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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 있는 일들 (행 1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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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 있는 일들 (행 16:11-15)



가을이 되면 아마 무엇인가를 유심히 보게 되고 또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될 때가 많을 것입니다. 아무리 ‘나는 계절과 무관하게 살아’ 하고 삶의 짐에 눌려 살아갈지라도 세미하게 표현을 할 수 없을 뿐이지 가을은 우리들에게 많은 사색과 고독의 지경을 제공해 줍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거나 아니면 어떤 행동을 할 때 반드시 그 내면 세계를 살펴보면 어떤 생각이나 행동은 언제든지 그것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그냥 생각 않고 자연히 살아지는 대로 살았어’ 라고 말할지라도 본인이 깊이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지 그의 삶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고 구조와 삶의 구조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부모 혹은 어떤 교육적 상황에서 교육을 받았는가 누구에게 영향을 받고 살았는가 그의 내외적 사고와 행동이 어떤 상황에 놓여져 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또한 그가 주어진 환경과 상황을 과연 주도할 수 있는 성향과 훈련이 된 사람인가 아니면 늘 주어진 상황에 끌려가고는 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처럼 우리 삶의 모든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고 그 이유로 인해서 일련의 사건이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도 살펴보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하나님의 계획과 그리고 그와 같은 상황적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즉 ‘사도바울이 갑자기 빌립보 지역에 도착해서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큰 은혜가 임하였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과정 중에 이러저러한 사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이러한 여러 과정을 거쳐서 유럽전도여행을 이루되 새로운 복음의 꿈을 새로운 지역에 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사도바울이 도착한 유럽의 첫 성 빌립보에서 부터 시작되어 유럽전체
에 복음의 불길이 붙어가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그 주변 있었던 풍광들을 살펴봄으로 우리는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미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대로 사도바울은 아시아지방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기 원했지만, 성령께서 그 길을 막으시고 드로아에 있을 때 마게도니아인의 환상을 보여주심으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 라는 환상 속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사도바울의 마음에 확신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6장 9절에서 사도바울이 마게도니아인의 환상을 보고 이제 마게도니아로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을 확신합니다.

마게도니아는 헬라의 북반부 지역으로써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레아 지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요즘의 유럽지역입니다. 드로아에서 사모드라게로 네압볼리를 거쳐서 마게도니아의 첫 성인 빌립보 지역에 이르게 됩니다. 거기서 수일을 거하다가 이제 아무 일없이 유하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이 없는 그곳에 기도 처소라도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 나가게 됩니다. 강가로 가서 기도처소를 찾아 나선 그들에게 마침 몇 명의 여자들의 무리가 있어 사도바울은 그 가운데 복음을 전하게 되고 그 가운데 루디아라고 하는 사람이 그 말씀을 받아 듣고 은혜를 받고 그 무리를 집으로 초청하여 온 가족이 세례를 받고, 그리고 그 집에 머물도록 강권하여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하게 하니 루디아의 집은 유럽의 최초의 교회가 됩니다. 즉 이와 같은 사역을 통해서 루디아의 집에 복음을 전하고 그곳에서 말씀을 전하는 기회를 발화하여 마침내 복음의 뜨거운 불길이 온 유럽으로 불붙어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 있어지는 일들을 살펴봄으로 반대로 우리
들에게 어떤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또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먼저 생각하는 것은 은혜의 여정에는 반드시 애써서 믿음의 동역자가 될 사람을 만나고 그들을 세워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반드시 애를 써서 우리가 만나야 될 사람을 만나야 하며 만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잘 믿음으로 양육하고 세워서 그와 더불어 동역하여 새로운 역사를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쩔 수없이 일찍 일어나는 새가 더 많은 벌레를 잡는다고 합니다.

