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나간 둘째 아들의 마음 (눅15:11-24) > 설교자료실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설교자료실 >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집나간 둘째 아들의 마음 (눅15:11-24)

본문

집나간 둘째 아들의 마음
누가복음15:11-24
2006년 12월 3일 주일 낮예배 최일환목사 설교

11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설교:
지난주일 이 본문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도 동일한 본문을 봉독했습니다.
오늘도 동일한 본문 속에서 “집나간 둘째 아들의 마음”에 대해서 살펴보길 원합니다. 그리고 다음 기회에 집 안에 있는 큰 아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사람들은 본문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을 “탕자”라고 부를까요? 蕩子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蕩” 字는 방탕하다 뜻입니다. 그는 방탕한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재산을 탕진한 아들이기에 탕자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영적으로 아버지를 떠난 사실 자체가 탕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왜 집을 나갔을까요? 그리고 왜 아버지 재산을 다 날려버렸을까요? 그는 왜 그다지도 어리석고 미련한 짓을 했을까요? 좀 모자라거나 단순히 놀고먹는 것을 좋아해서 재산을 탕진했기에 탕자라고 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오늘 이 시간 저는 그가 왜 집을 나갔을까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아버지 품을 떠나 자기 힘으로 성공을 잡아 보려고 나갔습니다.
1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타국에 가서 사업을 하면 성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아버지를 멀리 떠나 사업을 하려 했습니다. 사실 그는 아버지라는 울타리를 싫어했습니다. 사사건건 간섭하고 사사건건 이래라 저래라, 이것해라, 저것 해라 하는 그것이 귀찮고 싫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 한번 사업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멋지게 성공하고 싶었고 일확천금을 벌어보고 싶었습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능력에 대해 자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이렇게 하면 한 번에 돈을 왕창 벌수 있다고 보는데 아버지는 늘 동일한 일만 시키고 고리타분한 일을 계속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에게 아버지는 한마디로 재미없는 존재입니다. 불순종하자니 힘들고 시키는 대로 살자니 귀찮고.... 그러니 그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저 넓은 세상은 화려함이 있고, 달콤함이 있어 좋았습니다. 재미있을 것 같고 신바람 나게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탕자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야망과 꿈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실력과 계획이 없었고, 그의 마음가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은 허랑 방탕”으로 가득 찬 마음이었습니다. 허랑 방탕”이라는 말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더니 그는 얼마 못가서 재산을 다 허비하고 맙니다. 그것도 사업을 위해서 쓴 것이 아니라, 탐욕을 위해서, 정욕을 위해서 써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 정말 어리석지 않습니까? 어리석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적어도 이 사람과는 다르다.”그러나 저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다를까요? 무엇이 다른가요? 얼핏 보면 다르게 보이지만 속사정을 보면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품안에 있는 것이 귀찮고 교회 안에서 목사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싫은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지 말라, 저것은 해라. 술 먹지 말라, 담배피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이런 말이 나를 억압하고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같단 말입니다. 교회밖에 사람들은 맘껏 먹고 즐기고 하는데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나? 회의를 품고 세상을 갈망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속지 마셔야 합니다. 마귀가 우리를 넘어트리려고 유혹합니다. 세상은 재미있다. 한번 사는 인생 멋지게 살아야지 왜 그렇게 바보처럼 사냐? 하며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버지 품을 떠나게 합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아버지를 떠나면 우리는 반드시 실패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우리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떠나보면 성공할 것 같은 헛된 꿈은 깨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떠나는 그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아직도 세상을 바라보는 것일까요?
1)아직도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간섭이 간섭이 아니고 사랑입니다.
2)세상에 야망을 두고 세상을 그리워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소망이면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도 이 둘째탕자와 같은 존재입니다. 이 세상이 여러분의 최대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가면 모든 것이 될 줄 알았습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세상은 화려하고 달콤하지만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사망의 음침함이 있을 뿐입니다. 낙심과 불안과 공포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성공을 붙잡으려고 하지 마시고, 주님을 붙잡으려고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주님에게 붙잡히려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성공은 저절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3:12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했던 것입니다.


2. 탕자는 아버지 사랑도, 자신의 연약함도 제대로 몰랐습니다.


