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정말 기다림 (사 61:1-3, 마 25:1-13)
본문
구약 이사야 61:1-3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신약 마태복음 25:1-13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요즘 가톨릭에서 유행하는 유머입니다.
예수님이 어느 마을에 나타나셨습니다. 맨 처음 예수님을 본 아주머니가 당황하여서 사제관으로 달려갔습니다. “신부님, 큰일 났어요. 예수님이 오셨어요. 저기 보세요. 막 교회 마당에 들어서시잖아요?”
신부는 주교에게 얼른 전화를 했습니다. “주교님, 어떡하죠? 예수님이 우리 교회에 오셨는데요…”
주교는 “잠깐 기다리세요” 하고는 교황청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교황청에서 온 대답은 이랬습니다. “바쁜 척 하시오!”
우리도 예수님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막상 예수님께서 오시면 어쩔 줄 몰라서 당황하게 될지 모릅니다.
지금 나에게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마치 사단장의 갑작스런 방문을 받은 중대장처럼 당황하고 바쁜 척 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국어 시간에 영어 단어장 외우다가 들킨 학생처럼 그저 죄송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볼 것입니다.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되어 우리는 대림절 초를 하나 밝혔습니다. 대림절의 주제는 기다림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성령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기다리지만, 이 절기는 기다림의 자세를 다시 한번 바르게 추스르는 기간입니다.
깨어있음
기다림의 첫째 자세는 깨어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기다리는 사람은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정말로 기다리는 사람은 밤새도록 깨어서 몸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면서 하얀 밤을 지새게 됩니다.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25:13).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은 깨어서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단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단 말이냐?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하시며 나약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잠을 자고 있는 우리에게도 똑 같은 동정의 말씀을 하실지 모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잠을 자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병사가 폭탄이 쏟아지는 처절한 전쟁터에서 잠시의 휴식 시간만 있으면 참호 속에서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사랑하는 여인의 사진을 보며 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나는 꼭 살아 남아야 한다고 다짐한다면, 사랑하는 이에게 깨어 있는 것입니다. 먼 나라에서도 고향의 가족을 그리워한다면 가족을 위해 깨어 있는 것입니다.
한 아이가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하다가 창 밖의 아름다운 경치를 넋잃고 바라보다가 “아버지, 저기 보세요. 저 나무가 기가 막히게 멋있지 않아요?” 이렇게 외친다면, 그 아이는 아버지에게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 속에서 살기는커녕 너무나 하나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살아갑니다. 나의 의지는 너무 강하고, 나의 능력은 아직도 신뢰할만하고, 내 지혜는 완벽한 것처럼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뜻과 영광은 언제나 뒷전으로 밀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도 문득 ‘하나님, 이럴 땐 어떻게 하지요?’ 물을 수 있다면 하나님께 깨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제가 오늘 당하는 이 고통에서 나를 건져 주세요!’ 하고 기도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현존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간절함
기다림의 둘째 자세는 간절함입니다. 기다림이 깊을수록 그 기다림은 간절합니다. 기다림의 간절함을 마태복음 본문은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듯이 주님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가난하여 배고픈 사람이 먹을 것을 찾듯이, 감옥에 갇힌 이들이 출옥의 날을 기다리듯이, 포로 된 사람들이 해방의 날을 기다리듯이, 주님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성탄의 소식은 이처럼 간절히 기다리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리라”(사 61:1-2).
‘오,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 저를 도와 주소서. 당신의 도움이 없이는 저는 그저 영원히 저주 받아 마땅할 죄인일 따름입니다.’ 하고 간절히 고백하며 우리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시 123:1-2).
