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단 5:22-31)
본문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무리로 다니엘에게 자주 옷을 입히게 하며 금사슬로 그의 목에 드리우게 하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니라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육십 이세였더라
바벨론에 벨사살 이라는 왕은 유명한 느브갓네살 왕의 아들로 어느 날 그는 천명의 귀인을 초청하여 왕궁에서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마침 왕이 술을 마시고 거나하여 맞은편 벽을 바라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왕궁 촛대 맞은편 벽에 사람도 없고 팔도 없이 손가락 하나가 나타나서 벽에 큰 글씨를 써놓고 사라졌습니다. 그것을 본 벨사살 왕은 너무도 놀라서 낯빛이 변하고 번민하며 다리 마디가 녹는 듯 하고 두 무릎이 맞부딪쳐 와들와들 떨었습니다. 왕은 즉시 술자리를 치우고 전국의 술객들과 박사들과 점쟁이들을 불러서 큰 소리로 그 글씨를 읽고 해석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글씨를 해석하는 자에게는 자주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드리우며 나라의 세 번째 치리자를 삼겠다고 공표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무도 그 글씨를 읽지 못하고 해석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의 두려움은 더해 갔는데 마침 태후가 이 소식을 듣고 왕궁 잔치 자리에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는 왕에게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그를 불러서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고 권면했습니다. 왕이 그가 누구냐고 묻자 태후는 벨드사살이라는 다니엘을 천거하였습니다. 갑자기 부름 받은 다니엘이 왕궁에 들어오니 왕은 그에게 후한 상과 나라의 셋째 자리를 줄 터이니 그 글씨를 읽고 해석하라고 하였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귀한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고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십시오 그러할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씨를 읽으며 그 뜻을 알게 해 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글을 이렇게 읽었습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그리고 그 뜻을 자세하게 해석하여 주었습니다.
메네는 왕의 나라를 세어보고 그것을 끝나게 하겠다는 것으로 두 번 하신 것은 반듯이 이루겠다는 강조의 뜻이며 데겔은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하여 치워 버린다는 뜻이고 우바르신은 나라가 둘로 나뉘어 메데와 파사에게 준다는 뜻입니다 하고 해석했습니다. 즉 세어보고 세어보고 달아보니 모자라서 치워 버리고 다른 데로 넘어간다는 말이었습니다. 벨사살 왕의 행적을 세어보고 달아보아도 모자라서 다른 나라에 넘기시겠다는 하나님의 심판의 계시였습니다.
과연 그 날밤 메데와 파사 두 나라가 연합하여 성문을 부수고 처 들어와 왕과 그 나라는 멸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시니 왕의 권위는 하루 밤 즐거움이요 잔치자리는 초상자리가 되었으며 호화왕궁은 죽음과 멸망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이 글씨는 오늘 우리와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아침에 하나님의 손가락의 글씨인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을 말씀의 제목으로 삼아 삶의 거울로 증거 하고자 합니다. 말씀을 들으시며 강림절과 금년 마지막달인 12월을 맞아 마음의 옷깃을 여미어 축복의 기회로 만드시는 만안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우리의 죄를 달아보시고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벨사살 왕은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1)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아버지 느브갓네살 왕은 말년에 교만해지고 완악해져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미쳐서 들짐승처럼 풀을 뜯어먹고 머리와 손톱 발톱이 독수리처럼 되어서 죽었습니다. 그러한 아버지를 보고 왕위에 오른 벨사살 왕이지만 이 하나님의 징계를 두려워하지 아니했습니다.
2) 계속하여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3) 아버지가 멸망한 교만의 자리에 계속 있었습니다.
4) 성스러운 것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거룩한 기물들을 가지고 천명이 넘는 귀인들을 초대해서 술 먹는 도구로 썼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아무리 달아보고 세어보아도 아버지 느브갓네살과 다를 것이 없기에 왕궁 잔치자리에 심판의 말씀을 써주시고 결국 그와 그의 나라를 심판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시고 우리들에게 이 아침 읽게 하시는 것은 우리신앙의 바른 자세를 촉구하고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손의 글인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벨사살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귓등으로 듣지는 않았습니까? 교만과 불순종의 자리에 있지는 않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는데 마귀의 자녀 노릇하고 살거나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거나 먹고 마시는 죄악의 삶을 만들지는 않았습니까?