오늘 <12절>을 보니 빌립보 성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수일을 유했다고 했는데 단지 여독이나 풀기 위해서 쉰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당시 빌립보 성에 도착해보니까 사도바울의 일행이 뭘 어떻게 해야 될, 손써 볼 도리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아는 사람도 없었고, 누구 하나 말붙일 사람도 없는 이러저러한 사정 속에서 그들은 복음을 전도할 전략을 세우고 구상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준비를 위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접촉점을 찾기 위해서 지혜를 자아냈을 것입니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안식일이 됩니다. 이들은 안식일에도 무능하게 그 자리에 지켜 있을 수가 없어 어떤 형태로든지 움직이기를 소원했습니다. 드디어 강가에 있는 기도 처소를 찾아가 보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사도바울의 일반적인 선교방식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의 회당에 들르게 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회당에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게 만드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전파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예수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백성들을 이제 훈련시키고 그들과 더불어 동역하여 곳곳마다 주의 복음의 불길을 원활하게 했던 것이 사도바울의 선교전략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곳곳마다 적중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디가든지 먼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서 그 가운데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시편 138편 1절>이나 <에스라 8장15절>을 보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이 회당이 없어서 바벨론 강가에 모여서 하나님 앞에 슬피 울며 노래하며 그들의 마음을 토로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들이 마음의 아픔을 호소하는 장소가 강가의 기도 처소였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사람들은 회당을 이루지 못할 경우에 강가에다 그들의 모임처소 기도처소를
놔두고 그곳에 모여서 그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곤 합니다.
때로는 번듯한 집이 되지 못하고 그냥 노천에 드러나는 장소일 때도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바로 회당이 눈에 띄지도 않고 또 찾아 볼 수도 없어서 이러한 기도처소가 있지 않나 해서 강가로 나간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상황 속에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에는 삶의 상황이 너무나 멀다’라고 생각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궁핍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 ‘우리는 이래서 나는 아무 일도 할수 없어’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황무지에서 꽃을 피우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황무지개간을 시작하는 사람처럼 우리는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려는 사람들도 있음을 봅니다.

우리 믿음의 백성은 여건이 주어져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건을 생성하고 그
여건을 가꾸고 만들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의 무리는 이제
혹시라도 유대인들을 만나고 기도 처소에 나오는 경건한 사람들이 있을까 하여 강가에 나가
던 중에 강가에서 한 무리를 발견하는데 그것은 여인들의 무리였던 것입니다.
당시 여인들은 사회적으로 대단히 비난한 위치에 있었던 것을 봅니다.
사도바울이 전에 기도할 때 뭐라 기도했냐면 “하나님 내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 합니다”이렇게 기도 했어요. 대사도가. 그러니 그 당시의 여자들의 위치가 어떠했겠습니까? 그런데 나중에 사도바울이 자기생각이 틀린걸 알죠.
“남자나 여자나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다 같다”라고 얘기하죠. 사도바울이 은혜를 받고 보니까 나중에 자기가 여자들에 대한 이런 비하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주의적 사고가 그릇됐다’라는 것을 깨닫고 그가 이와 같이 고백하고 있는 거죠. 남자들도 하나도 없어요. 그 가운데서 여자만 몇 명 옹기종기 모여서 이들이 기도처소로 삼고 있는데 바로 사도바울이 그 모임을 만났다 이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10명만 모이면 회당을 만들었습니다. 회당을 건립을 했어요. 그런데 어디 가서 유대인 사람들 10명도 못 만나는 이와 같은 복음이 척박한 황무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 당시에는 참 어려운 계급에 있었던 여자들 몇이 모여서 이와 같이 옹기종기 기도처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13절>을 보니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라 하고 말씀을 시작합니다. 사도바울은 낙심하지 않았어요. 그들을 본 것이 아니라 그들 뒤에 있는 예수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스데반이 돌로 침을 당하는 순간 스데반은 돌로 치는 사람을 본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뒤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바라봤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여인들의 무리가운데 초라한 사람의 행색을 본 것이 아니라 빌립보 성과 마게도니아와 온 유럽일대를 바라보게 되었고 그 여인들을 상대로 그 일을 시작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참 답답한 상황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한 여인과 만나서 대화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정말 너무나 처참한 사람이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으나 사람들에게 아무도 내 남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매우 문란하고 어려운 일을 하고 있었던 여인이죠. 그런데 이 여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땡볕 뜨거운 팔레스타인의 대낮에 물을 길으러 왔단 말이예요. 그런데 그 여자보고 “나 물 한잔만 주십시요” 라고 얘기하니까 그 여인 이 무어라고 얘기했냐면 “유대인들은 우리 사마리아사람을 개같이 여기더니 목이 마르니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쏘아붙이면서 그의 마음에 있었던 울분을 오히려 예수님께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다 받아주고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영원한 생명과 생수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여인은 처음에 깨닫지 못하지만 집요하게 설득하고 가르치고 천국의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결국 그 여인은 변화를 받아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입니까? 이 한 여인이 물 길으러 왔던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가서 사람들을 다 데려와 예수님 앞에 서게 하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이 다 회개하여 은혜를 받게 되는 장면입니다.
이 보잘 것 없는 한 여인에게 전한 말씀이 결국 동네 온 사람들을 구원하게 되는 역사로 나아가 발전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것을 보게 되면 정말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 않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룬 최선을 다한 아름다운 은혜의 역사를 봅니다.

