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벧전 1:23~2:3)
본문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제일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다면 그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는 일입니다.
성경 마가복음 8장에 보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소유한다고 하더라도 가장 귀중한 생명을 잃으면 아무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생명이 내안에 들어오는 것이 가장 귀중한 축복이요 기적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은 귀한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아이들이 새로 태어날 때 얼마나 큰 기쁨이 있습니까? 그 아이가 태어나서 돌이 되면 가족들이 모여서 축하를 합니다. 그 아이가 성장하면 할수록 부모들의 기쁨은 커져갑니다. 이 땅에 태어나는 생명의 출현이 신비요. 그 생명체가 자라나는 것 또한 신비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태어나서 자라는 것은 참 놀랍습니다.
저는 늘 그것이 의문이 됩니다. 아이들 보면 먹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저 엄마 젖, 아니면 분유 이런 것을 먹는데 제가 보기에는 배설하는 것이 훨씬 많은데 그래도 아이가 살이 붙고 키가 크는 것을 보면 놀랍습니다. 여기에 성장의 신비가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 믿고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영적 생명 안에 속사람이 자라나야 합니다. 자라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성장해 갈 때 부모의 기쁨이 크듯이 믿는 자들이 믿음 안에서 성장해 갈 때 하나님의 기쁨이 큰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계란에서 병아리가 부화되는 과정을 보면 생명의 신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냥 계란을 보면 수정란인지 무정란인지 잘 모릅니다. 수정란을 어미 닭이 3주 동안 품고 있으면 거기서 부화가 되고 아주 예쁜 병아리가 탄생이 됩니다. 그 병아리가 몇 달 지나면 어미닭이 되어서 알을 낳는 것을 보게 됩니다. 거기에 놀라운 생명의 신비와 성장의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도 자라나야 됩니다. 자라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요?
첫째, 우리는 태어나야 됩니다.
기본적인 이야기지만 태어나지 않으면 자랄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 안에 생명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크는 것을 보면 1~2년 후에 키가 훌쩍 훌쩍 큽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시신을 묻어 두었다가 1년 뒤에 꺼내 보십시오. 키가 자랍니까? 죽은 시신이 키가 컸다는 그런 이야기는 못 들어 봤습니다. 시체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이란 변하는 것이요, 생명이란 움직이는 것이요, 생명이란 자라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계속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안에 생명이 있으면 우린 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라지 않는다면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아니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서도 그런 것을 비교 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불신자로 살면서 미신을 섬기던 분이었는데 예수 믿고, 교회 나오면서, 불과 3-4년 지났는데 믿음이 아름답게 성장해 갑니다. 세례를 받고, 교회 집사가 되고, 구역예배를 나오고, 봉사를 하고, 헌금생활을 하고, 전도를 하고, 아름답게 믿음 생활을 합니다. 그 사람 안에 예수의 생명이 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을 보면 참 안타까운 분들도 있습니다. 저분은 권사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세례도 받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가끔 나오는데 얼굴은 익숙했는데 세례도 받지 않아서 믿음의 성장이 없습니다. 참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우리 안에 생명이 있을 때 생명은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자라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번 자신을 돌아 봐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니까 “영접 하는 자 곳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와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옆에 분들에게 질문해 봅시다. “예수님의 생명이 있습니까?” 우리 안에 정말 예수님의 생명이 있는가? 내가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예수의 생명이 내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자라지 않고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한번 되물어 보셔야 됩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습니다. 아이가 저녁에 어디를 놀러간다고 나갔는데 밤중에 누가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 같습니다. 아! 아이가 들어 왔겠다 생각했는데 아이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작은 아이가 화장실 간다고 잠깐 문을 열었을 뿐입니다. 착각입니다. 아이는 들어오지 않았는데 들어온 것으로 믿고 밤을 지낼 수가 있습니다. 정말 내안에 예수의 생명이 없는데 예수의 생명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세월만 낭비 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진지하게 점검해보고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내안에 예수의 생명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시고 그분을 내 마음에 왕좌의 주인으로 모셔 드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
둘째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성장의 장애요소를 제거해야합니다.