탕자는 왜 부자 아버지를 떠났을까? 더군다나 그가 가진 재산 다 탕진한 후 왜 흉년이 들어 거지가 되고 초란한 신세가 되었을까요?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좀 답답하고 고리타분하고 무서운 분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떤 분입니까? 사랑이 넘치고 자비가 넘치는 분이잖습니까? 아버지를 몰랐습니다. 아버지를 제대로 알았다면 나가라 했어도 나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능력도 몰랐습니다. 자신의 능력이 대단한줄 알았습니다. 자신은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뛰쳐나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그러니 쫄딱 망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한계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면 비참한 신세가 됩니다. 그런 둘째아들에게 돌아온 것은 뭡니까? 두 가지 입니다. 영적 궁핍과 육체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장안의 성도여러분!
영적인 무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면 미련한 짓을 하게 됩니다. 그분의 사랑을 사랑으로 받지 못하면 간섭으로 여겨 귀찮아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울타리를 떠나면 해방될 것 같고 뭔가 형통할 것 같으나 결과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떠나면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아버지 집인 교회 안에 있으면 평안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품안에 있으면 안전합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축복의 근원입니다. 기적의 근원입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울타리를 떠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려면 아버지를 새롭게 바라보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 사랑을 가슴속에서 느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을 느끼시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얼마나 연약하지를 모르면 교만하여집니다. 내가 누군지를 모르면 은혜가 안 보입니다. 그러면 뛰쳐나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아버지를 바로 안단 말입니까? 아버지는 그냥 알아지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당신을 계시해놓으신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늘 교재를 해야 알게 됩니다. 나는 여러분이 성경을 더 열심히 읽고, 보고, 배우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예배와 기도에 더욱 힘쓰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아버지를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하게 됩니다. 영적 교제, 영적 예배,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탕자에게는 망한 것이 축복입니다. 만약 이 탕자가 잘 됐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그는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망가지는 것도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나를 겸손하게 하고 고난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합니다.


그렇다면 탕자는 어떻게 회복의 은혜를 누렸습니까? 오늘 우리도 교회 안에 발은 들여놓고 있으나 실상은 집나간 탕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할까요?
A. 그는 고통속에서 깨닫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는 가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자기 옆에 있어주지 않고 다 떠났습니다. 돈이 있을 때 그토록 가까이 하고 사랑해 주던 것 같은 사람들이 다 떠납니다. 그리고는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은혜가 임했습니다. 자기를 발견했습니다. 고통 속에서 자신을 찾았습니다.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은혜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깨닫는 것, 그것이 은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통이 찾아와도, 환난과 역경이 닥쳐도 이유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 그들은 오해를 합니다. 세상이 나를 버렸다, 인생 끝내자! 그래서 자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깨닫는 즉시 돌아서게 하십니다.


탕자를 보세요. 그는 깨닫는 즉시 집으로 돌아갑니다.
17절~2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할렐루야!


B. 깨달을 뿐 아니라 돌아오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깨닫는 것이 은혜나 깨닫고 머물러 있으면 회개가 아닙니다.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180도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전의 방탕한 아들이 아닌 순종의 아들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일단 돌아가야 합니다. 왜 나왔노? 내가 미쳤지? 이렇게 후회만해서는 안됩니다.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 가기만 하면 빛이 보입니다. 그래서 悔도 중요하나 改는 더 중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 돌아가는 것이 내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기서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이 단어는 이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회개했다는 것은 원위치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게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똑같이 배신한 가롯 유다와 베드로, 그들의 차이점은 이것입니다. 둘 다 잘못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돌아왔고 하나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지옥간 자와 천국간 자의 차이점도 이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탕자는 진심으로 회개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을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19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우리도 이 세상을 살면서 죄를 지으면서 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죄에 대한 돌아와서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연약합니다. 나는 부족합니다.”여기에 용기가 필요합니다.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 아버지는 돌아온 그 자체로 받아주십니다. 그러기에 용감하게 돌아오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버지는 돌아오기만을 기다립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요한일서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라고 하셨고”
이사야1:18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이 시간 탕자의 마음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간섭을 귀찮아하고 교회를 답답하게 여겨 뛰쳐나가고 싶지는 않았습니까?
비록 몸이 교회에 있다고 해도 마음이 세상을 향해 나가있다면 이미 탕자입니다.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는 능력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시고 집나간 탕자가 아닌 돌아온 탕자로서의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고객센터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기독정보넷공식트위터 Copyright © cjob.co.kr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