안드레가 데려왔던 작은 소년의 손에는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가 들려져 있어요. 날마다 그림 보면 물고기 두 마리가 아주 말라비틀어진 아주 작은 물고기로 보이구요, 떡 다섯 개도 보리떡 변변치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목사가 이런 생각을 해서 잘못됐는지는 모르지만 전 좀 관심이 많아요.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이 손에서 축사하고 떼어서 주셨다고 하는데 간절히 기도하고 주셨을 때 어떤 떡이 나왔고, 어떤 물고기가 나왔을까, 바짝 말린 물고기면 나눠주는 물고기도 그런 걸까, 예를 들면 꽁치를 가지고 떼면 꽁치가 나올까, 조기가 나올까, 이런 식의 생각이 된단 말이예요. 제가 생각을 했는데 예수님이 아무리 바짝 말린 그와 같은 맛없는 생선이라도 예수님이 떼어주신 것은 맛 좋을 것 같아요. 먹어본 사람 없죠? 그럼, 그렇게 믿읍시다. "아멘" 하는 사람은 특별히 괜찮네요.

그런데 안드레가 그 어린 소년을 데리고 나왔을 때 그 어린 소년의 손에는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이 들려있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보고 실망하지 않았어요. 이왕 조금 가져와도 확실하게 좋은 것 가지고 왔으면 좋은 것 주시지 않느냐 하시지 않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축사하시고 그것을 가지고 떼어 줄 때 오천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는 큰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기적은 뭐죠? 그 2000년 전의 그 이야기가 20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우리의 입술에도 회자되고 있다는 것이예요. 지구에 사는 인구가 약 60억 정도가 되는데 수많은 세대 속에서 도대체 도합 하면 몇 명이나 그 이야기를 들었을 것 같아요? 아마 수백억의 인구가 그 이야기를 듣고 살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나아만은 지극히 작은 계집종 아이의 말 한마디 흘리지 않고 잘 챙김으로 말미암아 그의 문둥병 환자 된 것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부고, 당시 세리고, 또 당시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런 특별한 일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의 혼신의 힘을 쏟아 부으셨고 그들을 양육한 결과 그들에게 자신을 헌신함으로 말미암아 오직 그들이 하나님 앞에 우뚝 세워졌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그들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주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천국의 복음을 선포했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온 세계 땅 끝까지 가서 주의 복음을 전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들을 통해서 작은 또 무식한 어리석은 사람들의 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중에 입게 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제가 목사로서 제일 기쁜 일 중의 하나는 바로 개업예배를 드리러 가는 건데요, 대부분 개업예배를 드리러 가면 조그만 사무실에 책상 몇 개 놓고, 전화기 몇 대 갖다 놓고, 혹시 직원 한두 명 있고 그 다음에 빈 책상들도 가지고 있죠. 그리고 “잘되면 저 책상에 다 자리 찰 겁니다” 하고 말씀드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주 초라한 행색이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작은 씨앗 하나를 심을 때 작은 씨앗이 아니라, 그 씨앗이 품고 있는 생명의 존엄(?)을 알게 됩니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자라면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으며 그것이 자라서 마침내 거대한 수목과 장대한 숲을 이루게 될 것이다라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역사는 놀라운 은혜의 체험을 통하여 이와 같이 열정을 가지고 찾아 나서서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임을 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일의 열정을 가지고 찾아 나서면 반드시 사람을 만나게 되고 또 그 일을 하게 됩니다. 다만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감당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일을 진행할 때 쉽게 그 일이 이루어 질리는 없어요. 세상에 쉽게 그 일을 해서 어려운 일을 얻을 수 있는 것, 좋은 일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가 심은 만큼 거두게 되니까 우리가 고통스럽고 어렵고 힘든 만큼 그 일을 감당하면 그 대신 우리에게 그만큼 기쁘고 감사한 일들이 열매 맺혀지는 것이지요. 자꾸 중단하고 싶은 어려움 속에서도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갈 때, 결국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그 모든 일을 완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믿음의 백성으로서 우리의 삶을 시작했으면 마지막까지 그 일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사도바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그만 두지 않고 무엇인가를 찾아 나섰고, 정말 실망된 상황에서 오히려 소망을 보았고, 그 가운데 사람을 만나 세우고 결국 그를 통하여 주의 역사를 이루어갔던 것을 봅니다. 정말 보잘것없는 사람들 중에 루디아라는 한사람이 은혜를 받았고 결국은 루디아가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온가족이 세례를 받고 자기 집에서 유하게 하고 복음을 전하게 될 때 마침내 하나님의 역사가 유럽 전 지역에 퍼지게 되었고, 유럽을 넘어서 미주대륙으로 마침내 세계 땅 끝까지 우리에게 까지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두 번째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곳에는 주께서 마음을 열어서 말씀을 청종케 하는 역사가 있게 됩니다. <14절>을 보니 루디아라고 하는 한 여자가 있는데 이 사람은 자주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두아디라성 출신의 자주장사인데 자주장사라는 것은 조개에서 나오는 자주염료로 물들인 명주를 파는 사람입니다. 주께서 마음을 열어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를 하게 하셨고 마침내 그 말씀을 청종하게 했다고 합니다. 말씀에 순종을 이루고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루디아는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믿음의 시작입니다. <로마서 10장17절>을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합니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은 본성자체가 부패하고 악해요. 그러기 때문에 진리에 대하여 눈이 어둡고 마음이 닫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섭리하셔야만 열릴 수 있고 은혜의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이 섭리하셔야만 가능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책임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그러므로 더욱더 주님께 기도해야 된다라는 사실입니다.

