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눅15:11-24)
본문
누가복음 15장 11-24절
2006년 11월 26일 주일낮예배 최일환 목사설교
설교:
아무리 자식이 부모 마음을 헤아리려 해도 그 나이 되어 보지 않으면 절대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부모 마음입니다. 어머님의 마음도 깊고 크지만 아버지 마음 또한 표현되지는 않으나 그 깊이와 넓이는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아버지라 불리기를 좋아하신 것 같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고 큰지를 성경은 우리에게 수없이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십자가는 그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했으면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겠습니까? 그 위대한 사랑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랑이 실감있게 표현된 부분이 오늘 봉독한 말씀입니다. 오늘 봉독한 하나님 말씀은 소위‘탕자의 비유’라고 말들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세 가지를 보여줍니다.
첫째는 집 나간 아들, 둘째는 집에 있는 아들, 셋째는 그들의 아버지입니다. 저는 제일 먼저 이 시간에는 그 아버지를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을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아시는 내용이겠으나 처음 듣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을 드립니다. 한 아버지에게 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 말에 순종하는 아들이었고,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반항하는 못된 아들이었습니다. 이 못된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도 자신 몫의 재산을 미리 상속해 달라고 떼를 씁니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다 팔아 집을 떠납니다. 그런데 얼마 못가서 전 재산을 다 탕진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가시고기’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아버지의 10살 된 어린 아들이 백혈병에 걸립니다. 아버지는 엄청난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자신의 장기를 팔기로 결정합니다. 그래서 장기를 팔기 위해서 병원에 갔지만 자신도 간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장기를 팔 수 없게 되자 아버지는 눈(각막)을 팝니다. 아버지의 눈을 읽게 되는 희생으로 아들이 살아난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치료된 아들을 생모가 나타나 데려가고 아버지는 암으로 쓸쓸하게 죽어갑니다. 여러분은 앉아서 소설한편을 다 보았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왜 소설제목을 가시고기라 했을까요?
가시고기는 암컷이 알을 낳고 떠납니다. 그러나 수컷은 다른 어류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알을 필사적으로 지킵니다. 부화되고 어느 정도 자라는 15일 동안 수컷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알을 지킵니다. 주둥이가 다 헐고 아름답던 몸 색깔도 잃어버린 채 결국 마지막 새끼가 다 자라 떠나보내면 둥지의 문 앞에서 죽습니다. 그 뿐 아니라 죽은 자신의 몸을 그들의 먹이로 삼게 하는 아주 독특한 고기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부성애이잖습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 위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의 사랑, 바로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랑의 아버지였습니다.
탕자 아들을 멀리 떠나보낸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였을까요?
1.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였습니다.
1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둘째 아들은 자신의 재산을 달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버지가 죽기 전에는 재산을 분배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죽어야 재산을 분배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법입니다. 그러기에 둘째 아들의 행동은 자식으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아주 무뢰한 행동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죽은 자로 여기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재산을 분배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전통을 살펴보면 장남에게 두몫을 주었고, 차남에게는 1/3를 주었습니다.
13절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아버지가 재산을 주자마자 둘째 아들은 며칠이 못되어 다 팔아 떠나버렸습니다. 둘째 아들은 세상 욕심과 허영에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붙들어 놓는다고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재산을 주지 않아도 떠날 것을 알고 있었고, 재산을 주어도 떠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못가서 재산을 다 탕진할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에게 돌아갈 재산을 다 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주어야 합니까? 안주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한다면 안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의 아버지는 주저 없이 줍니다. 주는 이유가 ‘혹시 누가 아냐! 성공해서 돌아올지!’그래서 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재산을 좀 잃더라도 나가서 고생을 해서라도,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제대로 깨닫고 돌아오기만 한다면 뭐를 아끼랴 하는 마음으로 준 것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그 무엇보다도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재산보다 아들이 더 중요했습니다. 자신보다도 아들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 어떤 희생이라도 치르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그 사랑이 십자가에 나타나 있습니다. 나 한사람이 주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수많은 세월동안 기다려 오셨습니다.
나 한사람을 하나님 사람 만들기 위해 수많은 종들을 보내셨고 그들의 헌신을 통해 복음을 받게 했습니다.
여러분에게까지 복음이 들어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분들이 수고를 했을까요? 그것이 그분의 사랑입니다.
2. 끝까지 기다리는 아버지였습니다.
2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직도 상거가 먼데” 상거(相距)라는 말은 서로간의 거리가 멀다는 뜻입니다. 서로간의 거리가 멀어도 아버지는 자식을 알아봅니다. 이것은 바로 부모입니다.
