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열매 (마 5:43~48) > 설교자료실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설교자료실 >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고난의 열매 (마 5:43~48)

본문

고난의 열매 (마 5:43~48)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43-48.

저는 얼마 전, 250페이지 정도 되는 한국역사책을 읽었습니다. 1950년에 강의한 내용을 모아 1955년 6.25 직후에 발간한 책입니다. 고대로부터 6.25때까지 한국의 역사를 읽고 나니 우리 민족이 정말 많은 고생을 겪었음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고난의 여왕’으로 불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형적으로 일본, 중국과 러시아 등 큰 나라에 둘러싸인 작은 반도국가로서 주변 강대국 때문에 많은 고난을 겪어온 것입니다.

당나라가 침략했고 거란족이 가난한 백성들의 가진 것을 다 빼앗아갔습니다. 몽고의 말발굽에 짓밟히기도 했고 임진왜란 때는 엄청난 고생을 했습니다. 저는 임진왜란 8년 동안 그렇게 심하게 고생을 한 줄 미처 몰랐습니다. “조선은 형언 못할 궁극에, 가장 비참한 비참 속에 빠졌다. 전쟁으로 인하여 죽은 생명만 해도 수를 알 수가 없고 사람이 모두 폐허가 되었다. 기아와 질병이 겸하여 왔으므로 각고 인민이 모두 유리하게 되었다. 산하의 초근목피도 다 뜯어먹어서 없어졌는데 길가에는 박주의 이상식이 있고 주검이 들에 널려있었다. 서울서는 수구문 외에(동서남북 성문)내다 버리는 시체가 산같이 쌓여 그 시체의 높이가 성 높이보다 더 하기 수장이나 하였고 그를 처분하는데 여러 해가 지났고 사람이 죽어 넘어짐에 그 살을 서로 다투어 뜯어 먹었다.” 당시의 처참함을 생각하며 몸서리를 치게 됩니다.
우리 민족은 앞이 보이지 않는 이런 고난을 오랫동안 겪어왔습니다. 우리나라가 가장 융성한 때는 고구려 때인 것 같습니다. 저 북방까지 영토를 넓히며 한국 사람의 기상을 크게 드러내었습니다. 그 때를 제외하면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같은 민족끼리 남북으로 갈라진 국가로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그 책의 저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일본사람을 왜놈이라 부르고, 중국 사람들을 오랑캐라 하며 무시했는데 우리가 그렇게 무시한 그 사람들에게 찢기고 뺏기고 죽임을 당했다.” 우리는 남을 비웃기만 했지 우리끼리 싸우느라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동인과 서인으로, 남인과 북인으로, 소인과 대인으로 갈라지고 사분오열된 우리나라는 계속된 내분으로 외침을 감당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저자는 또한 “본래 순박했던 마음이 비박해지고 청명했던 심정은 혼탁해졌다. 본성이 착한 민족이 사랑의 기근을 느끼게 되었고 의협심이 많던 사람들이 질투가 성을 이루게 되었다. 비열해지고 교활해지고 유약해졌으니 신은 장차 이 민족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피폐해지는 것을 보고 계시는가?”라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고생하는 민족이 되었는가? 이 많은 고생의 끝이 어디인가? 앞으로도 계속 고생만 할 것인가? 이런 질문을 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도 한반도의 북쪽에는 도와주지 않으면 굶어 죽는 백성들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수치요, 고통입니다.