우리를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발목을 잡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씨 뿌리는 비유가 나오는데 네 가지의 밭이 있습니다. 자갈밭이 있고, 가시덤불 밭이 있고, 옥토 밭이 있고, 길가가 있습니다. 말씀의 씨가 뿌려 졌을 때는 자갈밭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니까 곳 말라 죽어버립니다. 가시덤불밭은 햇빛과 영양소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죽어버립니다. 길가 밭은 새가 와서 물어가 버립니다. 그러나 옥토에 뿌려진 씨는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좋은 마음의 밭이 생명이 잘 자라기에 전제 조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자신의 심령 속에 악한 것들이 있을 때 그것을 제거해야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베드로 전서 2장 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의심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우리가 이런 것들을 버려야 됩니다. 악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웃에 대한 분노의 마음, 원한의 마음, 복수심 이것이 악독입니다. 우리가 형제에 대한 악독의 마음, 분노의 마음을 가지고서는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형제와 아직 화해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예배드리기 전에 먼저 화해하고 나서 예물을 드리라고 합니다. 형제와 화해하지 못하는 것이 마음의 걸림돌이 됩니다.
언젠가 제가 본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왕을 시해하려고 치명적인 독을 구하러 한 사람이 가는데 이는 전갈에서 구한 독입니다. 그것을 조금 사람의 귀에 뿜으면 사람이 즉사하게 됩니다. 이것을 사는 사람이 물었습니다. “이것보다 더 독한 독은 없나요?” 파는 자가 말합니다. “이것보다 더 독한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악한 독이 있습니다. 내 마음에 있는 악독을 뽑아버려야 합니다. 궤휼은 무엇입니까? 거짓 사기입니다. 우리가 거짓된 것을 버려야 합니다. 진실하지 못하면 우리의 인격과 믿음은 성장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또 외식을 버리라고 합니다. 외식은 무엇입니까? 위선입니다. 자신의 속 모습은 숨기고 겉으로 그럴듯하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런 거짓과 위선을 벋어버려야 합니다.
그 다음은 시기입니다. 시기는 남이 잘되면 못 견디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공동체에 이 시기의 마음은 합당치 않습니다. 누가 잘 되면 더 잘되도록 밀어주는 것이 공동체이지 잘 되는 것을 깎아 내리는 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합니다. 이는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한 신앙의 정도에서 우리가 경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바다에 가서 게를 잡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가서 보니까 게를 잡아서 바구니에 담는데 바구니뚜껑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보시오. 게가 기어 나와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합니까?” 게를 잡는 사람이 걱정 말라고 합니다. 게는 성격이 이상해서 한 마리가 나가려고 기어 올라가면 다른 게가 못나가게 다리를 물고 늘어집니다. 남 잘되는 것을 죽어도 못 보는 것이 게의 특성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잘 되는 사람을 밀어주고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그럽니다. “목사님 우리는 밀어줘요?” “어떻게 밀어줍니까?” “우리는 절벽에서 밀어줍니다.” 끝장을 낸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모습입니다. 우리가 옛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아주 초보적인 신앙의 단계에서는 이런 구습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이 성숙하면서는 이런 것을 극복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시기하고 질투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축복하고 격려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은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합니다. 비방은 남 뒤에서 헐뜯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 뒤에서 험담하고 끌어 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구습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딸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는 새 사람을 입으라.” 라고 했습니다. 옛날의 그 구습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악독과 괴율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의 모습입니다. 이런 것을 다 버려야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 할 수 있습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님은 일제시대 때 존경받는 스승이요. 독립 운동가였습니다. 그분이 결혼식에 초대를 받아 주례를 할 때가 있었습니다. 보통 주례를 할 때는 좋은 옷을 입고합니다. 왜냐하면 새신랑과 새신부가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출발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번은 그분이 주례를 하는데 도포를 입었습니다. 그 도포는 다 떨어지고 남로하고 때도 있는 그런 도포였고 그런 옷을 입고 주례를 하신 것입니다.