈 수 있지만 신앙이 자라지 않으니까 끊는 것이 좋아요.” 얼마 후 그 집사님은 술을 끊고 교회의 기둥집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천국이라는 결과만 얻으려고 하지 말고, 천국 가는 과정에서도 승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술과 담배와 도박과 게임이 천국을 잃게 하지는 않지만 천국 가는 과정을 어렵고 힘들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끊어야 할 것을 끊어야 합니다. 그러면 다 좋아합니다. 배우자도 좋아하고, 아이들도 좋아하고, 목사도 좋아하고, 하나님도 좋아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자신도 자신을 좋아하게 되고, 그때부터 신앙도 급격히 자라게 됩니다.

구원은 죄로부터 구원받아 천국 가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의 구원에는 어리석음으로부터 구원받고, 실패와 절망으로부터 구원받고, 부정적 생각과 언어로부터 구원받는 것도 포함합니다. 그런 성숙함을 위해 마음과 생각과 성격이 새로워져야 하고, 보고 느끼고 이해하는 폭도 커져야 하고, 가치관도 달라져야 합니다.

< 성숙을 위해 필요한 것 >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이 업그레이드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예배와 기도생활, 전도와 봉사생활, 그리고 사회생활이 성숙해져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필요합니까?

1.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라!”고 말합니다. 본문 15절 말씀에서는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고 말합니다. 즉 삶의 목표를 주님에 두고, 주님처럼 생각하고, 주님처럼 살고, 주님처럼 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 믿고 천국 간다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천국 삶을 산다는 더 중요한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목표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 목표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2대 성품인 온유함과 겸손함을 절대 포기하지 말고, 어떤 장벽이 있어도 예수님 닮아가려는 노력을 절대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2.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어린아이는 귀가 얇아 유혹에 잘 넘어갑니다. 이단에도 잘 빠지고, 세상 유행도 잘 탑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자체적인 힘을 가지고 세파를 헤쳐 나가는 동력배가 아니라 바람과 파도에 따라 흔들리는 돛단배입니다.

반면에 성숙한 사람은 중심을 잃지 않습니다. 충성심이 변하지 않습니다. 어떤 고난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고난의 바람과 파도를 이길 수 있는 성령님이 주시는 자체 동력이 있습니다. 최후 승리는 흔들리지 않는 사람의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어떤 건설회사에 면접을 하게 되었습니다. 면접관이 물었습니다. “몇 번째 시험입니까?” 이 청년이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110번째 시험입니다.” 그러면 이 청년이 무슨 하자가 있겠구나 하고 생각해서 떨어뜨릴 텐데 의외로 면접에 합격해서 마침내 취직할 수 있었습니다. 면접관의 얘기에 의하면 두 가지가 마음에 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또 하나는 그렇게 많이 실패해도 당당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이 계속되어도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와 감사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더욱 성숙하게 될 것이고, 때가 되면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합격!”이라는 판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사랑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본문 15-16절 말씀을 보십시오. 두 구절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성숙한 신앙을 가지려면 사랑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특별히 자기만 생각하던 태도를 버리고 남을 생각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어렸을 때는 주로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다가 철이 들면 사랑받기만 좋아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사랑은 성숙의 증거입니다.

무엇보다 주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사랑은 낭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때 가룟 유다는“왜 낭비하느냐?”고 마리아에게 화를 냈습니다. 사랑의 낭비의 의미를 알면 마리아처럼 되고, 그 의미를 모르면 가룟 유다처럼 됩니다. 아내가 남편을 위해 추운 날 시장바닥을 뒤지고, 때로는 어려운 형편에도 소고기를 사서 저녁을 준비하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전부 낭비하셨습니다. 언제나 사랑엔 낭비가 있고 손해가 따릅니다. 사랑은 논리와 손익계산을 초월해야 할 수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잃어버리는 것이고, 빼앗기는 것이고, 바치는 것입니다. 손해보고도 행복한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뭔가를 잃어버리고 빼앗겨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신앙의 진수를 아는 사람이고, 교회를 위해 눈물과 재물, 젊음과 시간, 그리고 피와 땀과 에너지를 낭비해 본 체험이 있는 사람이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이 어릴 때는 축복받아야 행복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성숙해지면 예수님을 위해 사랑의 낭비를 해야 행복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최고의 낭비를 할 때 최고로 행복을 느꼈습니다. 신앙이 어릴 때는 내가 얻은 구원과 축복이 귀하지만 신앙이 성숙해지면 주님이 귀하고, 주님 안에서 교제하는 삶이 귀해집니다. 기도도 초기 단계에는 복을 구하지만 기도가 성숙해지면 하나님 한분만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만을 구하게 됩니다.

예배도 초기 단계에는 지난 일주일 동안 나를 지켜주신 은혜가 감사해서 예배를 드리지만 예배가 성숙해지면 그냥 예배 시간에 하나님 품 안에 있는 것 자체가 좋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서 좋고, 하나님께 더 많이 드릴 수 있어서 좋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낭비하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더 많이 줄수록 행복한 것처럼 사랑의 낭비가 있을수록 사람은 행복하게 됩니다.

< 대가를 치르는 신앙 >

진정한 신앙은 대가를 치르는 신앙입니다. 신앙 안에서는 마리아처럼 계산이 없어야 합니다. 마리아의 사랑은 낭비할수록 행복이 넘치는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나의 모든 것을 드리고, 나의 생명까지 쏟아 부어도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리아처럼 옥합을 깨고, 주님을 위해 전부를 낭비하고도 행복해 할 때 우리 교회는 부흥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살기 너무 바쁘고 힘든 상황에서 힘써 주일성수하고, 심지어 새벽기도까지 하는 모습은 마리아처럼 옥합을 깨뜨리는 모습입니다. 교회와 교인을 섬긴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때로는 사랑이 상처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때 조용히 주님 앞에 나와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모습도 마리아처럼 옥합을 깨뜨리는 모습입니다.

