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재림, 그 날과 시간 (마 24:16-25:13)
본문
예수님은 마태복음 24:1-35절에서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관련해서 징조들을 말씀하신 후, “이 일이 다 이루리라”(34)는 말씀으로 이야기를 마감하셨습니다. 그리고 36절부터는 주제를 바꾸어 인자의 재림에 대해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36절부터 25:46절까지는 마지막 때와 관련된 비유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살펴볼 본문은 처음(24:36)과 끝(25:13)이 그 날과 시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구절로 감싸고 있습니다. 그 안에 있는 비유들 역시 재림의 날과 시를 짐작할 수 없다는 주제의 반복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관련해서는 경고성 징조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징조를 보고서 준비가 대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대해서는 어떤 징조도 없기 때문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36)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십니다. 그래서 신성으로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인성으로서는 그 날과 때를 예수님조차 모르십니다. 이처럼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부분을 억지로 해석하려 하는 것은 지적인 탐심에 해당합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이단들이 ‘그 날과 때’를 추측했고, 그 주장들은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날과 때’를 어느 정도라도 짐작해보려는 호기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이 머무는 곳에 머물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필연적으로 잘못된 길에 빠지게 됩니다. 재림의 날은 성부 하나님만 아시는 절대적인 비밀입니다.
“인자의 임함” 곧, 예수님의 재림은 노아의 때와 같습니다(3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습니다(38). 이런 활동들은 평범한 일상의 모습입니다. 심판의 징조 때문에 당황하거나 놀란 사람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홍수가 나서 다 멸하는 순간까지도 그들은 전혀 심판의 징조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인자의 재림도 “이와 같으리라”(39)고 하셨습니다. 아무 징조도 없이 일상생활 중에 갑자기 재림하실 것입니다.
40-41절은 재림의 때에 그 징조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기라도 한다면 밭일과 맷돌질을 잠시 멈출 것입니다. 그러나 재림은 일상의 일을 잠시 중지할 만큼의 징조조차 없이 갑자기 임할 것입니다. 그리고 재림 후에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은 일제히 두 부류의 사람들로 - 충성된 종과 악한 종,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로 구별됩니다. 아마도 함께 밭일을 하고 맷돌을 돌리는 사람이라면, 집안 식구나 친척 혹은 이웃 사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들 중에서 한 사람은 천국으로 인도되고 다른 한 사람은 지옥에 버려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42-43a) 만약 재림의 징조가 있다면, 타락한 인간들은 죄를 마음껏 즐기다가 재림 직전에 회개할 것입니다.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43b) 그러나 주님은 생각지 않은 때에 도적 같이 오실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재림의 징조와 그 때를 추측하려는 어리석은 태도를 버리고 깨어서 예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44)
그렇다면 ‘깨어 있는 것’과 ‘예비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자세일까요? 종의 비유(24:45-51)와 열 처녀의 비유(25:1-13)가 그 뜻을 보충 설명합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45-47) 깨어 있다는 것은 주님 오실 날을 이제나 저제나 고대하면서 날마다 철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맡겨 주신 임무를 성실하게 지속적으로 감당하는 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한 활동들은 인간의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러한 기본 생활 외에 각자에게 부여된 임무가 있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성실하게 그 재능들을 발휘함으로써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구별됨을 드러내야 할 임무입니다. 단지 자기만족을 위해 자녀를 양육하거나 밥벌이를 위해 직장 생활하지 않고, 하나님 백성다운 태도로 양육하고 생활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는 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하나님 백성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모든 환경에서 모든 시간에 지속적으로 그렇게 산다는 것은 항상 깨어 있는 것만큼이나 힘듭니다. 그러다보니 ‘설마 오늘 오시겠나!’하는 생각을 무심코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반복되면 악한 종의 습관이 만들어집니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48-49) 악한 종은 주인이 맡기신 일을 성실히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자신이 생각하고 행해야 할 임무를 망각한 채 살았습니다.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백성다운 성품, 주님의 종 된 모습은 모두 상실했습니다. 이것이 깨어 있지 못한 삶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깨어 있지 못한 삶의 결국은 어떠할까요?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50-51) 주인은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돌아와서, 동무를 때리던 악한 종을 엄히 때리실 것입니다. 악한 종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예측했고, 꾀를 부려서 주인이 계셨을 때라면 전혀 하지 않았을 행동들을 했습니다. 따라서 ‘외식자’가 받을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재림 때에 주님께 형벌 받을 사람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보는 데서만 열심히 일하는 태도입니다. 사람이 볼 때와 보지 않을 때의 삶에 차이가 많습니다. 드러나는 겉모습과 숨겨진 속마음에도 차이가 많습니다. 주인 앞에서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서 중한 직책을 맡지만, 주인이 없으면 겸손히 섬기기보다 쥐꼬리 같은 권세를 휘두릅니다. 주어진 직분에 대한 책임의식보다 특권의식을 가집니다. 진실한 자세로 우직하게 살아가기보다 잔꾀를 부리며 살아갑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 백성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는 재림의 때를 예측하지 않으며, 주님이 속히 오시든 더디 오시든 언제나 깨어서 자신의 임무를 성실하게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25:1-12절은 어떻게 재림을 준비해야 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한 열 명의 처녀들이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등불만 준비했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불과 여분의 기름까지 모두 예비했습니다. 신랑이 늦어지자 모두 졸다가 잠들었는데, 한밤중에 신랑이 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처녀들은 급히 일어나 등불을 살폈습니다. 등불이 꺼져 가는 것을 본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나눠 받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모두가 기름이 부족해지기 때문에 슬기로운 처녀들은 기름을 나눠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매정한 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판단이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부랴부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도착했습니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습니다. 그 후에 미련한 처녀들이 와서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는 말씀만 들었습니다.
졸다 잠든 행동에 있어서는 두 부류의 처녀들 사이에 차이가 없습니다. 명백한 차이점은 신랑의 오실 시간에 예측을 했느냐 아니냐에 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이 언제 오실지 예측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충분한 여분의 기름을 예비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처녀들은 대충 언제쯤 오실 것을 예상하고 그 때까지 쓸 기름만 준비했습니다. 악한 종이 ‘더디 오시리라’고 추측하는 잘못을 범했다면, 미련한 처녀들은 ‘속히 오시리라’고 추측했습니다. 어쨌든 섣부른 추측의 결과는 모두 심판 받는 모습으로 끝납니다.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대충 이정도면 되겠지’하는 안일한 마음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어떻게 잘 되겠지’하는 요행심리가 작용해서도 안됩니다. 부모나 아내가 예수 믿는다고 해서 혹은 내가 좋은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구원이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한집에 사는 가족이라 할지라도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중에라도 ‘천천히 준비하지’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더디 오시리라’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이나 영원한 지옥이냐를 걸고 도박하는 위험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주님이 오실지라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내 생애가 끝나기까지 주님이 오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갈 준비 역시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재림 후에는 더 이상 준비할 수도 없고, 준비가 부족했던 것을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주님을 예비한다고 해서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깨어 있기란 연약한 인간에게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졸 수 있고 잠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졸더라도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이미 확실하게 갖춘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확실히 예비 된 사람은 천국으로 데려가실 것이나 온전히 예비치 못한 사람은 지옥에 버려짐을 당할 것입니다.
재림의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그리고 예기치 않은 때에 오십니다. 그 날에 두 부류의 사람이 생길 것입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13) (최동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