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이분이 에베소서 4장 22절 말씀 “옛 사람을 벋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어라”를 읽어주시고 하는 말씀이 “여러분 저처럼 헌 옷을 벋어버리고 새 옷을 입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신랑신부는 결혼의 축복 속에 들어가면서 과거는 벗어버리고 새로운 축복으로 들어가라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이 됐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런데 우리가 과거에 얽매여 과거에 자태를 가지고 있으면 내가 거듭났는지 다시 한 번 물어보고 돌아봐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13장 11절에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이제는 그 자신이 어린아이와 같이 유치한 신앙의 수준에 있었지만 이제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서 그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일이 무엇입니까?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 보낸 고린도 전 후서에 보면 무엇 때문에 사도바울이 마음 아파합니까? 고린도교회는 다툼과 시기와 분당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시기하고 패를 가릅니다. 교회안에 제일 나쁜 악습은 편을 가르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심리는 자꾸 세력을 만드는 것입니다. 힘을 만들어 행사를 하려고 합니다. 교회는 편을 만들면 안 됩니다. 그때부터 마귀가 틈을 탑니다. 이것이 사단이 제일 좋아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왜 목사님은 편을 안 만드세요?” 목사가 무슨 편이 있습니까? 목사는 하나님 편입니다. 친한 사람 몇 있다고 목회에 무슨 도움이 됩니까? 여러분 교회는 편을 만들면 안 됩니다. 세력을 만들고 편당을 만들면 마귀가 그때부터 틈탑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편을 만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목회하는 것이지 편을 만드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에도 그런 악습이 나올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유치한 모습이 바로 편당과 분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 파니, 예수 파니, 게바 파니 그렇게 싸웠습니다. 우리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고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은 과거의 구습을 벋어 버려야 합니다. 이는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어떤 여자 분이 좋은 신랑감을 만나서 결혼을 했는데 1년도 못살고 남편이 죽었습니다.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 그냥 떠나보낼 수가 없어서, 사랑스러운 남편을 땅속에 묻을 수가 없어서 죽은 남편을 유리관에 넣어서 남편의 서재에 모셔놓았습니다. 그리고 여자 분이 출근할 때 남편에게 “나 출근할게. 집 잘 지키고 있어.” 시체가 어떻게 지키겠습니까? 직장 다녀와서는 “나 잘 다녀 왔어”인사를 했습니다. 한번은 유럽여행을 갔는데 이 여자가 좋은 남자를 만나서 미래를 약속하고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서재에 죽은 남편을 보여주고 집을 잘 지키고 있다고 했습니다. 새로 결혼할 남자가 깜짝 놀라며 시체인 옛 남편과 나 둘 중에 한명을 택하라고 말했습니다. 시체와 여기 살던지 시체를 뭍고 나와 살던지. 여러분 시체와 같이 살 수 있습니까?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시체와 살수 없습니다. 살았을 때 사랑스럽지 죽었을 때 뭐가 사랑스럽겠습니까? 죽은 시체와 이불속에 잘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죽은 사람을 안고 1년, 2년, 3년을 살고 있습니다. 옛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말입니다. 여러분 옛사람의 구습을 다 벗어버리고 새로운 사람의 옷을 입으시기 주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 2장 2절을 보겠습니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함이라.” 순전하다는 것은 순수하다는 것입니다. 신령하다는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사모하십시오. 우리가 하루 세끼 먹어야지 우리 체력을 유지하듯이 신령하고 영적인 하나님의 양식을 먹을 때 신앙이 자라고 성숙하고 우리의 속사람이 자라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의 젖을 열심히 빨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 열심을 가지고 사모해야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그런 열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고 받아먹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린아이가 얼마나 강한 힘으로 젖을 빠는지 검증을 해보았습니다. 장정 한명과 어린아이에게 젖병을 주어서 누가 빨리 빨아 먹는가 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어린아이가 훨씬 빨리 빨아먹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는 생명을 걸고 빨기 때문입니다. 못 먹으면 죽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런 열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고 받아먹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신앙이 성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의 말씀입니다. 베드로 전서 2장 2절에 보면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함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 때 우리가 신앙으로 성장하고 완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영혼이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영과 육이 완전히 구원을 받을 때까지 예수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계속 자라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을 자라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풍랑이 일 때에 말씀으로 풍랑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말씀으로 “나사로야 일어나라 나오느라” 하셨습니다. 말씀에 능력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무디(Dwight Moody)라는 유명한 부흥강사가 있습니다. 