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출 4:10-17, 마 10:19-20, 롬 10:9-15)
본문
1. 미국의 사우스웨스트 주니어 대학에 안젤라 마두마세라는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그 학생이 등교해 보니 학교가 벌집을 쑤셔놓은 듯 온통 떠들썩했습니다. 당시는 한창 학원 폭동이 일어나던 때로 열등의식과 좌절감에 사로잡힌 남부의 흑인단체들이 닥치는 대로 파괴하며 학교까지 쳐들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학교에 들어온 단체는 “흑 표범”이라 불리는 가장 난폭한 단체였습니다.
그 여학생이 강의실로 들어가려고 할 때 그 중 한 사람이 그녀의 팔을 낚아채면서 “너는 왜 나를 보고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오느냐?”하며 꼬투리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그 여학생은 그 사람을 보고 웃은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그 여학생은 늘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에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그 여학생은 이런 위기 가운데서도 주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랬는데 마음속에 성령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무지막지한 이 사람에게 전도하라”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학생은 그 사람을 쳐다보면서 “내가 당신을 보고 웃지 않았지만 내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평안과 기쁨이 있기 때문에 남들이 나를 보고 항상 웃는 모습이라고 하더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흑인이 “어째서 다른 사람보다 더 큰 기쁨과 평안을 갖게 되었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여학생은 “2천년 전에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간의 모든 죄악과 불의와 절망과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느닷없이 “그러면 나도 예수를 믿으면 그런 기쁨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여학생은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당신이 오늘 저녁 집으로 돌아가거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당신의 죄를 자백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구원을 얻고 나와 같은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흑인은 집으로 돌아갈 것도 없이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너무 급작스럽고 놀라운 일이 순간적으로, 그것도 그토록 살벌한 분위기 가운데서 이루어졌습니다.
즉각적으로 마음에 변화를 체험하게 된 그 흑인은 그 즉시 동료 흑인들을 모아 학교에서 물러가게 하고 하루 만에 그 단체의 간부 3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참 기쁨과 평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구약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애굽에 있는 그 백성을 구원해 내라는 사명을 주시는 장면입니다. 모세가 40대의 혈기 방장하던 젊은 나이에 애국심에 불타서 일을 저질렀던 것이 화근이 되어 애굽 왕궁에서 도망쳐 나와서 광야에서 목자 생활을 한 것이 어언 4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그의 나이 80이 되었습니다. 이미 과거의 그 영광은 잊어버린 오래였습니다.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자녀까지 낳았습니다. 그런대로 생활에 안정을 찾았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과거의 영광은 잃어버렸지만 그는 영광의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영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유감스럽게 된 것은 애굽에 있는 자기 동족을 구원해 내야 되겠다는 그 불같았던 마음까지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한껏 고조되어 오늘 본문에서처럼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이런 경지에 까지 이르렀으나 사명을 망각했습니다. 이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모습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다 어느 정도 삶의 기반을 닦아놓았습니다. 사회적인 위치도 상당히 확보되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내로라”고 직분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기도생활하면서 영적 충실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모범시민이요, 모범 교인이요, 모범 직분자입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80여년의 우리 교회 역사에는 자랑꺼리가 많습니다. 우리는 지난 4년 동안 비록 힘들기는 했지만 이만한 성전을 완공하여 입당하고 이제 헌당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그렇지만 남들도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 이 놀라운 현장을 보고 모두 찬탄을 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껏 자부심에 부풀어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것을 누리려 하고, 또 뭔가를 주장하려고 하는 자만심에 빠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모세처럼 “이제 이만하며 되었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우리의 위기가 싹트고 있습니다. 사탄은 결코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현실에 처한 모세를 하나님이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점에 와있는 우리를 찾아오시는 줄 믿습니다.