어떤 분은 너무 큰 시련을 당했습니다. 그래도 “내가 침체한 모습을 보이면 교우들도 같이 힘들어하겠지!”하고 아무 일도 없이 예전처럼 변함없이 목소리가 밝고, 얼굴 표정도 밝고, 유머도 하면서 주위를 즐겁게 해줍니다. 왜 그분의 고통을 모르겠습니까? 얼마나 고통이 크겠습니까? 그처럼 고통 중에서도 식구들과 교우들을 위해 밝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바로 마리아처럼 옥합을 깨뜨리는 모습입니다.

2달 전에 몽골의 임병철 선교사님이 이르틴 지역에 새로 개척한 이르틴 교회는 잘 성장하고 있습니다. 벌써 어른 40명, 어린이 60명이 모이고 있습니다. 그 교회의 음향 시스템과 특별히 OHP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또한 필리핀의 김일로 선교사님 교회도 벌써 100명이 넘게 모이는데 선교관 건축을 단층에서 한 층 더 올리면서 500만 원의 추가 공사비가 들게 되어 하나님의 신실한 공급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우리도 넉넉하지 않고 써야 할 재정이 많지만 우리가 돕는 정식 선교사 8가정과 협력선교사 11가정을 위해 기도와 물질로 힘써 후원하는 모습도 마리아처럼 옥합을 깨뜨리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춰둔 소중한 옥합을 깨뜨려 지금보다 더 많이 선교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향유 냄새를 전파하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의 사랑과 헌신엔 감동과 향기가 없습니다. 때로는 우리 중에 한 사람이라도 상식을 초월해서 자신의 옥합을 깨뜨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때 그 향기가 교회에 진동해서 서로가 힘을 얻게 되고, 그 향기를 하나님께서도 흠향하시고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실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주일성수를 해서 축복받았다는 분의 간증을 듣습니다. 그런 간증들을 보면 대부분 믿음으로 가게를 닫고 주일성수를 했더니 물질적으로 손해가 없었고 오히려 돈을 벌었다는 간증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주님만 바라보는 사람은 주일성수로 인해 손해를 보았는지 이익을 보았는지에 대한 의식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목적이 예수님 한분뿐이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예수님 때문에 손해 보고도 행복한 사랑을 하고, 특별히 주님을 사랑해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대가를 치르는 신앙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숙한 모습을 대견하게 보시고, 손해를 본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예쁜 것보다 성숙한 것이 더 예쁜 것입니다. 성숙한 것은 마음이 예쁜 것이고 신앙이 예쁜 것입니다. 그런 성숙함의 핵심적인 표시는 “내 것을 얼마나 예수님을 위해 포기할 줄 아느냐?”에 달렸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뜻에 몰입하고, 예수님께 우리의 소중한 것을 드리고, 예수님을 위해 우리의 사랑하는 것을 모두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때로 그 대가가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대가를 적게 치르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참된 제자가 되려면 대가를 치를 줄 알아야 합니다.

복음 영화 중에 ‘찬란한 문 저편(Beyond the Gates of Splendor)'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는 짐 엘리엇(Jim Elliot), 네이트 세인트(Nate Saint), 피트 플래밍(Pete Fleming), 에드 맥컬리(Ed McCully), 로저 유더리안(Roger Youderian)이란 미국 선교사들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그 선교사들은 1956년 1월에 그들이 전도하고 도우러 갔던 와오다니 인디안(Waodani Indians)에 의해서 에콰도르 정글에서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그때 그들의 사체는 강에서 부유하다가 강둑에서 흩어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처음에 와오다니 인디언들은 선교사들에게 마음을 열었지만 몇몇 사건을 겪으면서 결국 잔인하게 선교사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몇몇 살해당한 선교사 가족이 나중에 와오다니 인디언과 함께 살려고 에콰도르 정글로 다시 찾아왔다는 점입니다.

그 중에 네이트 세인트 선교사의 자녀들인 캐씨와 스티브(Kathy and Steve)는 나중에 그들의 아버지를 죽이는 일에 동참했던 와오다니 인디언에 의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와오다니 인디언 중의 한 사람인 키모(Kimo)란 사람은 영화에서 그 세례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강 저쪽 위에 있던 그들의 아버지의 무덤 옆에서 우리는 스티브의 침례를 행했습니다. 나중에는 그들의 어머니까지 이곳으로 돌아왔습니다..”

영화에서 네이트 세인트 선교사의 딸인 캐씨 세인트는 말했습니다. “저는 저의 아빠의 시체가 던져진 바로 그 강물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양쪽에는 젊었을 때 저의 아버지를 죽인 두 명의 남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제가 침례를 받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때 저의 마음에는 아버지를 죽였던 그 두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만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마음이 기독교가 추구하는 마음이고, 그런 삶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기독교는 사람들을 사랑의 눈으로 보고 변화된 마음을 가지고 원수조차 사랑하는 마음의 혁명을 이루어내는 종교입니다. 진정으로 성령이 우리 안에 임재하고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살려고 할 때 세상은 다르게 변할 것입니다. 성도가 된다는 것은 용서받고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만이 아니고 성경 말씀대로 살고 성경의 진리를 몸소 체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제는 어제의 나쁜 일은 깡그리 잊어야 합니다. 성격도 이제까지 많이 변화되었고, 앞으로도 많이 변화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제는 생각도 변하고 가치관도 변해야 합니다. 그처럼 변화된 마음과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숙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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