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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힘겹고 무겁다 느껴질 때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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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힘겹고 무겁다 느껴질 때 (마 11:28-30)


어제 밤에는 비가오고 천둥도 심하게 쳤던 것 같습니다. 저는 늘 일어나는 시간대로 새벽 4시 반쯤에 잠을 깼는데 천둥소리가 매우 심한 것을 느꼈습니다.
이제 가을도 깊어져서 이번 비로 인해서 가을이 서서히 우리 곁을 떠나는 준비를 하는 것 같습니다. 가을이 되면 단풍이 물들기도 하지만 그 물든 나뭇잎들이 가지에서 뚝뚝 떨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나뭇잎이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것은 매달려 있으려고 애를 쓰지만 더 이상 매달릴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삶이라는 가지에 좀 더 매달려있고 싶지만 정말 힘이 다해서 더 이상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힘도 없어서 뚝 하고 떨어져 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정말 낙엽처럼 우리 삶의 힘이 다하여서 떨어지게 되고 어디론가 밀려 밀려 굴러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 삶도 이 세상에서 흘러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저희 성도들의 삶을 늘 바라보면서 ‘참 힘겹게 살아가고 있구나’ 라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우리 성도들뿐 아니라 주변의 스쳐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들 가끔 사람들 모이는데 보면 다른 사람 개의치 않고 계속 혼자 떠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매우 공격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 볼 때 무슨 생각이듭니까? ‘참 외롭고 고독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저 사람은 마음에 쫒기는 것이 많은가보다’ 라는 생각도 들어 더욱 더 가엽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독하다보니 남의 말을 들을 새도 없이 무엇인가 떠들어야 마음이 조금이라도 안정이 되는 것 같고 마음이 늘 압박을 받고 있으니까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수사되어서 공격적인 성향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삶에 너무 쫒긴 지친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것이 어디 일부 제한된 사람들의 모습이겠습니까? 아마 대부분 우리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렇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때로는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문득 문득 스치는 그늘과 고독의 그림자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참 안쓰럽다’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 이상합니다. 우리의 정과 사랑은 오히려 ‘참 안되었다’ 하고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고통을 느끼는 사람에게 마음이 더 다가가게 되는 것을 봅니다. 뭔가 싸매어주고 싶고, 위로해주고 싶고, 다독여주고 싶은 것은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상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우리 성도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참 사는 것이 힘든가보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든지 마음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잘되면 후덕해지고, 관대해지고, 여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일이 다 잘되는데 왜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게 대하지 못하겠습니까? 모든 것이 안 되니 마음에 날이 서고 뾰족해지고 상황 속에서 자신조차 극복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니 내 마음 다스리지 못해서 남을 괴롭게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아마 오늘 이 자리에 앉아계신 성도님들 중에서 ‘나는 참 사는 것이 어렵고 힘들어’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오늘 주님께서 이 자리에 바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으로 힘들고 어렵다 라고 느껴지시는 분들을 불러주셔서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쉼을 주시려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는 것도 몇몇 안 되는 집안 식구들 부양하는 것도, 때로는 자녀들 바로 키우는 것도, 체면 유지하는 것도, 애를 써도 그렇게 여유롭지 못한 것을 봅니다. 인간관계라는 것조차도 그렇게 원활하지만은 않습니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보다는 내 마음에서 빗겨가는 것이 더 많아 마음 상하기도 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여정은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는 상심하게 하는 것이 더 많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라는 말을 할 때 바로 그것이 내게 들리는 음성과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바로 주님께서는 그런 느낌을 가지는 우리들에게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에 근거해서 오늘 우리가 몇 가지 좀 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오늘 성경을 보면서 먼저 느끼게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선별하지 않고 주님께 오시는 사람은 다 받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다 위로하시고 다 쉬게 만들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은 힘겹고, 외롭고, 고독할 때가 있습니다. 지칠 때가 있습니다. 나를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고 홀 홀 단신으로 광야에 혼자 있는 것 같은 애처로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져서 그 어깨에 짓눌려 버틸 힘이 없다고 생각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앞에 가는 우리의 모습은 늘 초체한 모습일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위로를 받아야하고, 쉼을 얻어야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짐을 지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사의 심정으로 보아서 그런지 주변사람들 이렇게 살펴보면 누구하나 가엽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꽤 번쩍거리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얼굴에 스치는 이와 같은 고독의 그림자 또는 스치는 삶의 그림자 모두를 바라보게 되면 정말 고통 속에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허덕거리고 일찍 나가지만 저녁에 들어올 때 빈손가지고 돌아오는 축 처진 어깨를 늘 우리는 많이 느끼지 않습니까. 