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복음, 바른 복음 (갈 1:6~10)
본문
예전에 유명한 학자 한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학생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칠 때 하늘 천(天),따 지(地), 이렇게 글자만 가르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천 자를 가르치면서 하늘은 무슨 뜻이고, 하늘에 대해 옛 성현들은 어떻게 말했고, 이런 식으로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따 지 자로 넘어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분에게 천자문 하나를 배우면 사서삼경을 다 배운 것 이상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요즘 성경을 읽을 때 웬일인지 그런 식으로, 한 단어, 또 는 한 절의 말씀을 가지고 많은 것을 생각하는 식으로 읽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가 이것이 아니고, 설교 구성의 균형도 깨뜨리는 일이지만 이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최근에 외부에 나가서 설교를 할 때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한 말씀을 가지고 그런 식으로 설교한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
듣는 분들에게나 설교하는 사람에게 많은 은혜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매달 두 번째 화요일 저녁에 새터민들을 위해 세워진 평화교회에 가서 예배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마치면 우리 교회에서 간 분들이 문밖에 서서 숙소로 돌아가는 새터민들의 손을 꼭 잡고 격려의 말을 해 줍니다. 이것은 그 날 해야 할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때 새터민들은 하나 같이 저에게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 교회를 돌보고 있는 장로님이 그렇게 시키기 때문입니다.
그 새터민들은 거의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생활은 어떻게 하는지 전혀 모르는 분들입니다.
성경 본문을 읽을 때도 꼭 몇 쪽에 있다고 알려주어야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설교가 반 가까이 진행되었는데도 본문을 찾기 위해서 성경을 뒤척이고 있는 새터민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같이 간 전도사님들이나 성도들에게 좀 도와주시라고 눈짓을 합니다.
그런 형편이라 교회생활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이르는 것입니다.
그 분들은 시키는 대로 하는 데는 아주 익숙한 분들입니다. 북의 생활이 그러니까요.
그래서 시키는 대로 큰 소리로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잘 합니다.
때로는 우리 교회 성도들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 주일 전 화요일에도 그 교회에서 창세기 1장 시작 부분을 가지고 설교했습니다.
설교 제목을 아예 ‘이 말씀을 씹어 봅시다.’라고 했습니다.
밥을 먹는데 물에 말아서 후르르 먹는 것이 아니라 꼭꼭 씹어서 먹는 것처럼 말씀을 자세하게 살펴보자는 뜻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인사를 나누는데 한 젊은 새터민이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큰 소리로 ‘은혜,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했습니다.
앞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한 것은 그 교회를 돌보는 장로님이 시켜서 한 것이고, 뒤의 ‘은혜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는 자기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저도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오늘은 갈라디아서 1장 6절에서 10절까지가 본문인데 설교를 준비하는데 6절, 그것도 먼저 상반절이 제 마음을 꽉 잡았습니다.
그 때문에 설교 준비의 진도가 제대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먼저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말이 마음에 크게 울렸습니다.
오늘이 종교개혁 489주년 기념주일인데 종교개혁의 중요한 표어 가운데 하나가 ‘오직 은혜로!‘ 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 나온 것 아닙니다.
지하철을 탈 때, 버스를 탈 때, 요금을 지불하고 탑니다.
극장에 들어갈 때, 운동경기 관람할 때, 음악회에 갈 때는 입장권을 사 가지고 들어갑니다.
그런 식으로 내가 무슨 값을 지불하고 ‘이 자리, 내 것이요“ 할 자격이 있어서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격이 없는데 하나님이 불러 주셨습니다.
‘아니오, 나는 내가 결정하고, 내 발로 교회에 나왔소!’
‘나는 아내가 가자고, 가자고 권해서 마지못해 나와 있습니다.’
‘나는 그저 친구에게 끌려서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데요…’
나는 호기심 때문에, 나는 답답한 가운데 교회에 가면 무엇인가 시원해질 것 같아서, 나는 부모님 때문에, 여러 가지 대답을 할 지 모르겠으나 그 근본바탕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 15절을 보세요,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는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렇게 자기 삶 전체의 근원이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는 좋은 자요, 복된 자리입니다. 생명의 자리요 기쁨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아니 이 자리에 나올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우리를 부르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부를 때는 왜 부르는지 목적이 있습니다.