교회의 거룩한 성물들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기는커녕 세상 물건보다도 가치 없게 여기고 세상 목적이나 내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나 예물을 내 것으로 쓰고 주께 약속한 약속을 식언하지는 않았습니까? 주신 직분과 사명을 값없이 여기고 내 기분에 따라 충성하기도 불 충성하기도 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 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서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회개 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회개할 줄 모르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향하여 예루살렘의 딸들아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식을 위하여 울라고 간곡하게 당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우리 하나님께 우리의 죄악을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이렇게 회개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다윗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이스라엘 왕이 되었습니다.
나라를 견고케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아 전쟁마다 이기고 나라가 승승장구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게을러지고 교만해졌습니다. 어느 날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한 여인의 자태를 보고 반하여 왕의 권세로 그 여인을 불러 간음의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 여인이 잉태하자 자신의 죄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그 남편을 전쟁터에서 불러 휴가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충직한 우리야는 그 아내와 동침하지 아니하니 그를 전쟁터에 다시 보내며 군대장관 요압에게 명하여 격렬한 전쟁터에서 전사하게 했습니다. 다윗이 지은 죄는 한 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남의 아내를 탐하여 범하는 간음의 죄를 지었고 남의 가정을 파탄 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죄의 합리화를 꾀하였고 그것이 여의치 않자 그 남편을 죽이는 살인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책망하셨습니다.
다윗은 그 책망의 말씀을 들으며 “내가 여호와께 범죄 하였도다”하고 그 즉시 금식하고 통곡하며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받으시고 그 불륜의 아내인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닥치기 전에 회개하고 바로 서셔서 책망이 아닌 축복의 자리로 만드시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우리의 사랑을 달아보시고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만 달아보시고 징계와 책망의 심판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의 사랑의 행위도 달아보시고 마음에 합하시면 그 분량에 따라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삼상 2장 3절에 보면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하고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사도행전 10 장에 보면 이달리야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라는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도에 힘쓰고 많은 구제를 행하였습니다. 그러자 어느 날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에 천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고넬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행 10:3-4)
고넬료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베푼 사랑의 행동은 세상의 이야기로만 남아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의 저울에 합격하니 천사를 보내어 그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축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저울에 합격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만안교회 성도 여러분 열심을 품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누구를 사랑해야하겠습니까?
1) 하나님을 사랑하십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무한대의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0-11)
그러니 성도의 마땅한 자세인 하나님 사랑에 부족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2) 이웃을 사랑합시다!
아브라함은 이웃 사랑을 실행하다가 어느 날 부지중에 하나님과 천사를 대접하고 그로 인하여 이삭을 선물로 100세에 얻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남들에게서도 받지 못할 고난을 받았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다가 결국은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이었습니다. 귀한 집의 아들이 졸지에 남의 나라에 와서 종이 되었습니다. 그때는 한번 종이 되면 자손 대대로 종이 되는 때였습니다. 이런 기막힌 처지에서 만일 요셉이 이 일의 원인 제공자인 형들을 미워하고 원망하며 살았다면 일찌감치 울화병으로 정신질환자나 폐인이 되었을 것이고 그로 인하여 일찍 죽었을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에게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에도 자살했을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서도 형들을 원망하고 미워하며 신세를 한탄하다가 보잘것없는 죄수로 그의 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형들을 용서하고 사랑했고 20 여년 만에 만난 형들을 보고 반가워 울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가 죽고 요셉이 보복할 것을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요셉은 당신들은 내 원수가 아니고 나를 애굽에 팔아 총리대신이 되게 한 은인이라고 이야기하고 그 은혜를 갚고자 형들과 자녀들을 장래를 책임지겠습니다 하고 약속하였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하나님의 저울에 달렸으니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셔서 누구도 누리지 못하는 축복을 누린 요셉이 된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만안교회 성도여러분!