무디가 처음 예수 믿고 너무 좋았습니다. 무디가 은혜를 지속하기 위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산속에 올라가서 일주일동안 집중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산에서 내려와 예전의 생활로 돌아오니까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다시 유명한 목사님의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열심히 부흥집회에 참석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돌아와서 한두 해 지나니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좌절에 빠질 즈음에 어느 날 성경을 보다가 로마서 10장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무디가 여기에 진리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열심히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그때부터 믿음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훌륭한 부흥 강사가 되어 수많은 영혼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는 영의 양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월이 하지 마십시오. 말씀이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 개신교는 특별히 예배 속에 말씀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진정한 영적인 말씀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거듭나게 합니다. 베드로 전서 1장 23절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우리가 거듭난 것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습니다. 거듭났다는 말은 우리 안에 새 생명이 잉태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입니다. 과거의 생각과 가치관이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세상이 좋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교회가 좋고 하나님의 말씀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불신 속에 살아가던 사람이라도 교회 나와서 말씀 속에 살다보면 거듭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일본에 한 여자 기숙사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잠자던 여학생을 깨워서 가진 소지품 중에 값이 나가는 것이나 가치 있는 것을 다 내놓으라고 말했습니다. 자다가 일어나 두려워하던 여학생들은 돈지갑이고 패물이고 다 내 주었습니다. 강도가 문을 나가려고 하는데 한 여학생이 “아저씨. 중요한 이것도 가져가세요.” 낡은 책 하나를 건 내 주는데 그것을 받아서 왔습니다. 강도가 숨어살면서 그 책이 무언가 한 장 한 장 읽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었지만 읽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이 뜨거워지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은 성경책이었습니다. 그 강도가 이후에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고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한 여인이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설교 후에 그 중년 여인을 불러내어 받은 은혜에 대한 간증을 시켰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에 제가 한 기숙사에 학생이었는데 그때 칼 들고 들어온 강도가 바로 목사님이셨습니다. 제가 그때 성경책을 드린 장본인입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강도가 받은 한 성경책이 그의 인생을 거듭나게 하고 그의 인생을 바꾸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은 좁기도 하고 넓기도 합니다. 사람은 서로 미워하며 시기하면 안 됩니다. 제가 공릉교회에 15년 전에 부목사로 있을 때 당시 김정현 목사님이 살아 계셨을 때 그분은 사람들을 참 잘 대접을 하십니다. 한번은 대만에서 손님들이 오셨는데 그분들이 거처 할 때가 없어서 교회 빈방을 내주고 음식도 대접해 주셨습니다. 그분들이 잘 지내다가 대만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후에 목사님이 회의가 있어 대만을 갔습니다. 그런데 가이드를 만나지 못하고 목적지를 가야하는데 말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큰일이 난것 입니다.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타고 말도 못하고 계시다가 택시기사가 운전을 하는데 열쇠고리에서 소리가 나서 봤는데 공릉교회 열쇠고리였습니다. 택시기사가 바로 공릉교회에 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분이 하루 종일 목사님을 모시고 대만 구경을 다 시켜 드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은 어디에서 다시 만날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에게든지 전하면 언젠가는 그 말씀이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울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미국에 한 교회학교 교사가 주일날 교회에 아이들을 가르치러 가는데 길거리에서 네 명의 아이들이 놀고 있는데 장난꾸러기였습니다. 이 어린 영혼들을 그냥 두고 갈수 없어서 그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학교에 갔습니다. 그 아이들을 데리고 한 반을 만들어서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양육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아이들이 커서 그 마을을 떠나고 대학을 가고 외부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교사는 1932년 나이가 들어 교사직에서 은퇴하고 마침 그해 생일파티를 하는데 사회자가 네 명의 축하편지를 낭송했습니다. 첫 번째 편지는 중국선교사로부터 온 편지입니다. 두 번째 편지는 미국 연방은행 총재로부터 온 편지입니다. 세 번째로 온 편지는 당시 미국 대통령 비서실장으로부터 온 편지입니다. 네 번째 편지는 당시 미국 대통령 후버 대통령으로부터 온 편지입니다. 