누구나 그렇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결국 애처로움 속에서 허덕거리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도 늘 말씀드리지만 좀 낫게 사는 사람은 여건이 좋고 모든 것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라 보다 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이고 마음속에 감사함을 가진 사람이고 내게 주어진 여건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바라보는 사람임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불만이 많고 힘들어하고 뭔가 발에 걸리면 냅다 한번 내질러보면 마음이 한번 편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있고 허공을 향해 주먹질이라도 해야 마음이 풀릴 것 같은 안타까운 심정과 갑갑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모든 사람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많은 사람들은 다 주님 앞에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이 힘겨울 때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때라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여기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이 당시에 있어서 유대인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는 것은 부가된 의식적인 율법의 멍에였습니다. 그리고 유전의 규례였습니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 즉 바리새인 율법학자 서기관들은 자신들도 지키지 못했던 율법의 멍에를 백성들에게 강요했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 백성들은 양심의 가책에 눌려 구원을 받지 못하고 구원을 찾아 방황하고 죄책감속에서 늘 마음에 고통을 느끼며 괴로워합니다. 주님은 이러한 율법의 굴레에 있는 자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양심의 가책, 죄책으로 부터의 고통, 율법의 공포, 평안과 안식이 없는 마음의 갈등의 상태로부터 자유의 세계로 초빙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영원한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을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이와 같은 의미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당시의 사람들처럼 우리들에게 지금 현재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의 공포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알지 못해서 우리 마음속에 부담스러워하는 삶의 짐들, 또 이 시대에 주님은 우리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하는데, 도대체 우리는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일까요?
돈을 벌어야하기 때문에 자유가 없습니까?
돈이 없어서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까?
비교 속에서 열등감 때문에 답답하십니까?
자랑하고 싶고 빼어난 자리에 서고 싶은데 성취하지 못해서 허덕거리십니까?
다른 사람위에 서고자하는 욕망 때문에 늘 괴롭습니까?
인기 때문에, 자녀에 대한 집착 때문에, 지금의 지위를 잃어버릴까 하는 걱정 때문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보장받지 못하는 나의 누림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까?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짐이 되어 우리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내게 있어서 무거운 짐은 무엇일까를 생각할 때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내가 지금 어떤 것이든지 훌훌 털어버리고 터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무거운 짐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런 순간도 ‘나는 이것만을 절대 버리지 못해’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무거운 짐이라는 사실입니다. ‘난 이건 도저히 버리지 못해. 나는 포기 못해’ 라고 집착하면 그것은 결국 우리를 끝까지 누르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생각해 봅니다.
주님 저는 돈이 있으면 참 좋겠어요. 그런데 없으면 그 가운데서 적응하며 살 수 있습니다. 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 저는 사람들이 저에 대해서 박수쳐주고 환호하지 않아도 저는 괜찮습니다. 주님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죠. 그런데 문제는 ‘주님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박수 받지 못하고, 나는 정말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인사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무엇인가 좋은 격려라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하고 생각하면 그런 것들이 우리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집착’입니다.
집착하면 평안이 깨지고 평안이 깨지면 행복이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뭔가에 집착하게 됩니다. 내가 물질에 대해서, 내 명예에 대해서, 권세에 대해서, 자식에 대해서 무엇인가 집착하게 되면 우리는 자유를 상실하고 평안을 깨뜨리고 욕망의 노예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겁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이런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 누구든지 다 내게로 오라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내 상태가 문제가 아닙니다. 내 여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우리는 참 괴롭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너희 중에 이러한 여건이 되면 내게 오라 그러면 주님앞에 여건이 안 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님은 우리들에게 아무조건 없이 모두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도 조건이 있는 겁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마음에 좋을 때까지만.”
