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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증인(4) (행1:15상-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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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증인(4) (행1:15상-20)





창1:1 말씀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온 세상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시고 섭리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어나가실 때, 자의적으로 하시지 않고 사람을 통해서 그 뜻하신 바를 이루어나가기를 기뻐하십니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했을 때을 생각해봅시다. 갑자기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앞에 거대한 홍해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 만물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시기 때문에, 그때 큰 동풍으로 홍해가 갈라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걸어서 건너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그냥 자의적으로 동풍을 일으키시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라는 사람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출14:21입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또 기드온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을 때를 생각해봅시다. 미디안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습니다. 그때 기드온의 병사들은 전투에 나가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삿7:20입니다.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하고.”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디안을 맞아 싸우면서 그렇게 외쳤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미디안을 무찌르시되, 기드온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그 뜻을 이루어나가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섭리하시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자신이 뜻하신 바를 이루어나가시고, 또 사람을 통해서 자신이 목적하신 바를 성취해나가십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복음전파 사역을 위해 여러 제자들 가운데서 특별히 12명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에 예수님의 뒤를 이어서 복음전파의 사역을 계속해서 담당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눅6:13입니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열두 명의 사도를 택하여 세우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요15:16 상반부의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상기시켜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그러면서 예수님은 마19:28에서 그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그런데 예수님이 세우신 열두 사도들 가운데 하나였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서는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제 곳으로 갔습니다. 따라서 그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열두 보좌에 앉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도들의 수는 열 한 명뿐입니다. 열두 보좌에 앉기에는 한 명이 부족합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인 일백이십 명 가운데는 분명 여기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열 한 명의 사도들만 남았는데, 마19:28에서 예수님이 약속하신 말씀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의구심을 일소하기 위해서 쓰임 받은 인물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베드로였습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처럼 악한 일에 쓰임을 받지 말고,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처럼 늘 귀하게 쓰임을 받기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재기하는 베드로의 모습입니다(행1:15하-17).

둘째, 가룟 유다의 최후에 대한 누가의 설명입니다(행1:18-19).

셋째, 베드로가 인용하고 있는 구약성경의 예언들입니다(행1:20).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차례대로 살펴보면서, 우리 모두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기 원합니다.




첫째로, 재기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살펴봅니다(행1:15하-17).




15절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그 때에”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에 따라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고 있을 때를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나서 오순절을 기해 성령님이 오시기까지 그 한 주간 사이에 되어진 일을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성령님의 감동하심에 따라 형제들 가운데서 일어섰습니다. 형제들을 굳세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눅22:31-32에서 베드로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새벽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서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요21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사랑하느냐고 세 번을 물어보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금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고 실패할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처럼 회개하고 다시금 회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가룟 유다처럼 끝끝내 회개하지 않다가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비록 베드로처럼 실수를 행했다 하더라도, 회개하고 다시금 회복이 되어서 더 귀하게 쓰임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에게는 그가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게 해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형제들을 굳게 했습니까? 오늘 본문 16절입니다.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하셨던 말씀 그대로,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인 일백이십 명의 사람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을 말씀으로 굳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 16절에 나타난 그의 말을 통해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성령께서 말하는 자의 입을 의탁하시고 글쓰는 자의 손을 의탁하셔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성경이라는 사실입니다. 뒤에 베드로는 벧후1:21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딤후3:16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모든 성경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히4:12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늘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며, 험한 세파에서 우리를 붙들어주시고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둘째, 가룟 유다의 배신 행위도 성경 말씀의 성취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가룟 유다의 배신 행위는 성경에 기록된 예언이기에 그대로 성취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한 마디도 빠짐없이 그대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예수님도 마5:18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면 가룟 유다의 배신 행위에 대한 예언은 성경 말씀 어디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베드로는 이것을 오늘 본문 20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의 배신 행위가 이미 성경에 예언된 것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가룟 유다를 시켜서 예수님을 배신하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게 그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가룟 유다의 배신 행위가 하나님의 뜻을 꺾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가룟 유다의 악한 행위까지도 이용하셔서 하나님이 뜻하시고 목적하신 바를 이루어나가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11:49-52 말씀입니다.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하나님은 사악한 대제사장 가야바를 사용하셔서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말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신실한 종들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실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악한 자들의 행위까지도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나가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룟 유다는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하는 일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악한 일에 길잡이 역할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처럼 나쁜 일, 악한 일의 길잡이로 쓰임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처럼 형제들을 굳게 하며 사람들을 생명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귀한 일에 쓰임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직무 곧 사역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였습니다. 예컨대 마10:1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도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어디 그뿐이었습니까? 요13:29 말씀입니다.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마태와 같은 세리 출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 출신 마태에게 돈궤를 맡기지 아니하시고 가룟 유다에게 그것을 맡기셨습니다. 그만큼 가룟 유다는 제자들 가운데서도 중요한 직무를 맡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가룟 유다는 자기의 직무를 이용해 나쁜 일을 했습니다. 요12:6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예수님이 베다니에 가셨을 때입니다. 그때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가룟 유다는 화를 내었습니다. 그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그렇게 말한 것은 그가 돈궤를 맡았기에 그 가운데 일부를 자기가 착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더니 결국 가룟 유다는 예수님까지도 배신하고서 예수님을 은 삽십에 팔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여러 번 계속해서 주셨습니다. 마26:21입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그 때 가룟 유다는 마치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주여, 내니이까?”하고 물었습니다. 또 마26:23입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예수님은 다시 한번 가룟 유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룟 유다는 회개하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마26:25입니다.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그런데도 가룟 유다는 끝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은 죄가 많기 때문에 용서함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용서함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거부하기 때문에 용서함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처럼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은 비참한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멸망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죄 값을 자기가 다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회개합시다. 베드로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도 용서하십니다. 베드로를 회복시키시고 다시금 그를 귀하게 사용하신 예수님은 우리도 회복시키시고 우리를 이전보다 더 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가룟 유다의 최후에 대해서 누가가 설명한 내용을 살펴봅니다(행1:18-19).