제 방에 오면 <여호와여 원컨데 저희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하는 열왕기의 말씀이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이게 처음 개척하여 예배드릴 때 전의 교회에 계신 장로님이 서예를 하셨는데 저보고 시어를 하나 써주신다고 해서 제가 그 구절을 써달라고 말씀드렸거든요. 그런데 제가 15년 넘게 제 방에 걸고 있네요. 언제나 아침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저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아름다운 은혜의 세계를 보게 하시며, 또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통찰할 수 있는 은혜를 주 시고 우리 성도들의 아픈 가슴을 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의 슬픔과 눈물을 보게 하셔서 언제나 그 마음을 품고 기도하게 하소서"
하는 기도를 늘 하고는 합니다.
성도들의 마음을 볼 수 있어야 목사가 기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성도들의 눈물을 볼 수 있어야 가슴 아파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또,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은혜의 길을 보아야 더욱 더 마음의 용기를 가지고 달려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눈앞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의 모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엘리사가 있는 도단성을 아람군대가 다 에워쌌어요. 그랬더니 그 엘리사의 사환 게야시는 너무너무 두려워서 벌벌 떨어요 그랬더니 엘리사가 "여호와여 원컨데 저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하고 간청했습니다. 게야시의 눈이 떠졌어요. 그랬더니 천군과 천사들이 정말 둘러싸고 있는 아람의 군사들보다 훨씬 많게 그 성을 에워싸고 있는 거예요. 그때 게야시의 마음에 두려움이 사라졌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과 은혜를 볼 때 두려움은 사라지고, 용기가 생기고, 새로운 길이 보이고, 소망이 우리들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실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들음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는 것 매우 중요해요.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 안 된다는 것 우리 알잖아요. 열심히 하는 것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들에게 임해야 하죠. ‘너희가 일찍 일어나고 늦게 나오며 수고의 떡을 먹어도 헛되다’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결국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밭 갈고 아무리 씨 뿌려도 하나님이 햇빛과 비를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도랑에 물이 말라서 퍼올 물도 없으면 그것은 우리에게는 한계라는 말 이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주신 은혜가운데 최선을 다하되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한다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여인의 입장에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였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 했을 때 그의 눈이 열리게 되고 마음이 넓어지고 전혀 체험하지 못했던 은혜의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시편25편9절>을 보면 하나님을 공경하고 진리를 찾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기도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시며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 받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깨달을 수도, 내 마음을 열수도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은혜를 받고 헌신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 은혜 받고 헌신하죠. 상대적으로 우리가 은혜 받고 헌신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별로 이러저러한 마음에 집히는 것이 없는데,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거나, 읽고 은혜를 받거나, 마음속에 간절한 소망이 생기게 되면 우리 삶이 좀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이제 그 일에 대해 내 마음이 쓰여 내가 할일은 없는가, 전에 휴지가 한 장 떨어져도 그냥 지나쳤는데 그거 안 줏으면 가슴이 아파요. 전에는 이러저러한 일보고 내가 좀 해야 될 몫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없었는데 이제는 그런 마음이 생깁니다.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실까, 내가 주님의 일을 할 때는 가슴이 아프다 것 입니다. 은혜 받으면 헌신하게 되요. 헌신하지 못하는 것은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가슴이 풍성해지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은혜 받고 헌신하게 된 후, 가장 먼저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그 은혜의 확산 작용입니다. 여러분 ‘확산’이라는 말 알죠? 세수 대야에 스포이드로 잉크를 탁 떨어뜨리면 그 푸른 부분이 점점점 쭉쭉쭉 뻗어나가죠. 이게 바로 ‘확산’ 이란 말 이예요.
그런 것처럼 복음은 한군데 떨어진 곳에 은혜가 체험되면 그 주변으로 확산해 가는 것입니다.