칭찬을 하기 위해, 무엇을 주기 위해, 심부름을 시키기 위해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목적이 없이 누구를 부르는 사람은 싱거운 사람입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그 사람이 누구를 불러도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목적이 없이 우리를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나를 부르셨을까?’ 6절 앞부분을 읽으면서 이 질문이 새로워졌습니다.
이 질문의 답을 알고, 그 답에 맞게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이 행복은 아주 차원이 높은 행복입니다.
우리가 자녀, 또는 아래 사람을 부르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심부름을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전도라는 심부름을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잘 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그것을 선명하게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전도 가운데에서도 이방인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8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다고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평생을 고난 가운데서 보냈지만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6절의 상반절에서 받은 은혜와 교훈의 일부를 말했지만 하반절이 또한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 오늘날 터키의 중부 지방,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 주변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가자 유대주의자들이 들어와서 복음을 받아들여 따르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전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할례를 받고 율법이 말하는 것을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금방, 쉽게 변심을 하고 복음을 버리고 유대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에 끌려갔습니다.
여기 “이같이 속히 떠나”에서 “떠나”는 “버리고”의 뜻입니다.
바울은 이 일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을 바로 가르치기 위해 급한 마음으로, 강한 어조로 기록한 것이 갈라디아서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전도한 사람들에게 누가 접근해서 ‘너 예수는 믿어서 무엇 하니?’ 유혹하는 일이 없도록 지켜야 합니다.
그 때 그런 목적으로 그들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가 전도한 사람들이 금방 그런 유혹에 넘어가서 예전 생활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보살펴야 합니다.
예수 믿은 초기에 그런 유혹을 받는 일이 많고, 넘어지는 일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으면, ‘그런가 보다!’ 심지어는 ‘내, 그럴 줄 알았어!’ 또는 ‘초신자라 할 수 없어!’ ‘내버려두면 언제인가 자기 발로 돌아오겠지!’ 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그런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고 하였는데 이 말의 정확한 뜻은 ‘실망스럽다’ ‘마음이 괴롭다’는 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아픈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단호한 태도로 ‘돌아와요, 교회에!’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6절의 하반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이제 오늘 설교의 주제로 들어갑니다.
갈라디아서는 전체가 아주 강한 필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오늘 본문은 더욱 강합니다.
오늘 본문에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저주는 영적인 파멸을 뜻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저주라는 말을 잘 쓰지 않았습니다.
저주는 벌의 침과 같아서 저주를 하면 상대방도 아프게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유익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 서신 전체에 저주라는 말이 열한 번 나옵니다.
그 가운데 갈라디아서에 여섯 번 이 말이 나옵니다.
다른 곳에서 저주라는 말을 어떻게 썼는지 찾아보면, 로마서 9장 3절에서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고 했습니다.
저주의 대상이 남이 아니고 자기입니다.
로마서 12장 14절에서는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오히려 저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대개 이런 용도로 저주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8절을 보면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왜 이렇게 강하고 급하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다른 복음” 때문입니다.
6절에서 9절까지 “다른 복음”이란 말이 빠지지 않고 들어 있습니다.
“다른 복음”이 무엇입니까?
우선 이단들이 넓은 의미에서 여기에 들어갑니다.
수지 풍덕천1동 동사무소 옆, 전에 양복 싸게 팔던 곳에 교회라는 이름을 붙인 건물이 거의 준공단계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 수지 와드” 좀 낯이 섭니다.
‘서양의 선교단체가 하나 들어오나?’ 했더니 어느 장로님이 알려주시는데 모르몬교랍니다.
모르몬교의 공식 이름은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인데 바꾼 모양입니다.
‘와드(ward)'라는 말은 ’구(區)‘라는 뜻인데 모르몬교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니까 모르몬교는 조직이 선교부, 지방부, 그리고 와드, 이렇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아, 모르몬교요? 그 사람들 참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던 데요. 행동도 참 예의 바르게 하던 데요. 그리고 모르몬 합창단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으로 알고 있는 데요…’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외모가 단정할 뿐만 아니라 교리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모르몬교에는 13개조로 된 신조가 있는데 제1조는 “우리는 영원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믿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교리들이 많이 다릅니다.
모르몬교는 무서운 이단입니다.
