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부르시는 주님 (출 33:17, 눅 19:1~7)
본문
요즘의 아파트 이름은 많이 세련되었습니다. 이전에는 현대아파트, 한양아파트 등으로 불렸는데 이제는 타워 팰리스, 롯데 케슬, 아크로빌, 프루지오 등으로 불립니다. 기존의 아파트도 이름을 바꾸므로 아파트 가격이 올랐다고 합니다. 이름만 바꿔도 가격이 오릅니다. 이름의 중요성을 의미합니다. 옛날 여인들의 이름은 분녀, 삼돌이 이런 이름이 있습니다. 요즘에는 예쁜 이름들이 참 많습니다. 이름만 예뻐도 사람이 훨씬 예뻐 입니다.
지나친 상혼이 지은 이름들이 많이 있습니다. 11월 11일을 ‘빼빼로데이’라고 합니다. 먹고 날씬해지자는 마케팅 차원에서 이 날을 만들었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매출이 많이 올랐답니다. 11월 8일을 ‘브래지어 데이’라고 합니다. 11은 양쪽 끈 모양을 상징하고, 8은 가슴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고래밥데이’도 있습니다. 12월 12일인데 글씨가 고래를 닮았다고 하네요. 닭을 할인 판매하는 ‘구구데이’도 있습니다. 9월 9일입니다. 상품 마케팅 차원에서 하는 일이지만 너무 억지로 이름을 붙여서 남발하는 어색한 모습도 있습니다. 이름은 뜻이 좋고 부르기 좋아야 합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를 원합니다. 명함을 주고받는 것은 이름을 건네기 하는 것입니다. 내 이름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서로의 이름을 알리고 기억하는 것은 중요한 인간관계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많이 기억하는 것도 하나의 리더십이고, 좋은 관계의 지름길입니다.
이름은 내 자신입니다. 우리가 ‘아무개’라고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을 떠 올리고, 그 사람의 생김새, 성격, 가정 등 모든 배경을 연상하게 됩니다.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사람과 항상 동격입니다.
유대인의 성명철학은 참 독특합니다. 사람은 그 이름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름은 그 사람 자신이며 혼입니다. 그 사람의 명예이며 권위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이름을 지어주면 그 이름대로 산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한국 사람이 모세라든지,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명 설교가였던 교부 크리소스톰은 “아이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지어주라, 어떻게 하든지 선하게 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그 이름대로 된다”(people become what you call them)는 말이 있습니다. 이름은 누구에게나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두 남녀가 선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름이 뭐예요?”하고 여자가 물었습니다. 남자는 “철입니다. 성은 전이구요. 그래서 이름이 전철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남자의 이름을 듣더니 여자가 막 웃으며 말했습니다. “저의 이름은 호선이예요. 성은 이구요. 그래서 이호선이예요”. 전철과 이호선이 만나서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답니다. 이름은 잘 기억되어야 합니다. 이름은 부르기 좋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름을 잊기 쉽고 부르기 어렵지만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이름을 아시고 부르십니다.
첫째, 나의 이름을 아시는 주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여리고에 사는 삭개오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보려고 갔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나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키가 작은 삭개오는 군중들 때문에 예수님을 볼 수 없어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나무 위에 올라가니 사람이 많은 것도, 자신의 키가 작은 것도 다 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삭개오가 키가 작은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길가에 나왔다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삭개오가 너무 늦게 나갔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속도경쟁에서 졌기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나무 위에 올라감으로 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도, 자신의 키가 작은 것도 한꺼번에 해소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야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 보려고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려고 여리고에 오신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삭개오를 제대로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야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어이, 자네 내려와 보게”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보게 난쟁이 내려와”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삭개오의 이름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아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전에 한번도 두 사람이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처음 보는 삭개오의 이름을 알고 계셨습니다. 삭개오도 처음 보는 예수님이셨지만 “어떻게 제 이름을 아십니까?”라고 묻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을 아는 것을 당연히 여겼습니다. 성경에는 삭개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만나는 사람들은 이미 이름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시몬의 이름도 아셨고, 마태의 이름도 아셨고, 바울이 된 사울의 이름도 아셨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가 받은 계명은 모두 소중히 여기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게 부르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은 안식일을 다른 날보다 소중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아”, “모세야”, “사무엘아”, “사울아”라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은 이름으로 아십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알지만 예수님은 사울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울아, 사울아” 하고 부르십니다.