<15절>보면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이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동네에 가서 사람을 데려오는 겁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보라'하고 권면하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면 무엇이든지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어요.

자 오늘도 한번 따라서 합시다. 복습 하는데요, 절대 진리의 전파 사명성, 여러분 말이 좀 어색하죠?
그래도 따라합시다. 절대 진리의 전파 사명성. 절대 진리는 전파에 대한 사명성을 부여해요. ‘이게 절대 진리다’라고 생각하면 사람은 그것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단 말이예요. 절대 진리는 그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구원의 역사가 나에게 어떤 절대적인 진리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 우리는 절대 그대로 있을 수 없단 말 이예요. 견딜 수가 없는 것 이예요. 내 마음에 불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견딜 수 있겠어요.
토해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내 마음에 기쁨이 있는데 어떻게 그 기쁨이 밖으로 흘러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뭐 물동이 이고 갈 때 물동이가 반쯤차면 그냥 가겠지만, 가득차면 결국 흘러서 이마로 얼굴로 흘러내리게 되겠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일을 좋아하게 되면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 다른 이에게 동참하기를 요청하고 또 그에게 나눠주고 싶은 거지요.
은혜를 받았으면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무엇인가 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자기 혼자는 그 일을 누리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은혜 받고 헌신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지는 일로 확장됩니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가르침받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내가 은혜 받았는가, 은혜 받지 않았는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있는가, 아닌가, 이걸 알아보는 거 간단해요 내가 한번이라도 더 나와서 말씀을
듣고 예배드리고 싶은가 내가 한 장이라도 성경을 더 읽고 싶은가 하는 것을 보면 당연해요
글쎄 모르겠어요. 이렇게 성경 열어 보는 게 일주일에 한 번씩 예배드릴 때만 열어보는 분들 있습니까?
저기는 없는 것 같네요. 일주일에 한번 예배드릴 때 열어보는 것이 아니라, 늘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사모되는 거예요. 또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가르침받기를 그렇게 원해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수련회 갔다가, 이제 소위 말하는 제 마음에 은혜를 받고 그 다음에 좀 달라지더라고요. 예배를 그렇게 참석하고 싶어요. 그래서 제가 중고등부 학생 예배에 참석하고, 그 다음에 장년 어른 예배에 참석하고, 저녁예배도 가고, 수요예배도 가고, 새벽기도까지 가게 되더라구요. 물론 방학 때하고 주일날 가는 거지요. 평일에는 학교가야 되니까 못가구요. 정말 한번이라도 더 가고 싶더라구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새벽기도를 나갔는데 그렇게 가고 싶어요.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점점 더 말씀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무어라고 이야기하는 줄 알아요? 사도바울에게 루디아가 이렇게 얘기했어요.
"만일 당신이 내가 주를 믿는 자로 알거든 우리 집에 유하시옵소서"
얼마나 무서운 말 이예요. 협박에 가깝단 말 이예요. 내 집에 꼭 좀 있어주세요. 만약에 당신이 내 집에 머문다고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나를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알겠다는 그런 얘기지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얼마나 받고 싶어 했는가 하는 거죠.