준비
기다림의 셋째 자세는 준비입니다. 진정한 기다림은 아무것도 안하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신약 마태복음은 말씀하십니다.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중 지혜로운 다섯 명은 넉넉한 기름을 준비하고 미련한 다섯 명은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깊은 밤에 신랑이 예정된 시간을 넘겨서 갑자기 다가올 때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은 신랑을 맞을 수 있었고,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신부들은 우왕좌왕하여 당황하다가 신랑을 맞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간절한 기다림이라도 준비하지 않은 기다림은 진정한 만남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며 선포합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준비하여라.” 우리는 우리 마음에 주님이 오실 길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 사회 속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안동교회 앞 길로 많은 인파가 다닙니다. 특별히 주말이면 젊은이들이 교회 앞 거리를 가득 메우며 지나가는데 손에는 한결같이 고급형 카메라를 들고 있습니다. 좋은 사진 대상을 찾아 인사동 안국동 삼청동 길을 누비는 것입니다. 좋은 작품을 찍기 위해서 좋은 주제를 생각하고 좋은 대상을 찾는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작가는 좋은 대상을 찾아서 각도와 구도와 빛을 생각해서 섬세하게 사진을 찍습니다. 어떤 작가는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소형 컨테이너를 갖다 놓고 좁은 공간에서 몇 일을 보내기도 합니다. 야생동물의 생태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밤마다 웅덩이를 파고 담요를 뒤집어쓰고 몇 달을 지내기도 합니다. 감동적인 한 장면을 담기 위해서 눈 쌓인 위험한 산을 오르기도 하고, 뜨거운 사막을 가기도 합니다. 상상도 못할 빛의 마술을 오랜 기다림으로 맞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작가는 승용차에서 간소한 가재 도구를 챙겨서 일년 내내 차 안에서 자면서 사진을 찍는 작가가 있습니다. 언제 어떤 날씨가 어떤 풍경을 연출할지 모르니 항상 대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변화무쌍한 날씨가 언제 만들어낼지 모르는 감동적인 풍경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 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쉴 사이 없이 셔터를 눌러대는 아마추어 사진 작가와 진정한 프로 작가의 차이는 기다림의 농도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다림은 맹목적으로 마냥 기다리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기다림은 준비된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엄청난 수고와 고통과 인내입니다.
탄생할 아기를 기다리는 부부는 아기와의 만남을 위해서 젖병에서부터 옷과 침대와 장난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아기를 목욕시키는 법을 연습하고 안는 법을 연습하면서 많은 준비를 한 후에 아기의 얼굴을 마주하게 됩니다.
기다림, 정말 기다림, 진짜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나에게 오신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안 했던 선행을 갑자기 하는 척을 해야 하나? 갑자기 거리로 나가서 노숙자에게 선행을 베풀어야 하나?
예수님이 당장 우리 집 문을 두드리시면 나는 무엇을 할까? 먼지가 쌓인 채 놓여있는 성경을 들고 읽는 시늉을 해야 하는가? 갑자기 전화를 들고 자선을 위한 ARS 전화 번호를 돌려야 하나?
이렇게 당황하지 않으려면 준비해야 합니다. 예언자는 큰 소리로 외칩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백화점들은 벌써 몇 주일 전부터 성탄 장식을 멋지게 했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 왜 그렇게 무덤덤한지 모릅니다. 교회가 백화점에게 예수님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백화점은 흥겨운 케롤을 울리며 성탄절을 맞이 하지만, 우리는 내 마음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며 예수님 오실 길을 닦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사 40:3-4).
우리는 주님의 오실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높은 산을 깎아 내리고 깊은 골짜기는 메꾸어서 주님의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교만과 오만의 높은 산은 깎아 내리고, 죄악의 깊은 골을 메꾸어야 합니다.
깨끗한 마음을 준비하고 주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을 준비하고 주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집에 손님이 들어오실 때 집안에 쌓인 먼지를 모두 털어 내며 청소하듯이, 이것이 마음의 손님을 맞이하는 마음의 대청소입니다. 마음 구석 구석에 박혀있는 찌든 욕심들, 시기, 불평, 분노, 교만, 분쟁, 이기심을 치워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 저기 빈틈없이 놓여 있는 분주함, 산만함, 나태를 쓸어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겸손하게 준비기 된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 “주님, 이제 오셨습니까? 주여, 속히 오시옵소서!” 외치며 맞게 될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 같은 죄인들을 품에 안아주실 것입니다.
나를 태우는 불꽃이 없고는 주님을 맞는 준비가 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옥합을 깨뜨리지 않고는 주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옥합처럼 최고의 보석으로 여기던 나의 자존심을 깨지 않고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내 마음이 깨어져서 상한 마음이 되었을 때 우리에게 오십니다. 주님은 찢어지고 깨어진 내 마음의 자리에서 상처에서 새 살이 올라와 아물듯이 치유의 능력으로 다가오십니다. 다 썩은 고목에서 나오는 새 순이 돋듯이 생명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가 죽은 존재라는 것을 알았을 때 예수님은 새 생명으로 오십니다. 내가 심판 받았다고 괴로워할 때, 모든 징벌의 사면장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일은 괴로운 일이 아니라, 사모하고 간절한 즐거움입니다. 기쁨이 넘치는 소망입니다.
예수님은 연약하지만 강한 분으로 오십니다.
예수님은 낮은 곳에오시지만 높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천한 몸으로 오셨지만 귀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자리 십자가로 가셨지만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약한 마음은 생명 넘치는 예수님의 강함을 입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낮은 마음은 예수님의 높여주시는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천한 사람들은 귀하고 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로 가는 사람들은 부활의 권능을 입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기쁨의 잔치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며 간절한 마음으로 깨어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깨끗한 마음, 빈 마음, 낮아진 마음, 겸손한 마음을 준비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박병욱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