“난 당신을 좋아합니다. 내 마음속에 적어도 당신을 싫어하고 혐오하지 않을 때까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들도 원수같이 헤어지는 것 우리 많이 보지 않습니까?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들도 이해관계 때문에 등지고 서로 마음속에 정말 혐오하면서 등지고 갈라서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것을 보면 사람의 사랑이나 아니면 사람의 신뢰라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주님은 우리들에게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사랑이 믿지 못 할 것이 되어서 정말 그것은 신뢰하면 안 된다.’ 그런 말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사랑이나 좋아함이라는 것도 한계가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모든 한계를 무너뜨리고 <누구든지 다 오라 난 너희가 혐오 받을 자라도, 너희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건 내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능가하는 큰 이니 너희가 내게 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 한번 보세요. 우리 사람들 어떻게 보면 참 어리석잖아요. 그런데도 우리는 그 어리석음 속에서 이리저리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와 같은 모든 상태에서도 우리에게 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때때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실망하고, 사람 앞에 서기조차 부끄럽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건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주님은 우리를 더욱 더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마음에 원하는 것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마음에 원하는 것이 많다는 것은 결핍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게 만족하면 원하는 게 없어지죠. 그런데 무엇인가 원하는 게 있다는 것은 내가 아직 그것을 못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계신 분들은 많은 축복을 받은 분들이십니다. 세상에는 여러분들처럼 이렇게 한 시간 동안 편안히 앉아서 허리 펴고 정말 이 자리까지 걸어 올라와서 예배드리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들 이렇게 건강하시고, 건강한 사고를 가지시고 여러분들이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오셨지 여러분들이 그렇지 못하면 이 자리에 오는 것이 꿈이에요.
내가 건강해서 교회 나가서 예배 한 시간 드리는 것이 소원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저는 병원 가보니까 늘 중환자실에 가서 기도하게 됩니다. 그 중환자실에 누워계신 분들을 보면 잠시 누워계신 분들도 있지만 거기서 너무 오래 누워계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분의 소원은 낫는 게 소원이 아니라 좀 더 상태가 좋아져서 위층의 병실로 가는 겁니다. 우리 인생에서는 정상적인 생활이 꿈인 사람이 너무나 많아요. 우리는 여러 가지 결핍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도 자주 걸어 다니려고 해요. 왜냐하면 언젠가 내가 걷지 못할 때도 있으리라 생각이 드니까 자꾸 걸어 다니고 싶어져요. 뿐만 아니라 무엇인가 할 수 있을 때 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정말 우리 삶에는 낙엽처럼 언젠가 붙어있을 힘이 없어서 우리 인생에서 뚝 떨어지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렇게 우리 삶에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서 무엇인가 집착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착 때문에 우리가 더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런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 부모님들이 자식에 대해서 소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기도제목을 적어서 내시는 것을 보면 그 가운데서 정말 많은 부분들이 자녀에 대해서 소원을 써서 내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옆집에 있는 어떤 아이가 아프니까 여러분들 무슨 마음이 듭니까? 아이가 아팠구나, 부모가 참 마음이 아프겠구나, 위해서 기도도 해주고 그리고 큰 수술 받으면 그동안 돌봐주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또 한편 무슨 마음이 듭니까? ‘우리 집 아이는 건강하고 밥도 잘 먹고 해서 감사해. 전에는 공부 안하고 밥 먹으면 그게 그렇게 미웠는데... 그게 그렇게 감사하단 말입니다. 건강하고 이렇게 잘 자라주는 것만해도 고맙다.’ 그렇게 마음에 감격해요. 그런데 성적표 받아보면 또 마음이 틀려집니다.