성경에 없는 이야기이지만 추측해 보건데 이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떠난 뒤부터 습관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것은 마을입구 언덕에서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제나 올까, 이제나 올까하는 마음으로 서 있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잠을 이루면서도 눈과 귀는 아들이 떠난 길로 향해 있었습니다. 그 고통의 심정은 아무도 모릅니다. 아버지만이 아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집을 떠난 아들은 객지에서 전 재산을 탕진한 다음에 고생고생하며 살았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제대로 없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의 사랑의 받고, 보살핌을 받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탕자가 고작한 일은 돼지를 치는 일이었습니다. 배가 고프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는 것이었습니다. 쥐엄 열매는 아카시아 나무의 열매입니다. 중동 지역에 자생하는 카롭나무라고 불리우는 아카시아과의 나무에 달리는 열매로서 주로 짐승의 사료로 쓰이는 것인데 간혹 가난한 사람들이 이 열매를 따다가 먹기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설움 중에 배고픈 설움이 가장 섧다고 합니다. 쥐엄 열매는 돼지나 짐승들이 먹는 사료입니다. 부잣집 아들이 거지가 되어서 돼지가 먹는 것을 먹으려 하였다는 것은 완전한 타락을 말합니다. 탕자는 세상의 인심이 이와 같이 각박한 것도 처음 알았을 것이며, 먹고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도 처음 알았을 것입니다.
그 아들은 그제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웠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고생을 하고 굶주려 보니 아버지의 품이 좋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결단합니다. “여기서 굶어 죽느니 아버지의 종으로 살겠다.”
탕자는 아버지 앞에 설 면목이 없었습니다. 이제 자식으로 살 용기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받아주시기만 하면 됐습니다.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 먹고 입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갔습니다.
그날도 그 언덕에 서 있었던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남들은 알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체면을 벗어 던져 버리고 아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옛날 우리 양반들과 비슷하게 30세가 넘으면 뛰지 않는다고 합니다. 뛰는 행동은 권위가 떨어지는 행동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을 보자말자 달려가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입니다. 기다리는 마음, 돌아올 것을 알고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그 마음이 여러분에게 느껴지기를 축원합니다.
317장 찬송가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요. 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 / 할렐루야
3. 용서하는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부둥켜 앉고 웁니다. 그때 아들이 아버지께 용서를 빕니다.
21절: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무슨 말입니까?“저는 아들의 자격이 없습니다. 다만 품군의 하나로 써 주십시오.”
참 이상한 것은 아버지는 그 아들을 야단 한번 치지 않습니다.
“이 미련한 놈아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 나가더니 이게 무슨 꼴이냐? 꼴좋다. 이 등신 같은 놈, 나가서 뒤져라 이놈!”
우리의 보통 아버지는 아마도 재산이 아까워서 이렇게 야단이라도 한번 칩니다.
그러나 성경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고 손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 이것은 아들을 조건없이 용서하고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22~23절을 보세요.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버지는 이미 그 아들이 집으로 돌아서는 그 순간 아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러기에 돌아온 그것이 회개이기에 야단도 치지 않고 무조건 그를 아들로 복권을 시킵니다. 옷을 입힌 것은 가장 귀한 손님에게 줄 옷을 준 것입니다. 더욱이 손에 가락지를 끼운 것은 상속자임을 의미하는 것이고 신발을 신기는 것은 신분의 변화, 즉 노예나 종이 아닌 아들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용서는 아들이 회개했기 때문에 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가 회개할 때 우리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회개했기 때문에 용서하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용서를 빌기 전에 하나님이 이미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말씀하신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이미 하나님은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들은 고난 속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자마자 자신이 엄청난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도저히 씻을 수 없는,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불효의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회개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찢으며 회개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러나 그를 향한 아버지의 용서는 그것보다 먼저였습니다.
아버지께 돌아오는 첫 걸음은 사실 회개입니다. 그러나 그 회개 이전에 아버지는 날마다 목이 빠져라 기다렸습니다. 이미 용서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원래 상태의 신분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오니까 회복되었습니다. 진심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회복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는 오늘 우리도 사랑하십니다. 끝까지 기다리며 사랑하십니다. 이미 용서하며 사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그 마음이 여러분에게 느껴지고 체험으로 다가오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혹시 여러분이 아버지를 떠나간 탕자라고 여겨지면 이 시간 교회로 돌아오신 그것으로 아버지는 여러분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깨달아지고 다시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그것이 회개입니다.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도 하늘 아버지의 사랑은 여러분에게 한없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