고난도 여러 가지입니다. 사업에 고난이 있고 가정생활에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시작은 잘 했으나 종종 부부 사이가 고통의 출발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게 되면 결혼 전에 저와 네 번 정도 만나게 됩니다. 만날 때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지요. 그들은 희망에 가득 차 있습니다. 환희의 계절이지요. 데이트하고 결혼을 약속하고 결혼식을 준비해 가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들에게 결혼 후의 이야기를 잘 해주지 않습니다만 신혼여행을 다녀온 부부들에게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해줄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희열의 시절’이나 보통 결혼 후 3개월에서 10개월 사이에 ‘실망의 계절’이 시작된다. 내가 미리 이야기 해 주는데 혹시나 1년 내로 실망을 느끼게 되면 그것이 정상적인 줄 알라. 때로는 실망이 심해져서 ‘절망의 계절’이 올 수도 있다.” 결혼 후 절망이 심해지면 이혼을 합니다. 아니면 아이들을 봐서 할 수 없이 그냥 삽니다. ‘절망의 계절’을 겪으면서 한 사람은 이혼하고 한 사람은 성장합니다. 그 때 비로소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결혼한 사람 중에 제일 행복한 사람은 80세 이상 된 부부라는 통계입니다. 여러분이 60세까지 불행했다면 20년의 희망이 남아있습니다. 모든 것을 함께 겪으면서 80세에 이르면 그 때 부부사이가 제일 좋다는 것이지요. 아직 갈등과 고난 속에 사는 분이라면 희망을 가지십시오. 80세가 되는 날이 옵니다.

그 많은 남자 가운데서, 그 많은 여자 가운데서 한 명을 선택해 결혼을 했는데 왜 실망하고 갈등과 절망의 시절을 보내게 됩니까? 우리가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성숙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단지 결혼할 나이가 되었을 뿐, 성숙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제 성숙을 향하여 출발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어느 부분이 미성숙한지를 찾아서 알려 주라고 보내준 CIA입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어디가 미성숙하고 부족한지를 찾아서 알려줌으로써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눈물 흘리고 분노를 느끼면서도 결국은 그로 말미암아 “아, 이 부분은 내가 변해야 되겠구나!” 깨닫고 점차 변화되어가는 것입니다.

왜 이와 같은 시련과 고난이 옵니까?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른 곳으로 끌고 가는 거짓선지자가 있는 것은 “to test you” 시험을 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 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유혹하고 어려움과 시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까지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정답을 찾기 위함입니다. 시험에 합격하면 진급하고 낙제하면 또 시험을 칩니다. 이 시련의 시험을 통과해서 진급할 때까지, 성숙해질 때까지 고난과 시련은 찾아올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고 계속 고집을 부리면 똑 같은 문제로 죽도록 고생한다는 말입니다. 시련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43․44절)고 했습니다. 이웃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요 원수는 나를 싫어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에는 이런 두 종류의 사람들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그런 경험을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이 교회에 와서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너무 고마워요. 그러나 원수처럼 괴롭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그런 사람이 없다면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금방 나타날 테니까요. 그런 사람이 꼭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세 부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얼굴과 눈빛만 봐도 알아요. 두 번째는 우리는 싫어하는 사람인데 그 역시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세 번째는 무관심한 사람들입니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고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당연히 걱정할 필요가 없고 무관심한 사람에 대해서는 우리도 그냥 있으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싫어하고 괴롭히는 이 ‘원수’라는 사람들입니다. 내 옆의 적들 때문에 내가 달라집니다. 이 사람들 때문에 그저 죽도록 고생이나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달라질 수 있습니까? 43절을 다시 보십시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친구를 사랑하고 적을 미워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에게 우리도 욕하고, 주먹으로 한 대 맞았다고 나도 때리면 그 관계는 점점 악화되고 인생이 참 어렵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배워야 합니다. 적과 싸우다 끝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싸우면 둘 다 죽도록 고생만합니다. 적이 나타나면 하나님의 방법으로 어려운 고난을 통해서 승리해야 됩니다.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승리로 끝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입니다.