길거리에서 만난 그 네 명의 아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을 때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성경의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평범한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니까 그들의 인생이 바뀌어 진 것입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안한 인생들에게도 담대함과 용기을 줍니다. 낙심한 인생에게 소망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느 교회 집사님 연세가 70이 되셨는데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더니 담석증이었습니다. 수술을 하려니 연세가 많으시고 위험할 것 같아 주위에서 걱정을 하였습니다. 본인도 염려가 되어 불안해서 잠도 안 오고 음식을 먹어도 소화도 안 되고 다 죽게 생겼습니다. 목사님이 심방을 가서 위로를 해주니까 그분이 마음에 찔려 “제가 죄지은 게 너무 많아요.” 자신의 과거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목사님이 “걱정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그 죄들 과거에 다 용서하셨어요.” 라고 말씀하시며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리고 그 말씀을 크게 써서 붙여놓고 하루에 열 번 스무 번을 읽고 암송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후에 권사님이 말씀을 읽으면서 잠을 잘 자게 되고, 음식을 잘 먹고, 수술을 잘 받고,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늘 능력의 말씀이고 소망의 말씀입니다. 세상의 신문 읽고 소망을 얻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설책 읽고 낙심했던 사람이 다시 일어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든지 절망에 처한 사람 낙심에 처한 사람 용기를 잃은 사람 불안해하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효기간이 없습니다. 신문은 시간이 지나면 별로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베드로 전서 1장 24절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주의 말씀은 영원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래서 위대합니다.
프랑스의 위대한 무신론자 볼테르가 있었습니다. 그는 철학자입니다. 그는 강연 때마다 교회를 비판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판하며 성경을 비판했습니다. 성경은 사기꾼이 쓴 것이며 10년 후면 성경책은 없어 질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던 볼테르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의사가 진단을 하고 “당신은 이제 소망이 없습니다.” 볼테르는 “내가 6개월만 더 살 수 있으면 내 제산의 절반을 다 주겠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당신은 6개월은 커녕 6주도 더 못살겠소.” 라고 말했습니다. 볼테르는 죽었습니다. 그는 죽으며 불안 속에 “나는 지옥에 가노라” 는 말을 남겼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죽고 난후에 그의 집터가 팔리고 프랑스 성서공회가 들어섰습니다. 성경을 비판하던 볼테르는 죽었지만 그가 비판하던 성경은 진리의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옥토의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그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데살로리가 전서 2장에 보면 “너희가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받을 때 인간 개인 목사가 말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목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다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로 설교를 들을 때 그것이 내게 능력이요 생명의 말씀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영혼이 소생하게 됩니다. 시편 19편에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하고”라고 했습니다.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합니다. 어두운 영안의 눈을 밝게 만듭니다. 마음의 기쁨을 줍니다. 우리인생길에 안내자가 됩니다. 그래서 주의 말씀은 내발의 등이요 빛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년에 꼭 성경을 일독해야합니다. 하루에 3장반을 읽으면 우리는 일독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비결입니다. 더구나 그 말씀을 읽고 듣고 실천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극동방송에 편지 하나가 왔습니다. 중국에서 온 편지인데 동경을 거쳐서 왔습니다. 그당시 문화혁명이 일어나서 성경을 읽고 소지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극동방송에서 매일 성경을 불러주었습니다. 그러면 중국에 있는 동포들이 성경을 필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 편지 내용은 극동방송에서 매일 밤마다 불러주는 성경을 다 적어서 창세기부터 계시록22장까지 다 적었지만, 그런데 딱 한 장 잘 못 적은 장이 있는데 사무엘상 15장만 못 적었습니다. 그때 전파가 안 좋아서 들리지 않아서 제대로 못 적었습니다. 그 한 장을 채우기 위해 다시 한 번 그 장을 불러달라고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그 편지에 너무 감격한 아나운서가 사무엘상 15장을 다시 읽어주었습니다. 다시 얼마 후에 편지가 왔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도 이제 성경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중국선교에 큰 기쁨과 감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왜 귀합니까? 생명을 살리는 말씀, 우리 영혼을 살찌게 하는 말씀, 우리 영혼을 형통하게 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기 운 나무처럼 사철 푸르고 늘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늘 사모하시므로 은혜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이영무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