요한복음 10:3에는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양을 이름으로 아십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이름으로 아는 관계입니다. 양의 모습이나, 색깔이나, 특징은 다 다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각각의 양을 이름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을 그냥 적당히 숫자로 헤아리시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불러내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요한복음 10:14에는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양을 알고 양이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우리를 아십니까? 자신의 목숨을 주시려고 아십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목숨을 버려 구원하고, 사랑하려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창세기 32:27에는 야곱과 씨름하던 천사가 야곱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은 “야곱이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28절에는 하나님의 사자가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물었겠습니까? 야곱의 과거, 현재, 미래를 너무 잘 아시기에 이름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너무나 잘 알기에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라고 하는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에게 우뢰의 아들이란 뜻의 보아너게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성품을 아시고 이름을 지어주십니다.
이름은 인격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이름을 훼손하면 인격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어른들의 함자를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안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를 인격으로, 세밀하게, 완전하게 아신다는 뜻입니다.
가끔 성도들이 제게 “목사님, 제 이름을 아세요?”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다는 몰라도 아주 많이 압니다. 더구나 저에게 그렇게 물어볼 만한 분들의 이름은 압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름을 모르는 분들은 그렇게 물어보지도 않아요. 골프의 황제라 불리는 타이거 우즈의 한국 이름이 무엇인지 아세요? 임호입니다. 이 이름은 몰랐지요? 타이거는 호랑이 ‘호’이고, 우즈는 수풀이니까 수풀 ‘임’입니다. 그래서 임호(林虎)라고 합니다.
오베르랑 목사님은 프랑스의 유명한 설교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분이 젊었을 때 눈 덮인 알자스 산을 등산하였습니다. 한참 산을 오르다가 그만 실족하여 깊은 계곡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랜 동안 정신을 잃고 있다가 의식을 회복하였습니다. 어느 작은 집 방안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어떤 농부가 자기 집에 데려가 상처를 싸매어 주었습니다. 추위에 잘 견디게 방안을 따뜻하게 해 주었습니다. 자신의 피 묻은 옷이 갈아 입혀져 있었습니다.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농부는 근심스럽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는 다시 살게 된 것이 너무 감사하여 주인에게 감사드렸습니다. “당신이 나의 목숨을 살려주신 생명의 은인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이곳의 주소가 어떻게 됩니까? 내가 돌아가서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농부는 웃으면서 “저도 한 가지 묻겠습니다. 저의 질문에 대답을 해 주시면 저도 저의 이름과 주소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비유에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이름을 겸손으로 감추어도 주님은 아십니다. 우리는 내가 빚진 사람의 이름을 나의 부족으로 잊어도 주님은 아십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의 이름을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렇게 자상하게 알고 살피시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을 느끼고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입니다.
예수님은 돌무화과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에게 “삭개오야”하고 부르셨습니다. 이름을 알뿐만 아니라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잘 안다는 의미입니다. 부르시는 분은 친근하고, 사랑하고, 자상하십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삭개오를 아시고, 친근할 이유가 없는 세리를 친근하게 불러주신 것입니다.
사무엘상서 3장에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장면이 드라마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아, 사무엘아”하고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은 이 소리를 듣고 제사장 엘리에게 갔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부르실 때 또 엘리에게 갔습니다. 세 번째 다시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엘리에게 갔습니다. 그 때 엘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줄 알고 사무엘에게 만일 또 부르시면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하라고 가르칩니다. 사무엘상서 3:10에는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네 번째 사무엘을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이 응답할 때까지 부르시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4에는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별명을 ‘부르시는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고 계시는 ‘부르시는 이’입니다.