<사도행전 2장 42절>을 보면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결과적으로 무슨 일을 했죠?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썼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말씀을 가르침받기를 매우 기뻐하고 소망하는 거죠. 복음에 맛들이지 못하면 복음에 대한 갈망이 없습니다. 복음에 대하여 체험하지 못했을 때는 관심이 없고 애착도 없습니다. 마음 쏟고 깨닫고 기쁨을 느끼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점점 하나님의 말씀이 사모되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사모되고 아침에 일어나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또 내가 어떻게 하나님 말씀의 인도함을 받을까 하는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이 생깁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에 은혜를 받을 때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생기는 거예요. 성경 읽다보면 분명한건 몇 페이지에서 몇 페이지까지 읽었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데 남는 것은 하나도 없을 때가 많아요.

제가 늘 말씀드리죠. 실망하지 마세요. 성경을 오독정도 할 때까지는 내용이 잘 안 들어옵니다. 그러니 여러분 실망하지 마시고 꾸준히 보시고 기도하시고 묵상하시면 어느 순간 성경에서 한 단어들이 나타나기 시작해요. 그러다 한 구절들이 나타나구요. 단락이 나타나고 스토리가 내 마음속에 다가오게 되고 전체 구성이 마음속에 다가오는 단계가 됩니다. '성경 몇 번 읽었는데 나는 하나도 모르겠다' 전혀 실망 할 것이 안 되요. 그건 뭐 당연한 것이니까요.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시작하면 ‘성경말씀이 참 재밌다. 말씀 전하는 우리 목사님 말씀이 정말 마음에 기쁘고 감사하고 무엇인가 용기가 된다‘ 하는 것들이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게 되면 점점 더 그 말씀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은혜를 받은 루디아의 모습을 보면 대접을 하고 싶어해요. 다른 사람을 공경하고 싶어 한단 말이예요. 자기 집에 강권하여 데려다가 자기 집에서 대접을 하고 그 집에 머물라고 강권을 한단 말입니다. 이후에 루디아의 이 아름다운 태도는 빌립보교회의 전통이 되었어요. 그래서 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혔을 때 그들은 선물과 사람을 보내서 사도바울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 주었습니다. 바울이 이 아름다운 태도를 고린도교회에 추천까지 했어요.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과 기대한 마음과 귀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으면 어떻게 이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로마서 12장 13절>을 보면 크리스천의 특성은 손 대접하기를 힘쓰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9절>을 보면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서로를 대접하는 것이 아주 보편적인 정서였단 말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이 은혜 받고 사는가 ,은혜 받지 않고 사는가 하는 것 아주 간단하게 보여드리겠습니다. 자 옆의 사람 한번 보십시요. 금방 여러분들이 확인할 수 있어요.
옆의 사람 보셨습니까? 이 말도 순종하지 않는 이들이여 어찌 은혜를 받겠습니까?
자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보셨죠? 예 감사합니다.
옆의 사람을 보니까 무슨 생각이 납니까? 여러분 여기서 한가지로 간단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보실 수 있습니다.
옆의 사람 보니까 ‘내가 저사람 어떻게 잘 대접할까’ 하는 생각이 나요. ‘내가 얼마나 대접했는데 저 사람은 나한테 대접한 적도 없어’ 하고 뭔가 받고 싶은 생각이 납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옆의 사람보고 내가 오늘 점심이라도 사 줘야지, 오늘 뭐래도 잘 해줘야지 하는 생각, 내가 이제까지 한 모든 것이 부족했다 생각하고 좀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여러분 마음이 은혜로운 거예요.

그런데 '전에 내가 세 번이나 사줬는데 한 번도 안 사' 하는 이런 마음이 들면 이건 대접하려는 마음이 없는 거거든요. 여러분 우리가 누굴 대접할 때 그 사람이 받아주는 것만 해도 감사하잖아요. 안 받아주면 어떡하겠어요. 얼마나 우리 마음 상하고 우리가 얼마나 마음에 상처받겠습니까?
요즘 애들이 상당히 교만하죠? 부모가 정성스럽게 음식 만들어서 “먹어라” 하면, "안 먹어요" 그러면 이 부모가 얼마나 마음에 상처가 됩니까?