그리고 어쩌다 또 옆집아이가 좋은 학교 들어갔다 이런 생각 들면 갑자기 무슨 마음이 드는가 하면 마음이 달라지는 거예요. 아주 독한 마음이 들어요. 아이들이 이런 상태를 보고 뭐라 하냐면 ‘우리 부모가 열 받았다’ 이렇게 얘기 하는데요 정말 달라집니다. 그렇게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다가 금방 마음이 바뀌어 집니다. 애들에게 막 뭐라고 하고 애들에게 집착하게 된단 말입니다. 저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촛불로 부터의 자유로움>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여기 전등 다 나가면 촛불 하나 켜요. 사람들이 뭔가 보려고 다 촛불하나에 매달려요. 촛불하나에 목 걸고 촛불아래에 내 모든 것 다 걸어요. 다 거기로 모여 들어요. 그런데 전기 탁 들어오면 어떻게 하죠? 촛불은 필요 없어요. 훅 하고 불면 촛불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제 자유롭게 어디로든지 간단 말입니다. 촛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집착하던 것, ‘나 이것 없으면 끝나, 내 인생 끝이야’ 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날 그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에 마음의 평안, 기쁨을 얻게 되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비치면 우리 삶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우리 삶속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대기를 호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전까지 누리지 못했던 모든 자유를 하나님으로부터 평강으로, 기쁨으로, 은혜로, 소망으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집착이 깨어짐으로부터 시작되고 그 집착에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옮겨감으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고독할 때, 쓸쓸하고 외로울 때, 나 혼자 있다고 생각할 때,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아무도 나를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살다보면 정말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할 때가 있습니다. 괜히 내 마음에 누구도 날 봐주지 않아. 나는 살아있지만 그냥 숨 쉬고 있을 뿐이야 라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도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제가 올해 가을이 되어서 ‘우리 성도님들에게 시집을 한권씩 드려야겠다’ 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라도 좀 읽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하고 먼 소리다 하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요. 제가 우리 구역장님들하고 에스라 남성도 성경공부 나오시는 분들하고 우리교회 전체는 못 나눠 드려도 두 분들에게 나눠드렸습니다. 구역장은 450명 되고 에스라 성경공부 나오시는 분들이 200여분 됩니다. 남자 분들에게는 유치한 시인의 ‘생명의 서’ 라는 시집을 드렸고, 우리 구역장님들에게는 김 연승 시인의 ‘가을의 기도’ 라는 시집을 드렸습니다. 그 유치한 시인의 ‘생명의 서’는 시집이 남아있어서 바로 드렸는데, 김 연승 시인의 ‘가을의 기도’라는 책은 가을이 되어서 드리려고 했더니 책이 없더군요. 아마 요즘은 시집이 잘 안 팔리잖아요. 그러니까 처음에 여러 번 찍고 나서 신판이 나오고 3년이 지나도록 책을 못 찍었어요. 보니까. 책이 재고가 없다고 그러더군요. 450권 정도가 갑자기 필요하다고 했더니 제가 책이 없는데 찍어서 보내드리면 어떻겠냐고 출판사에서 말씀 하시더군요. 보통 책 한번 찍으면 2000권정도 찍는가 봐요. 시집 같은 경우에는 아주 적게는 1000권 정도도 찍는다고 그래요. 그래서 좀 기다렸다가 뭐 다른 책 줘도 되지만 그 시집을 드리고 싶어서 제가 좋아하는 것이어서 기다렸다가 드렸어요. 그랬더니 ‘가을의 기도’가 다 끝날 때 드리게 됐어요. 가을이 거의 끝날 때 드리게 되었는데 3주 기다리니까 그래도 드리고 싶어서 드렸습니다. 책을 이렇게 보니까 신판 1세가 3년 전에 찍혔고 요번에 저희가 나눠준 날 신판 2세라고 찍혀져 나왔더군요. 그러니까 그 책은 요즘 보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서점에도 별로 없고요. 책도 재고도 없고 끝난 책이란 말입니다. 책 찍는 모든 것은 가지고 있지만 사람이 찾질 않으니까 찍질 못하잖아요. 그런데 저희가 이렇게 한꺼번에 450권을 요청하니까 잠자고 있던 책이 살아난 것 같아요. 그렇죠?
저희 때문에 한 번 더 찍은 거예요. 찍은 김에 서점에도 갖다놓고 그랬겠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시집을 우리가 살려준 것 같아요. 마음이 기쁘더군요. 제가 그 시집을 좋아하거든요. 김 연승 시인도 제가 좋아하고 해서 참 마음이 기뻤습니다. 김 연승 시인이 우리에게 감사하다고 해야 할꺼예요. 그런데 벌써 세상 떠난 지 오래 되셨어요. 제가 그때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이 시집이 죽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잠자고 있었는데, 그렇죠?