우리의 사랑의 무게는 어떠합니까? 매일 저울에 몸무게만 달지 말고 하나님과 이웃사랑의 무게도 달아보시기 바랍니다. 미워하고 싸움하고 한번 맺은 미움 풀지 않고 산다면 본문의 벨사살 왕처럼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심판의 저울에 합격하시므로 요셉 같은 놀라운 축복을 누리시는 만안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의 충성을 달아보시고 심판하십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는 우리의 충성을 달아보신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달란트 비유나 므나 비유, 포도원의 농부 비유가 모두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 비유가 많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충성을 중요하게 보신다는 것이고 그 심판도 분명하게 하신다는 약속이 담겨져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칭찬과 더 큰 것을 맡김과 주인의 잔치자리에 초대를 받았으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있는 것조차도 빼앗기고 책망과 내어 쫓김을 당하였습니다.
므나 비유에서는 열 배로 남긴 자는 열 고을을 받아 충성하여 남긴 만큼 축복하신다고 약속하시고 반면에 충성하지 않아 한 므나를 그대로 가진 자는 끌어내어 죽이라고 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불충성의 징계가 큼을 상징하는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포도원 비유에서는 불 충성한 농부들을 모두 진멸 하겠다고 경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다 충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 불충성자들에게는 책망을, 충성하는 자들에게는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으로 충성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부름 받은 성도로 충성의 자리에 들어 가셔야 할 줄로 믿습니다.
미국 남북전쟁의 한 격렬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몇 명의 남부군 병사가 풀이 우거진 언덕 위에 외로이 서있었습니다. 사령관이 이들에게 다가와서 “너희 상관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있는 시체를 가리키며 “저희 상관은 저기에 누워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런데 너희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고 사령관이 물었습니다. “각하 우리는 그분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면서 경의를 표하고 있습니다. 저희 상관은 우리들에게 이 언덕을 지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명령을 시행했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충성된 부하들입니까?
우리들도 우리의 위대한 대장이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돌아가셨을지라도 전투 장에 누워 계시지 않습니다.
다시 일어 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십니다. 때문에 그분을 위하여 우리는 충성해야합니다.
중세의 논지우스는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어느 날 그가 홍해 가에서 나무를 줍고있는데 유방암이 걸린 여자가 찾아와서 그에게 말했습니다.
“논지우스라는 성자를 찾습니다. 그분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십시오” 논지우스는 왜 그를 찾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그분이 병 고치는 능력이 있어서 그분께 가서 기도를 받고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논지우스는 “논지우스는 나쁜 사람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이름을 빛내는 사기꾼입니다 그런 사람을 찾지 마십시오”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그럼 나는 어떻게 합니까 하고 안타까워했습니다. 논지우스는 내가 기도해 주겠다고 하고 그녀를 위해 기도해 주자 유방암이 나았습니다. 논지우스는 “이 병은 내가 고쳐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고쳐주었소 그러니 가서 예수님께만 감사하시오” 하였습니다. 그 후 여인은 돌아가서 논지우스는 사기꾼이라고 비난하고 죽을 때까지도 예수님만 찬양하고 논지우스를 비난하며 죽었다고 합니다. 논지우스는 세상 적으로는 성공자가 아닐지 모르나 오직 예수를 위해서는 충성스런 주님의 종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충성의 색깔을 살펴보십시다. 자신은 죽어가며 우리에게 충성의 본을 보이신 대장 예수를 잃어버린 충성은 아닙니까? 내가 영광을 받기 위한 충성을 하면서 주님을 위해 충성한 줄로 착각하고 산 색깔 바랜 충성은 아니십니까? 자기 비위에 맞지 않으면 직분도 사명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는 어린 아이의 충성은 아니십니까? 참다운 충성을 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충성을 측정하시는 저울의 바늘이 한바퀴도 더 돌아가는 참된 충성의 무게로 인정되셔서 하나님의 저주나 책망과는 반대로 축복과 칭찬과 더 큰 것으로 맡기심을 받는 주님의 종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유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