여러분 우리가 누구를 대접해 준다는 것은 내가 남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마음이 기쁜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정말 받아만 줘도 감사합니다. 자 옆의 사람에게 얘기합시다. "제가 대접하는 것 받아주시기만 해도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제발 좀 받아주세요." 예 그런 마음으로 우리 서로를 섬겨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섬겨요. 요새 제일 어려운 일이 뭐예요? 초대받아서 남의 집에 가주는 거잖아요. 그렇죠? 와주기만 해도 얼마나 감사해요 우리 구역장이나 부부구역장님들 얘기 들어보면 기껏 음식 차려놓고 다 오라고 했는데 안 왔을 때가 제일 속상하다고 해요 정말 우리가 대접하려는 마음이 있을 때 이건 참 축복이라 이 말입니다. 그저 받아주시기만 해도 감사합니다. 그 말이 우리 마음속에 있을 때 우리는 감사한 것입니다.
정말 헌신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거예요. 예사롭게 보이지 않고 '교회에 봉사할건 없나, 헌신할건 없나,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애쓸까' 하는 이런 마음들이 있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 마음이 달라지고 사람에 대한 생각들이 달라지는 겁니다.

이제 시간되어서 오늘 말씀을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회기 말이 다가오고 있는데 11월말이니까 이제 5주정도 남은 것 같아요. 참 시간 빠르죠? 여러분 작년 12월 달에 회기 시작하고 올해 연초에 올해 해야 될 일 각오 5가지 기도제목을 쓰라고 다 행하고 계시죠? 거의 완성되셨죠? 잊어버린 게 거의 완성 되요? 아니면 거의 완성된 것입니까? 벌써 이렇게 됐어요. 한 달 정도 있으면 회기가 마감되요. 회기가 마감되다 보니까 아무래도 저는 목사로서 분주해지는 것 같아요 내년도 계획에 대한 여러 가지 또 마무리를 해야 되고 또 여러 가지 이러 저러한 일을 해야 돼요. 그 가운데 하나가 뭐냐 하면 저희 교회도 교역자가 벌써 30여분 계시다 보니까 이러 저러한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서 또 임지를 옮기시거나 혹은 더 공부하기 위해서 사역을 잠시 중단하시고 계속 학업에 전념하시려는 분들이 생긴단 말이예요. 약간 명이겠지만 일부 교역자들을 보충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할 수없이 이러저러한 추천도 받고 또 이러저러한 이력서들을 많이 받아서 또 이리저리 뒤적거리고 또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귀한 분들을 청빙을 할까하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일은 한 두 해가 아니라 벌써 15년째 매년 진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희 교회는 숫자가 많다 보니까 결국 몇 사람씩은 꼭 유보가 생기거든요.

그런데 이력서를 가지고 또 이렇게 살펴보고, 그 다음에 그중에서 면접을 볼 분들을 모셔서 면접을 또 보고 정말 진이 빠질 정도로 오랜 시간 면접을 봅니다. 무엇인가 그 마음에 진실을 찾아보려고요. 뭐 이력서야 다 잘 만들어서 보낸 것 아니겠습니까. 몇 마디 물어보면 다 좋은 말씀하시겠죠. 어떻게 그것을 선발 할 수 있는 기준을 삼겠습니까? 그저 오랫동안 이야기하다보면 어느 날 문득, 어느 순간 문득 마음에 있는 얘기 한 두 마디 나올까 해서 이리저리 면접을 가지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 가운데 일부가 또 선출되셔서 저희 교회는 전에는 한 열흘정도였는데 이제는 일주일간 합니다. 일주일동안 같이 합숙을 하면서 이와 같이 집체 교육과정을 통해서 마지막 선발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일주일동안 하는데 굉장히 피곤한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피곤하면 사람의 모습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아주 피곤하게 모든 일을 진행하면 그 가운데 가지고 있는 본래 모습이 조금씩은 나와요. 그래서 이제 선발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런 과정을 거치며 느끼는 게 뭐냐 하면 저 뿐만 아니라 같이 이 일을 진행하면 저희 동역자 모든 분들이 느끼는 거예요.