다른 사람이 찾아주지 않고 또 별로 보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잠자고 있었는데 사람들 별로 시집 안 보잖아요. 옛날 시인인데. 그런데 우리가 어떤 기회가 돼서 또 책을 한 번 찍을 만큼 신청을 하니까 그 시집이 잠자고 있다가 다시 살아난 거예요. 이제 이왕 찍은 김에 서점에도 놓겠죠? 그 생각을 하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 정말 잠자는 것 같고 아무도 돌아봐 주지 않고 어찌 생각하면 숨죽이고 죽어있는 것처럼 엎드려져 있지만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얼굴빛을 비춰주시고 우리를 돌아보시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봐요. 세상에 신청해도 받을 수 없던 이런 책이 다시 살아나서 우리 손에 들어오고, 또 다른 사람 손에 까지 들려지도록 널려져 있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무도 돌아봐 주지 않고 아무도 우리를 요청하지 않을 때 문득 어느 날 한순간에 우리가 일어나 다른 사람에게 소용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다른 사람에게 뭔가 그들에게 수용이 될 수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이 생각을 하니까 우리 인생은 어느 누구도 낙심할 필요가 없어요. ‘아무도 날 돌아보지 않아, 아무도 날 필요로 하지 않아, 아무도 나에게 있어서 내가 필요하다라도 나에게 요청하지 않아’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낙심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도 엎드려져 있다 보면 어느 날 우리는 한순간에 하나님이 우리를 세워주시는 날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믿으세요?
여러분, 우리가 어느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면 그저 어떻게 하겠어요. 갑자기 어떤 일이 일어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주실지.

그 생각을 하면 우리는 아무도 낙심할 필요가 없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이 세상에 고통스럽게 살아가다가도 주님 앞에 나갈 때 주님이 우리에게 그의 얼굴빛을 비춰주시고, 주님이 우리에게 손잡아 일으켜 세워 주시고,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그 순간 우리에겐 또 다른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비취게 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주님께 온 사람은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의 율법선생들은 율법이 인간이 감당해야 될 하나님의 멍에라고 가르칩니다. 멍에를 지는 수고를 해야 영원한 천국의 안식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멍에는 율법의 멍에가 아니라, 주님의 멍에로써 그 멍에를 메고 즐겁게 배우면 쉽고 가볍다고 했습니다. 이 개념은 팔레스타인의 농경문화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앞에서 어미 소가 쟁기를 메고 밭을 갈죠. 새끼소는 거기에 매어져 있어요. 그러면 어미 따라 가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밭은 갈려지는 거죠. 힘은 어미가 쓰고. 그런데 그렇게 따라 다니다 보면 새끼소도 크게 되고, 밭가는 법도 배우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따라 다니다 그냥 자기도 모르게 그 모든 일을 습득하게 되는 거죠.
<믿음>이라는 것은 억지로 들이는 종교적 증세가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주님 따라 가다보면 어느 날 문득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축복입니다.
너희는 믿어야 돼. 너희는 믿음도 없니? 왜 안 믿어?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냥 주님 따라 가다보면 우리 마음에 나도 모르게 어느 날 믿음이 생겼어요. 나도 모르게 주님이 깊어지고 나도 모르게 평안이 있고 나도 모르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눠줄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얘기했어요. 내가 언제 믿음을 가지게 됐는지, 내가 언제 이렇게 마음이 변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큰 기쁨을 느낄 때가 있는데, 우리 성도들과 더불어 은혜를 나누다 보면 큰 기쁨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보면 정말 믿음이 조금씩 자라시는 것 같아요. 제가 여기서 16년 동안 설교하면서 제가 느낀 것이 있는데 사람은 지독하게 안 변해요. 그러나 그 가운데 또 하나 느낀 것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사람의 마음을 바꾼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소망을 가지고 여기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은 금방 드러나는 표정을 지어요. 대부분 인상을 쓰고 있다던가, 아니면 눈을 꺽 감고서 졸립지도 않은데 억지로 졸린 것처럼 그게 참 괴롭단 말입니다. 아니면 주보를 외운다든가 이러 4페이지짜리 한 시간 동안 못 봐요. 10분이면 볼 거 어떻게 한 시간 봅니까? 다 외우는 거예요. 지난주에는 칠천 이백 명 나왔는데 이번에는 칠천 백 명 나왔구나, 지난주에는 기도 누가 했는데 이번 주에는 어떤 장로님이 기도하시는가, 이거 다 외워요.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 그래야 한 시간 가지 도저히 시간이 안가요. 그리고 저에게 얼굴을 안 보여 주시고 뒤통수를 보여주십니다. 나갈 때도 목사하고 악수 안하고 딴 문으로 나가시든지, 아니면 악수 안하고 이렇게 비껴서 나가십니다. 