이름은 부르라고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은 불러져야 합니다. 이름이 불려지면 그 부름에 응답해야 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이전과는 많이 다릅니다. 불안한 십대들의 이유 있는 반항이 있다고 합니다. 십대들이 “엄마 아빠 이렇게 해 주세요”라고 하는 바람에 첫째는 “제 방에 들어올 때 ‘노크’ 잊지 마세요”라고 합니다. 둘째는 “‘야’, 라고 부르지 마세요. 저에게도 이름이 있어요”라고 합니다.
기도할 때도 그렇습니다. 이름을 일일이 불러가며 기도하는 것은 사랑이며 알뜰한 기도의 모습입니다. 저도 우리 교우들 다는 못하지만 필요할 때는 이름을 다 불러 기도합니다. 그래서 제법 이름을 많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름을 불러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도 좋아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이름을 부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칭기스칸은 자기를 부를 때에 칭기스칸이라 하지 말고 테무진이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칭기스칸은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부르십니다. 내 자신을 높이지도 않고 낮추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차별하지 않고 부르십니다.
오래 전의 찬송가에 있던 좋은 찬송이 지금은 없는데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제가 좋아하는 이런 찬송입니다. “나의 양들이 내목소리 알아 내 가는 길 따라온다. 내가 부르면 따라오지만 다른 사람 안 따라 간다”. 예수님이 부르시는 이름이 됩시다. 예수님의 부름을 듣고 따라가는 양이 됩시다.
신입사원이 부서에 배정을 받았습니다. 과장이 그를 보자 “이름이 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냥 김씨라고 불러주세요”. “아니 여기가 공사판인가? 어떻게 그렇게 부를 수 있는가? 이름을 불러야지”. 신입사원은 자신의 이름을 얘기했습니다. “김 따스한 봄날 아지랑이 가득한 초가집”입니다. 그 때 과장이 신입사원을 불렀습니다. “이봐, 김씨!” 이름은 부르기도 쉬워야 합니다.
어느 은행의 행장이 자신의 모교를 찾아가 일일 교사로 변신하였습니다. 자신의 후배인 학생들에게 1시간 동안 강연하면서 “여러분,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6가지 요소가 무엇일까요?”라고 물었습니다. 학생들은 이런저런 답변이 나왔습니다. 그는 흔히 요즘에 유행하던 쌍기역으로 시작하는 여섯 가지를 설명했습니다. “바로 ‘꿈’, ‘끼’, ‘깡’, ‘꾀’, ‘꼴’, ‘끈’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것들이 성공의 요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주님이 나를 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복을 받고 성공합니다. 예수님이 이름을 알고 부르면 인생역전이 가능합니다. 로또 복권이 인생역전이 아닙니다. 삭개오의 인생역전은 복권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르셔서 나무에서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어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는 주님이 그의 이름을 불러 인생역전 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면 인생역전이 됩니다.
결론
이란의 선교사인 로랜드 알렌(Roland Allen)의사는 어느 부족의 퇴행성 풍토병인 안질을 수술하여 주었습니다. 고침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내가 당신의 이름을 말하겠다(I'll tell your name)”라고 하였습니다. 훗날 알고 보니 그 부족에게는 ‘감사’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감사라는 말 대신 그들이 한 말은 이름을 말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름을 알아주고 드러내는 것은 가장 소중한 존경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감사입니다. 주님이 내 이름을 아시고 부르시는 것은 가장 고귀한 일입니다.
알렉산더가 하루는 병사 가운데 도망갔다 잡혀온 탈영병 한 명을 만났습니다. 그에게 “이름이 뭐냐?”라고 물었더니 병사의 이름이 “알렉산더”였습니다. 알렉산더는 백성의 방어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성의 방어자란 이름을 가진 병사가 방어는커녕 도망을 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병사에게 “이름을 고치든지, 태도를 바꾸든지 해”라고 하였답니다.
우리는 다 좋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부르실 때마다 주님이 기뻐하실 이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자랑할 이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부르고 싶은 이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4:16에는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으로, 우리 각자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신다고 했습니다. 훗날 하나님의 나라에서 생명책에 기록된 우리의 이름이 다 불러지기를 바랍니다. 이름이 빠져 당황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름을 아시고 부르시는 주님의 은혜로 구원에 사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