모르몬교는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모르몬경이라는 것을 경전으로 사용합니다. 모르몬경은 성경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모르몬교의 창시자인 요셉 스미스라는 사람이 1823년 9월 21일에 모로나이라는 천사를 만나 뉴욕주 어느 언덕 서쪽 바위 밑에서 돌 상자 속에 담긴 금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을 번역한 것이 모르몬경입니다.
모르몬경은 열다섯 권으로 되어 있는데 니파이일서, 이서, 삼서, 사서, 야곱서. 이노스서… 이름이 이렇습니다.
성경 대신에 다른 것을 경전으로 삼는 것, 기독교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이단입니다.
아무리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고 선한 일을 많이 해도 이단입니다.
종교개혁의 중요한 구호 가운데 하나가 ‘오직 말씀으로!’입니다.
여기에서 말씀은 성경을 말합니다.
성경은 말씀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4장 2절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개신교는 성경보다 다른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성경을 제일의 기준으로 하지 않고 다른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다른 것을 경전으로 삼는 것은 결코 인정할 수 없습니다.
다른 복음은 교회 안에, 그리고 교회 가까운 곳,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오늘 바울이 말하고 있는 다른 복음도 사실은 이런 것을 말합니다.
교회 밖에 있는 이단들을 주로 말하는 것이라면 다른 복음이라는 말 대신에 ‘틀린 복음’ ‘거짓 복음’ 이런 말을 썼을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은혜를 부인하는 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복음을 따르는 척 같으나 안에는 유대교의 바리새적 요소를 간직하고 있는 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할례를 중요하게 여기고, 절기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다시 따르는 것은 복음을 통해 얻은 자유를 버리고 율법의 종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렇게 속히 바른 복음에서 떠난 것은 예전에 믿던 유대교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버리는 것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막 전도를 받은 초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게 되었으나 예전에 믿던 것을 버리기 어려워하고, 예전의 생활에 대해서 향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다른 복음을 따를 위험을 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말로는 그저 “다른 복음”이라고 하였는데 헬라어 원어는 6절의 다른 복음과 7절의 다른 복음이 말이 다릅니다.
6절의 다른 복음은 “헤테론”이라 하여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말합니다.
영어성경은 ‘another gospel'이라고 번역했습니다.
7절 이하의 다른 복음은 “알로스”라고 하여 여러 가지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어성경은 ‘other gospel'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유일성, 복음의 절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다른 말을 쓴 것 같습니다.
복음 비슷한 것이 둘이 있거나 여러 개가 있거나 복음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세주이시다. 그 분을 믿어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것 하나입니다.
이것이 바른 복음입니다.
종교개혁의 구호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교회는 믿음을 핵심으로 한 공동체입니다.
교회를 교제를 위한 기관으로 여기고 있는 것도 다른 복음입니다.
종교가 인간생활에 필요하고 유익한 것이라고 하니까 교회는 그런 필요에 의해서 존재하는 기관으로 여기고 있는 것도 다른 복음입니다.
7절에 “어떤 사람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의 “어떤 사람들”은 유대주의자들입니다.
바울을 통해 바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다시 유대교로 끌고 돌아가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더 많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가 기록될 때보다 더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 또는 내 안에 다른 복음이 없는지, 다른 복음적 요소가 없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그런 다른 복음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하지 않습니다.
침묵하지도 않습니다.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이 엄하고 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다른 복음은 저주로 연결됩니다.
본문에서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 대해서 주로 말하고 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다른 복음”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면서 ‘바른 복음’이라는 말을 한 번 사용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 바른 복음이 어떤 것인지 잘 알려주는 말이 있습니다.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힌트를 드릴까요?
7절에 있습니다.
힌트 하나 더 드릴까요?
일곱 글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다른 복음, 바른 복음’이라고 할까? ‘다른 복음,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할까, 여러 번 왔다 갔다 했습니다.
언어의 유희 같지만 ‘다른 복음 바른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기억하기에 좋겠다고 여겨져서 그 편을 택했습니다만 바른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떤 것인지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세주이시다. 그 분을 믿어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른 복음을 두 글자로 줄이면 어떻게 됩니까?
‘정통’이 됩니다.
이단의 정의 가운데 하나가 ‘정통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바른 복음,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지금 그 위에 서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복음에 대해 한 눈 팔지 말아야합니다.