왜냐하면 목사하고 악수하면 얼굴을 알잖아요. 어디서 마주치면 인사하고 참 곤란하단 말입니다. 목사하고 마주쳤는데 교회 안 나오기도 어렵고, 그렇고 하니까 가급적이면 목사하고 얼굴 안 맞추려고 그러십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고개도 들고, 설교도 듣고 나가다가 인사도 해요. 어떤 때는 나가다가 “목사님, 편안히 지내십니까?”하고 인사도 해요. 그런 거 보면 사람의 믿음이 내가 원하고 원치 않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저절로 은혜를 주시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나오다보니까 어미 소가 새끼소를 데리고 가다보면 새끼소가 저절로 배우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내 마음에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 보면 사실은 다 완성된 사람이 아니에요. 예수 믿는 사람도 거짓말 많이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힘이 약해서 굴절되기도 해요. 예수 믿는 사람도 살다보면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일도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조금 씩 조금씩 바뀌어 갑니다.
여러분 교회 다니는 사람보고 “교회 다니는 사람이 왜 저래?” 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금 씩 조금씩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 오랜만에 그런 사람 보면 놀라잖아요. “어떻게 이렇게 바뀌었어?” 그런데 뒤의 말은 차마 못하잖아요. “전에는 사람 같지도 않더니” 뒤의 말은 못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정말 바뀐단 말 이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조금 씩 조금씩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엄청나게 바뀌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교회 처음 나온 사람들 중에 이런 생각 드실지 모르겠어요. ‘내가 오늘 한번만 가기로 했는데 잘못하다 걸려들면 안 돼’ 이런 분들 아마 계실 겁니다.
‘어떤 사람들보면 매일 매일 교회가, 그 사람은 수요일도 가고, 금요일도 가고, 어떤 때는 새벽에도 가, 나도 거기 걸려들어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 그런 거 걱정하실지 모르는데 괜찮아요. 여러분 그렇게 걸려들지 않습니다.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멍에는 가볍고 쉽기 때문에 여러분도 점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어 내가 왜 이렇지?’ 한참 나중에 살펴보면 여러분들이 달라져 있습니다. 마음의 평안도 있고, 기쁨도 있고, 같은 고통을 당해도 그 고통을 받는 마음의 자세가 틀려요. ‘그래,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실 때는 또 은혜도 주실 거야.’
사람이 살다보면 어려움 겪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려움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며 그 가운데 또 내가 해야 될 일을 하면 더 큰 은혜를 주실꺼야 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이 세상에서 전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천국의 복음이었어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회개’라는 것은 우리가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죄의 본성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여 씻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는 은혜의 백성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때 천국이 우리의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그와 같은 천국의 복음을 전하면서 육신이 병든 자를 고치셨고, 배고픈 자를 민망히 여겨서 먹이셨어요. 눈물 흘린 자의 눈물을 거두어 주시고, 슬픔 있는 자를 위로해 주시고,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쫒아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우리의 생활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해 주실 때 늘 어떻게 하셨냐 하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네가 병에서 건하여 건강할 찌어다. 네 믿음대로 될 찌어다” 뭐냐 하면 내 영혼의 문제, 믿음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 주시고 그 뒤에 우리의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을 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이 갑자기 달라지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구원받은 아름다운 백성이 되면 우리생활의 모든 것들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려움을 극복할 힘이 생기고, 넘어져도 좌절하지 않을 용기가 생기고, 우리 삶의 고통과 슬픔을 굳건히 극복할 만한 믿음의 의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운전하시는 분들 보니까 처음 운전면허를 따시면 그분들의 특징이 있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을 태워 주려고 해요. 참 이상하더군요.
“나 이거 차 마련했으니까 타. 자동차 타.” 그러면 사람들이 그때 어떻게 해요.
