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사람의 선택
본문
눅23:39-43
광고회사 카피 중에 이런 광고가 있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광고문구입
니다.
잘 모르는 초행길에 운전을 하고 가다보면 종종 삼거리를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측으
로 가야하나 좌측으로 가야하나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다행히
길을 알려줄 만한 사람을 만나면 감사하지요. 잘 알고 가르쳐주는 사람도 있지만 잘 모르고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화가 납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우리는 선택해야 한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책임도 우리가 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자의든 타의든 우리
는 우리의 선택에 대해 분명한 책임과 대가를 치루어야 하고 타의에 의한 선택이라 해도 그
선택의 책임이 감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삶 가운데서 종종 삼거리를 만나게 됩니다.
삶 가운데 만나는 삼거리는 한번도 살아보지 않았는데도 선택해야 한다는데 어려움이 있습
니다. 학교를 선택한다든지 친구를 선택해야 한다든지 베우자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아파트냐 단독주택이냐 이런 것 까지 말입니다. 인생의 선배들이나 전문가들의 도움
을 받기는 하지만 결국 선택의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이 많은 선택들이 때론 기쁨과 감
사의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 결과가 아픔과 눈물, 불행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우
선은 좋은데 우선은 괜찮은데 나중이 문제입니다. 사업을 하나 전공을 선택함에 있어서도
감사나 후회에 대한 결과는 꼭 있습니다. 결혼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때마다 궁금한 것은
이런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역할을 하실까? 입니다. “하나님 허락 없이는 되는 일
이 없다 했는데...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
나님이시라 했는데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신데... 이런 말씀들 속에서 우리는 때론
유혹을 받곤 합니다. 하나님을 핑계하고 싶은 것입니다. 마치 “우리를 죽일려 광야에 데리
고 나왔느냐”모세에게 원망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입니다. 모든 상황에 대해 내
문제로 보기보다는 하나님을 핑계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그릇을 만들 권세도 작
은 그릇을 만들 권세도 있다면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에 대해 반문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사람들이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 그릇이 작다고 운명론자들
처럼 탄식만 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일단은 많은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어떠한 역할들을 하시는지?
하나님이 주신 자유 의지와 나의 선택
하나님은 에덴동산의 아담에게 생명나무과실과 선악과를 주셨습니다. 비율로 보면 전체는
생명나무과실이자 선악과는 중앙에 한그루의 나무입니다. 그리고 경고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그러나 아담은 선악과를 선택하여 인류의 죄가 시작되었습니다. 여기
서 사람들은 질문을 합니다.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들어서 죄가 시작되도록 하셨는지에
말입니다. 하나님은 오해를 받으면서도 아담을 그냥 두셨습니다. 단지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
냐? 기회를 주셨을 뿐입니다. 아벨과 가인은 둘 다 아담의 아들들입니다. 그러나 아벨은 하
나님을 택합니다. 가인은 불성실과 함께 살인을 택합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말리지 않고 그
냥 버려두십니다. 다만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시고 대답할 기회를 주셨을
뿐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에 의하여 수많은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더 좋은 친구들에 대하여 멀리할 수도 있고 가까이 할 수도 있습니다. 빚을 내어 더 좋은
주택을 구입하던지 아니면 지금의 울타리안에서 겸손하게 살던지 선택의 책임은 당사자에게
있습니다. 배우자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이 사람입니까 저 사람입니까? 우리는 이런 식으로
질문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자신을 보고 선택하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본능적으로 정해주셨다
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니면 의지적으로 선택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 좋을까요? 하나님은
너의 결정을 축복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책임은 자기가 지라는 것입니다. 직업
도 핑계마십시오.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를 위하여 특별한 간섭으로 병치레
를 하는 수도 있으나 건강에 대한 책임도 자신에게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건강을 관리할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간섭을 안하시듯 그리고 참견을 안
하시듯 그냥 두십니다. 오해를 받으면서까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선택의 결과는 그리고 선택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의 삶의 모습은 사실 수많은 선택의 열매들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시요. 지금이 결과가 아니요,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결과를 가
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끌어
가십니다.
신앙에 대한 우리의 선택과 책임
삶에 대한 선택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또한 우리들의 선택에서 좌우됩니다. 우리는 신앙의
집을 반석위에 지을 수도 있고 모래위에 지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말씀은 어떤 것이 지혜
롭고 미련한 것인지 경고 하셨을 뿐입니다. 선택은 내가 하고 책임도 자신에게 있는 것입
니다. 두 주인이 있으니 하나님을 섬길 수도 있고 재물을 섬길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좋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대부분 좋아하는 것과 선택은 다릅니다.
그러나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왜냐하면 좋아하지 않은 것을 선택하는 경우는 아
주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의 결과에 따라 그 사람의 생각과 의지가 보여집니다.
마7:13-14절은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갈 것인지 넓은 문으로 갈 것인지에 대해 선택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안에서 양처럼 신앙생활 할 수도 있고 염소처럼 신앙생활 할 수도 있
습니다. 다만 염소는 영벌에 양에 속한 의인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는 경고만을 주셨을 뿐입
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철저히 선택권을 주시며 그 선택의 결과도 주십니다. 신명기 28장
을 우리는 축복장이라 합니다. 1-14절까지는 순종하는 자가 받을 복에 대하여 15-68절까지
는 불순종하는 자가 받을 저주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도 이렇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사울에게서 벗어나는 것만이 목적
이라면 죽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안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로 드려진
삶을 살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원하심과 바라심대로 그는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선택
의 문제입니다.
지금의 삶은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닌 바로 내 자신의 선택의 결과요 대가라는 것입니다. 그
러나 이제라도 늦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강도의 인생도 강도의 선택에 따라 바꾸신 분
입니다.
구원은 은혜인데 선택이라뇨? 구원이 선택의 문제인가? 장로교 목사여서가 아니라 저는 하
나님의 은혜를 아는 목사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목회자입니다. 예를들
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만약 구원의 비가 내린다 칠 때 그릇으로 받으면 은혜이고 구원이
지만 그릇을 뒤집어 안 받으면 구원의 비가 안 내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자신이 거부한 것
입니까? 위에서 보면 장로교의 입장이고 아래에서 보면 감리교의 입장입니다. 둘 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절대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
씀드리지만 지금의 삶은 우리의 선택의 결과들이라고 말입니다. 가장 극적인 순간에 한번의
선택으로 한 강도는 은혜를 입고 구원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천국을 소유한자가 되었습니다.
어설픈 논리로 핑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선택하라 하지 않으셨습
니다. 분명 선택의 결과에 대해 말씀하셨고 그리고 선택에 대한 것에 자유를 주셨습니다. 노
아홍수의 기회도 120년이라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위에 박혀진 죄패에 3개의 언어로
적혔습니다. 헬라어 그리고 히브리어 그리고 라틴어입니다. 헬라어는 문화이고 히브리어는
종교이고 라틴어는 정치 법률입니다. 모두 보게 모두에게 해당되게 모두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기회를 주셨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그리
고 예배할 수 있도록 수없이 많은 전도자들을 통해 복음의 소식을 듣게 하셨습니다.
결단하십시오. 이 땅이 아니라 영원을 결정짓는 놀라운 선택을 말입니다.
출처/유재명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