우리 기독교 자체가 그렇지 않습니까? 십자가는 십자가로 끝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부활의 승리로 끝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과거에 우리 민족이 십자가의 고난과 같은 고생을 했어도 이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결국에는 우리 민족에게 부활의 승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날이 오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어렵게 살다가 절망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과정을 통해서 시험에 합격하고 성숙해져서 더 넓고 깊고 높은 인격을 갖추어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의 근원이 되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고난의 목적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고 다니며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들이 왜 그런 고생을 했습니까? 그 답은 “왜 거짓 선지자가 있느냐?”는 질문의 답과 똑 같습니다. “to test you” 즉 “시험을 쳐서 네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지 알기 위해서”라는 것이지요. 사랑으로 승화된다는 겁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44절). 원수를 사랑하는 것을 못 배우면 원수를 만날 때마다 서로를 저주하고 한 주먹씩 때리고 한 번씩 욕하고 한 번씩 눈 흘기고 상처를 주며 끝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끝내라고 우리 주위에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원수가 있기 때문에 원수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원수를 사랑해서 원수를 친구로 만드는 성숙하고 발전된 인간관계와 인격을 형성하라는 겁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44절).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셔서 원수를 이기게 해 주십니다. 원수가 나에게 주는 고통 때문에 내가 더 날개 치며 올라가는 독수리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 인생에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적대 관계를 극복하고 성숙한 인간, 대인관계가 좋은 인간, 관대한 인간으로 변하고 발전하는 그 과정이 바로 우리가 당하는 고난입니다.

우리가 다윗에게서 배울 점이 참 많은데 그 중에 특별한 한 가지는 자기 적을 사랑한 것입니다. 다윗은 적이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고 탄식 하며 시를 썼습니다. 그래서 적의 부하들이 전부 다윗의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나를 죽이려고 하더니 너 잘 죽었다! 속이 시원하다!”고 하는 것이 보통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통일 국가의 왕이 될 때까지 적들이 해를 입을 때마다 가슴 아파하고 그 장례식까지 따라가서 눈물을 흘릴 만큼 적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윗 왕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는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성숙해지는 기회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됩니다. 기도하면 힘이 생기고 용서할 수 있고 포용하며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물론 처음 기도할 때는 “하나님, 저 사람 때문에 속상합니다. 저 사람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오, 하나님! 우리 시어머니가 왜 저러시는지 모르겠어요.” “하나님, 우리 형 때문에 속상합니다.”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이래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미움이 있으면 미움이 계속 돌아옵니다. 심는 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축복을 심어야 축복이 돌아옵니다.

우리 성경에는 “원수를 사랑하며…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는데 영어 성경에는 “Love your enemies”(원수를 사랑하라) 다음에 “bless those who curse you”(너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 “do good to those who hate you”(너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선을 베풀라)는 말이 더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pray for those who despitefully use you, and persecute you”(너희들을 핍박하고 괴롭히고 악용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원수 때문에 기도를 하려면 처음에는 속상한 기도, 원망하는 기도가 나옵니다. 그 기도만 계속 하게 되면 결과가 없습니다. 한참 기도해도 그 원수는 이사도 가지 않고 죽지도 않고, 도대체 해결이 안 됩니다. 그때서야 깨닫습니다. “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하는데….” 좋은 사람은 좋아하고 싫은 사람은 싫어하는 인간의 방법으로 하니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 해야겠구나!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서 축복해야겠구나! 그 에게 선을 베풀고 위해서 기도해야겠구나!”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계속 미움과 저주를 주고받다가 서로 물고 뜯겨서 망하고 맙니다.

그 과정 속에서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원리를 깨달으면 이렇게 기도하게 됩니다. “주여, 제가 이 기도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하라고 하시니까 하겠습니다. 그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의 아내와 남편과 자식들과 형제들과 그의 사업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형님이 나를 고생시켰지만 그에게 하나님께서 건강 주시고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한두 번 기도하는 것으로는 그저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 달을 기도하면 이상하게도 그 형이 더 이상 밉지가 않습니다. 한 달 축복하고 한 달 선(善)을 베풀고 형 집에 사과 몇 개 좀 보내십시오. 선의 사과로 적을 쏘라는 말입니다.