“나 저쪽으로 가야돼.”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럴 때는 참 이상해요.
“아, 내가 그쪽으로 돌아갈 테니까 타, 괜찮아.” 그렇게 꼭 얘기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차 타면 어떻게 합니까? 불안해서 손잡이 꽉 잡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괜찮아, 안심 해.”
자기가 마음이 편하지 우리가 마음이 편한가? 그렇죠?
그런데 운전 오래 한 사람 차타면 우리가 뭐 꽉 붙잡지 않지요. 그냥 편안히 타죠. 이게 신뢰함의 차이란 말입니다.
초보 운전자가 초보수준이 언제 지나나 했더니 다른 사람 태워준다는 말 안하면 그때 초보가 끝나는 겁니다.
우리가 신뢰함과 신뢰하지 못함은 큰 차이란 말입니다. 초보 운전자 차타면 어깨도 아프고 나중에 몸살 날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면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주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 어려움 후에 내게 어떤 의지가 생기고 내가 어려움 그 끝에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체험하겠지. ‘몸이 아프면 아플 만큼 아프게 하시고, 내게 또 하나님께서 치료의 능력을 주시겠지. 내가 아프다가 세상을 떠나도 내가 생각하기에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하나님이 생각하시기 에는 그때가 가장 합당하다고 여기셔서 날 부르시겠지. 내 마음의 걱정되는 모든 일이 있지만 나는 걱정이 될지라도 하나님은 또 무엇인가 더 좋은 길이 있겠지.’ 라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생기면 우리 삶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도 알지 못하게 조금 씩 조금씩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주일은 일 그만 하시고 교회 와서 예배도 드리고 편안히 쉬기도 하세요. 그 말은 ‘세상에 일도 하지 말고, 어렵게 살아라.’ 그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마음껏 누리라’는 말입니다. ‘애들 주일 되면 교회 보내세요.’ 그 말은 ‘공부 안 해도 되고 학원 안가도 된다.’ 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총명과 은총을 더 누리라’는 말이지요.
‘주님께 헌신하고 주님의 은혜를 누리십시오.’ 라는 말은 주님이 주신 축복을 더 받으시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모든 것 우리들에게 이루어지면 감사하겠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을 다 채울 수는 없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우리는 누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손으로 움켜야 얼마나 움키겠습니까?
요 손으로 움켜야 얼마나 움키겠습니까?
주님의 큰 손으로 우리를 축복하게 하셔야합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누구든지 그 문제를 해결할 출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우리들에게 우리 주 예수님께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님께 오면 쉼을 주시고 주님의 멍에를 메면 쉽고 가벼워 우리가 그 모든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리 합니다.
여러분, 시계 안 봐도 배고프면 아 점심때 됐다고 느낍니다. 삶이 고독하고 외롭고 쓸쓸해 질 때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구나’ 라고 느끼시면 됩니다.
우리의 삶은 때때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 같아요.
물결치면 아무리 헤쳐 나가는 것 같아도 그 물결이 세면 우리는 가려고 하던 방향으로 가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편으로 저만큼 흘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우리 삶도 힘이 없어 이리저리 굴러 떨어지고 바람에 흩날려 어디론가 굴러갈 때가 있겠죠.
그곳에 머물게 되면 비가 오고 눈이 오고 그 곳에서 썩어져서 이듬해 싹들이 나올 때 자양분이 돼서 또 다른 생명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어느 날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인생 같지만,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우리들이 새롭게 되면 우리는 또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또 다른 생명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짐을 무거워 곤고하고 괴롭게 느껴질 때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선 우리 인간들의 죄를 위하여, 인간들의 고통을 위하여, 눈물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어요.

구원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하늘나라의 비밀과 소망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당장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생명이 있으니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든 삶을 극복 할 수 있는 힘과 용기와 마음의 의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한 가지 한 가지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들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

오늘 이 자리에 초청받아 나오신 분들 또 이 자리에 계셨던 우리 모든 성도님들 우리는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하고 우리를 부르실 때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쉬게 하시고 우리들에게 평안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오늘 주님께서 부르셔서 이 자리에 오신 모든 형제자매님들에게 우리주님의 평안과 기쁨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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