첫째, 이력서 볼 때 다르고, 면접 볼 때 다르고, 집체 교육할 때 다르고, 와서 사역할 때 다르고, 또 시간이 갈 때 달라요. 결론은 사람은 모르겠다는 겁니다. 사람은 모르겠다는 거예요. 이력서 보고 사람 못 고르겠더라구요.
뭐 괜찮은 것 같은데 면접해보면 이게 또 아니거든요. 면접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게 뭐예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매너나 어투나 이런 걸 통해서 가지고 있는 성품의 일부를 본단 말 이예요. 그것도 짧은 시간에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일주일동안 보는데 일주일동안 봐서 그것도 이러저러한 평가를 할 수 있는데 실제로 와서 사역을 하는걸 보면 또 달라요. 그런데 그게 시간이 지나면 또 달라지더라구요. 그러니까 사역을 하면서 느끼게 되는 게 뭐냐 하면 우리는 정말 사람 잘 모르겠더라구요. 하나님이 그 모든 일을 역사하시는 거지 사람은 정말 모르겠다라는 것입니다. 이건 저뿐이 아니라 세상에서 일하시는 여러분 모두 다 똑같은 생각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정말 성품이 중요하고 마음의 각오와 노력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생각들을 해봅니다. 좀 교만한 이들은 결국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겸손한 이들은 계속 발전하는 것 같습니다. 노력하는 이들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 현재와 현격한 차이가 나게 됩니다. 별것 아닌 것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분은 시간가면 제자리걸음이나 뒤로 물러서지요.

겸손한 성품, 노력하는 모습들 두고 일정한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은 현재의 질서를 현격하게 바꾸어 버립니다. 현재의 질서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 노력과 겸손한 마음, 그리고 무엇인가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과 그리고 삶의 실제적인 행위들은 현재의 질서를 바꾸는 거예요. 언제든지 개편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고정된 것을 보지 않죠. 교회에서도 사람을 선발하는데 기준이 있어요. 절대 지금의 상태가 어떤가를 보고 선발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상태보다는 이분이 앞으로 이러저러한 교육의 과정이 주어 질 텐데 그 교육의 과정을 마쳤을 때 어떠한 상태가 될 것인가 하는 미래에 대한 예상을 보고 어떤 일을 하지 지금의 상태를 보고 선발하지 않아요. 제가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을 하다 보니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어떤 눈으로 보실까 하는 거예요. 지금 내 모습이 어떻다 이것가지고 하나님이 평가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해서 어떤 모습으로 되어 질까 하는 미래의 모습들을 생각하면서 우리를 평가하시고 우리에게 어떤 일을 맡기시고 시도하시는 것 같아요. 지금의 내 모습은 부족해도, 지금의 내 모습은 여러 가지 자격구비여건이 안 되는 것 같아도 그래도 충분한 가능성이 있고 그 마음의 열정이 있고 노력에 대한 의지가 있고 또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삶의 성실이 있고 겸비하고 또 일정한 시간 뒤에도 그가 더욱 더 발전할 계획과 과정이 있으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좋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거지요. 하나님도 우리에 대해서 그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지금 부족해도 괜찮아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겸비한 마음으로 발전과 진보를 위해서 우리는 애를 쓰고 또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마음, 이 솔직과 진실은 차이가 있죠? 그저 내 감정에 솔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심에 대한 진실함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귀한 역사에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을 품고 우리 삶의 환경에서 무엇인가 시도해야 합니다. 사람을 세우고 믿음의 동역자를 만나고 만들어야 돼요. 왜 내 곁에 사람이 없을까?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예요. 사람을 세우는 수고를 게을리 했기 때문에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겁니다. 왜 나는 인복이 없어 인복이 없는 게 아니라 내 주변에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그만큼 애를 쓴 흔적들이 부족 한 거죠.

그럼으로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시작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을 만나고 세워서 믿음의 동역자로 세우는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청종하는 역사가 수시로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헌신의 역사가 수시로 있어져야 합니다. 이전의 헌신이 전혀 생각나지 않을 만큼 우리의 헌신의 정도는 날마다 발전해야하고 우리의 헌신은 날마다 현재도 이루어지는 진행형이어야 해요. 헌신이라는 것은 과거를 추억하는 것이 헌신이 아니예요.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진행형이어야 합니다. 과거에 헌신한 것을 잊어버릴 만큼 지금도 뜨거운 헌신이 진행되고 있는 이와 같은 진행형이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져 큰 은혜의 역사가 있어지는 곳에 있는 이와 같은 일들이 우리에게 있어져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체험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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