2.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으로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내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과거 모세는 애굽 왕궁에서 온갖 학문과 무예를 익혔습니다. 10계라고 하는 소설에 보면 모세는 못난 왕자를 재치고 애굽 왕의 후계자로 물망에 오르고 있습니다. 온 백성들의 선망과 기대를 한 몸에 모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동족에 대한 사명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광야로 보내셨습니다. 거기서 애굽 왕궁에서는 채울 수 없는 영성을 채워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광야생활에 익숙하게 될 즈음, 이제 다시 모세를 만나셔서 애굽으로 돌려보내십니다. 사명자로 세워주십니다. 이런 일련의 모세 훈련의 목적은 그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서부교회 80년의 역사는 아름다운 자취입니다. 우리가 늘 존경하여 마지않는 우리 교회의 전임 교역자들을 통하여 우리는 훌륭한 신앙의 바탕을 쌓아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 시대에 이 성전 건축을 허락하셔서 이 놀라운 일을 이루어주셨습니다. 물론 지난 4년 동안 건축 과정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것은 모세를 광야로 보내셔서 훈련하신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새로운 믿음과 함께 우리를 여기 새 성전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모세를 애굽 궁중에서 40년 동안 학문과 무예로, 광야 40년 동안 영성으로 훈련시키신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애굽으로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인도해 내라”는 이 사명을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사명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지난 80년간의 우리 교회의 아름다운 역사, 전임교역자들의 씨 뿌리고 눈물과 땀 흘려 가꾼 수고, 지난 4년 동안 건축과 함께 우리를 영적으로 더 깊이 연단해 주신 배려, 그리고 이제 새 성전을 주신 뜻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시면서 요나를 보내셨듯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요나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요나는 선지자였으면서도 하나님의 속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즉각 반발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거부했습니다.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으나 그는 다시스 행 배를 탔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을 살펴보십시다. 지금 나는 유감스럽게도 다시스 행 배를 타고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나와 우리 모두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배를 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실 이 당시 요나의 마음속에는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청개구리처럼 하나님의 뜻과 정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요나의 이야기가 단지 요나의 이야기일 뿐입니까? 요나의 이야기는 “요” “나”의 이야기가 아닙니까?(repeat)
그래서 성경에는 “주의 뜻을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내 마음”이 아닙니다. “내 뜻”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뜻입니다. 오직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요나는 계속 자기 뜻을 고집하다가 결국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명을 망각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여 보여 주시는 타산지석입니다.
3. 모세에게는 핑계꺼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입이 둔한 사람이었습니다. 말할 줄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더군다나 자기 목숨을 찾는 애굽의 왕과 고관들 앞에 선다는 것도 두려운 일이거든 하물며 그들이 노예로 삼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요구하는 일이겠습니까? 당시 현실로는 차라리 계란으로 바위를 깨라는 명령을 받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여길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요, 동족을 구원해 내라는 말씀이었지만 계속 거부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기 까지 모세는 줄기차게 거절했습니다.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라고 합당한 핑계를 내세웠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 입을 지은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내가 너와 함께 하리니)너는 하나님 같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신약 복음서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잘 알다시피 당시 제자들이 사회적으로 지식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소위 “암 하 아레츠”라고 해서 우리말로 하면 농투성이였습니다.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사람이 어디 있을법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물며 당시는 “나사렛 이단”이라고 해서 마구 잡아가서 고문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어디 가서 호소할 길도 없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놓고 주님은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 자신도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심지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보장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함께 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때에 말씀 하시는 이는 너희 속에 계시는 성령이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감람산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리고 그로부터 이어지는 사도행전 28장의 내용은 성령께서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합니다. 그 성령께서는 오늘 여기에서 우리 교회를 통하여 “사도행전 29장”을 계속 엮어나가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은 모세에게나 제자들에게나 우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가서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성도 여러분은 다른 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마십시오. 새 성전에 와서 우선적으로 주님의 이 긴급 명령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전도 대상자 선정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의 이름을 확정하여 하나님께 고하시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십시오. 나는 이 일을 위하여 여러분이 새벽기도회에 더 많이 참석하라고 권합니다. 왜냐하면 기도 없이 이런 일은 결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새 성전에 와서 일어날 수 있는 숱한 불평들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면서 주의 명령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요나의 일을 우리가 유의하여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날도 그랬지만 결코 교회가 풍랑을 만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바람에 돛을 달고 저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주님은 “내가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의 마지막 부분을 잘 들으십시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으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소위 “땅 밟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약속의 땅을 실제로 밟는 것을 말합니다. 바라기는 복음을 들고 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러분들의 발걸음이 온 안동시가지를 두루 밟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김오동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