원래 사람들은 다른 복음을 더 매력적으로 여기고 그것을 더 따르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만 다른 복음을 잘 따른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서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탄식 겸 질책을 하고 있습니다.
바른 복음을 버리지 말아야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 앞부분을 보세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울 서신 어디에서도 이런 표현을 다시 찾을 수 없습니다.
왜 이렇게 가혹하게 야단을 치고 있는 것입니까?
바른 복음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바른 복음, 그리스도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버리지 말고 소중하게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바른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열심을 내야합니다.
다른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보다 더 열심을 내야합니다.
이단들, 참 열심입니다.
이단들이 집에 찾아와서 ‘딩동…’ 하는 일을 많이 겪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 교패가 붙어 있는 집들을 골라서 더 열심히 찾아다닌다고 합니다.
석 주일 전에 러시아 로스토프에 선교출장을 다녀왔습니다.
로스토프 공항에 내리는데 같은 비행기에서 검은 양복을 단정하게 입고 머리를 짧게 깎은 미국 젊은이들이 여러 명 내렸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모르몬교를 전하는 사람들이지요.
그 사람들, 그 러시아 먼 곳까지 모르몬교를 전하기 위해 찾아가고, 참 열심입니다.
우리가 노방전도를 하고, 선교를 하러 어디에 가고, 그럴 때 ‘내가 지금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내가 선교를 위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주님, 다른 때 말고 이 때 날 좀 봐 주세요!’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는 덕이 부족하기 때문인지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로스토프 선교 출장의 경우 대개 추석 때 현지를 방문하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모르몬 교인들을 보니까 그런 자존심이 무너지더군요.
여러분, 바른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보다 더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을 힘써 지켜야합니다.
베드로를 그린 그림은 대개 베드로가 손에 열쇠를 들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마태복음 16장 19절의 말씀,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 하신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바울을 그린 그림에는 바울이 무엇을 들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까?
칼을 들고 있는 것으로 그린 그림들이 많습니다.
복음을 지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로마의 어느 성당에 가니까 입구의 한쪽에는 열쇠를 든 베드로, 다른 한쪽에는 칼을 든 바울의 조각상을 세워 놓았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칼을 든 바울이 참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칼은 싸움의 도구인데, 예수님은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는데 왜 칼일까, 더구나 실제로 칼을 가지고 다닌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 그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편 귀를 베어 버렸는데(요18:10),
바울에 대한 기록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바울이 칼을 가지고 다녔다는 것은 없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칼이란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칼을 든 바울일까,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림들, 그런 조각들을 여러 번 보는 가운데 바른 복음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수호하려는 바울의 단호한 의지를 강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찬송가 400장은
주의 진리 위해 십자가 군기 하늘 높이 쳐들고
주의 군사 되어 용맹스럽게 찬송하며 나가세
나가서 나가세 주 예수만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치고 싸움터로 나가세
라고 노래하고 있는데 우리는 바른 복음을 지키기 위해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바른 복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싸울 때 주님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교회에서 쓰는 “십자가 군기”라는 말은 대개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의 콘스탄타누스 황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황제의 자리를 놓고 막센티우스라는 경쟁자와 싸우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4만, 상대방의 군대는 10만, 더구나 로마의 가장 강력한 친위군단이 막센티우스를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불리한 형편에서 결전을 하루 앞둔 날, 태양을 바라보며 기도하는데 태양 위에 그려진 십자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또 ‘이 표시로 승리하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음성에 따라 십자가 군기를 앞세우고 자기와 병사들의 방패와 투구에 십자가를 그리고 밀비안 다리에서 싸워 이겼다는 크게 이겼습니다.
이 일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른 복음과 바른 복음의 싸움은 언제나 바른 복음의 승리로 끝납니다.
그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면서 마칩니다.
먼저 여러분, 성경 한 절, 한 절의 말씀에서 깊은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다시 한 번 깨닫기 바랍니다.
이단을 단호하게 배격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의 다른 복음, 내 안에 다른 복음적 요소가 없는지 살피시기 바랍니다.
바른 복음,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는 것을 감사하면서 다른 복음에 대해 한눈팔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른 복음을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른 복음을 위하여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해서 10절에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좋게 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