이 어려운 인생의 인간관계 가운데서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 사랑하고 축복하고 선을 베풀고 기도해 주면 우리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 시작합니다. 얼굴이 달라집니다. 나의 축복을 받은 그 사람 역시 돌아서서 우리를 축복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것은 내 대인관계에서 인격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깨닫고 성공적인 방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과 생명의 성공을 체험하라는 겁니다. 이것은 기도 없이 되지 않습니다. 기도가 있으면 여러분도 많은 변화를 체험하고 고난의 마지막 승리가 우리의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자녀의 특징입니다.

“이같이 한 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45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비슷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햇빛을 주십니다. 의롭지 않은 사람과 의로운 사람에게 똑같이 비를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완전한 모습입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46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 것으로 무슨 상을 받겠다는 겁니까? “저 사람은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해요. 저 사람을 위해서 동상을 하나 세웁시다.” 그러면 모두들 웃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악한 사람들도 다 하는 것입니다.

47절에는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했습니다. 좋아하는 친구나 형제들에게는 인사를 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앞에 나타나면 슬쩍 피해갑니다. 교회에서도 가끔 그런 일이 있어요. 내 맘에 안 드는 사람과 마주치면 일부러 옆으로 피해갑니다. 예전에 어느 목사님이 자기가 싫어하는 교인들과는 안 만나려고 했어요. 그 교회 교인들이 “우리 목사님은 인사도 안하고 받지도 않고 못 본 척 하십니다.” 자기 목사님에게 이야기할 것을 나한테 합니다. 하도 여러 번 그런 말을 들어서 그 목사님을 만나서 좋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이시니까 싫어도 아닌 척 하고 인사를 받으십시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저에게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저는 정직한 사람입니다. 싫은 사람은 싫고 좋은 사람은 좋기 때문에 싫은 사람을 좋은 척 하면 위선 아닙니까! 위선적인 목사는 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러니까 저렇게 고생을 하시는구나!’ 생각했습니다. 물론 위선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수를 축복하고 원수를 위해 선을 베풀라”고 하셨으니 내 마음은 원치 않으나 “주여! 순종하겠습니다.”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목사님이 이것을 깨닫고 순종하셨으면 고생을 안 하셨을 텐데 너무 정직해서 은퇴하실 때까지 평생 고생하셨습니다.

순종하십시오. 잘 안 되는 것 같아도 기도하면서 예수님께서 하라는 대로 함으로써 깨닫고 성장하고 더 관대하고 더 훌륭한 인격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고난의 열매와 의미가 거기 있습니다. 고난은 죽도록 고생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죄를 씻어 줍니다. 고난을 당하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하나님 나를 징계하려는 것인가?” 나를 살피고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고난을 당하면 정금과 같이 변합니다. 죄가 씻깁니다. 고난은 인생을 심화시켜 줍니다. 더 깊이 있고 더 폭이 넓고 더 높이가 있는 사람을 만들어 줍니다. 고생을 제대로, 적극적으로, 신앙적으로 감당한 사람은 다릅니다. 그 속에 깊은 맛이 있고 경건한 인격이 있습니다. 고생을 제대로 겪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고난을 많이 받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면 고난이 의미가 없습니다. 탕자처럼 죽도록 고생하고 배고픔을 겪고서야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옵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지막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을 통해 성화되고 하나님과 가까워집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찬송가 364). 고난이 우리를 엄습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그것이 설령 십자가라 할지라도 십자가를 거쳐 부활이 있고 승리가 있고 성장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개인도 민족도 고난을 통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집니다. 만약 우리가 고난을 많이 받지 않은 민족이라면 스스로 잘난 척 하고 하나님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 밖에 몰랐던 우리 민족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순종하는 한 점차적으로 승화되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세계에 공헌하는 특별한 민족이 될 것입니다.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면 안 되고 눈물이 눈물로 끝나면 안 됩니다. 눈물을 거쳐 성장이 있고 눈물을 거쳐 성숙이 있고 눈물을 거쳐 하나님처럼 되어 가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세계를 향해 많은 공헌을 하는 아름다운 민족이 되기를 기도하십시다. (김상복 목사)





고객센터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기독정보넷공식트위터 Copyright © cjob.co.kr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