우리말 성경은 오늘 본문 18절과 19절을 괄호 속에 담고 있습니다. 우선 18-19절을 읽어봅니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 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우리말 성경이 이 부분의 말씀을 괄호 속에 넣고 있는 것은 이 부분이 베드로에 의해서 전해진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의 말씀은 베드로의 설교 도중에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가룟 유다의 비참한 최후에 대해서 덧붙이고 있는 설명이기 때문에, 중간에 삽입이 되었다는 뜻으로 괄호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아겔다마”라는 아람어가 나옵니다. 그 당시 아람어는 유대인들 사이에 사용되던 본 방언이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이 말씀을 했다면, 베드로는 이 말씀을 따로 번역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다 아람어를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이 말씀은 베드로가 한 말씀이 아니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설명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본 방언인 아람어로 된 “아겔다마”라는 말을 쓰고 난 뒤에, 이를 데오빌로와 같이 아람어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피밭”이라고 번역을 달아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의 최후에 대해서는 신약성경 두 곳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행1:18-19 말씀과 마27:3-8 말씀입니다. 마27:3-8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3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이들 두 곳에 있는 말씀들을 종합해서 가룟 유다의 죽음을 순서적으로 살펴보면 이렇게 됩니다.

(1) 그는 은 삼십에 예수님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은 삼십이 어느 정도의 돈인 줄 아십니까? 출21:32 말씀입니다.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에 맞아 죽을지니라.”




소가 다른 사람의 노예를 받아서 죽였을 때, 소의 임자는 은 삼십 세겔을 그 노예의 주인에게 배상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노예 한 사람의 값어치에 불과한 돈으로 거래가 된 것입니다.

(2)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정죄됨을 보고 뉘우쳤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후7:10에 기록된 것과 같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는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무죄한 피를 팔았다는 죄책감이었을 뿐입니다.

(3) 그는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었습니다.

(4) 그들이 그 돈을 도로 받기를 거부하자 가룟 유다는 그 돈을 성소에 던졌습니다.

(5) 그는 그 길로 자기 스스로 목을 매달았습니다. 아마도 그는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기들론 골짜기에 있는 나무 가지에 자기의 목을 매달았을 것입니다.

(6) 그때 노끈이 풀어졌든지, 또는 그의 목을 매단 나뭇가지가 부러졌든지 그의 몸은 계곡 아래로 곤두박질했습니다.

(7) 땅에 떨어진 그의 몸은 배가 터지고 창자가 다 흘러나왔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알 정도로 끔찍한 죽음이었습니다.

(8) 한편 대제사장들은 가룟 유다가 반납한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샀습니다. 아마도 그 땅에 있는 진흙은 토기를 만드는데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9) 그들은 그 밭을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습니다.

(10) 사람들은 그 밭을 “아겔다마”라고 불렀습니다. 피밭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그 밭이 가룟 유다가 판 예수님의 무죄한 피 값으로 산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가룟 유다는 갈릴리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의 이름에 붙어 있는 지명 그대로 유다 남방의 그리욧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그 멀리서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의 제자가 될 만큼 열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제자들 가운데서 돈궤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이 땅에서 그의 삶은 아겔다마로 끝났습니다. 그는 영원한 멸망의 자식이 되어 흑암 속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악인이 잠시 동안은 형통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비참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많든지 적든지 간에, 결코 아겔다마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가룟 유다처럼 불의한 재물을 탐하다가 아겔다마로 끝나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골고다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골고다의 길, 십자가의 길이 결국은 생명의 길이요, 영생의 길이요, 축복의 길이요, 승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아겔다마의 삶이 아니라 골고다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셋째로, 베드로가 인용하고 있는 구약성경의 예언들에 대해서 살펴봅니다(행1:20).




오늘 본문 20절입니다.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베드로는 여기서 구약성경 시편의 두 곳을 자유롭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두 편 모두 다윗의 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늘 본문 16절에서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가룟 유다에 대해서 미리 말씀하셨다고 밝혔습니다.

오늘 본문 20절 전반부는 시69:25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악인이 자기의 거처에서 제거되기를 바라는 간구입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가룟 유다에 적용을 시켜서 가룟 유다가 자기의 직분에서 제거될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 20절 하반부의 말씀은 시109:8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악인이 얼른 제거되어 그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취하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베드로는 또한 이 말씀을 가룟 유다에게 적용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베드로는 가룟 유다로 인해서 비게 된 사도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계승하는 일에 대한 근거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근거로 들어서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밝혔습니다. 첫째,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성경에 예언 된 사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가룟 유다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취하는 것도 역시 성경에 예언된 것이기 때문에 가룟 유다로 인해서 부족해진 열두 사도의 수를 다른 사람으로 대신 채워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죽었다는 그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사도의 수를 보충해야 하는 것이었습니까?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컨대 행12:1-2입니다.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열두 사도들 가운데 야고보가 제일 먼저 순교했습니다. 그러면 그가 죽고 난 뒤에 다른 사람이 그를 대신해서 사도로 세움을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비록 야고보는 죽었더라도, 그는 그대로 사도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는 열두 보좌 가운데 한 보좌에 앉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달랐습니다. 그는 열두 보좌에 앉을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사도로 세움을 입어야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룟 유다는 삼 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의 빛을 받으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열 두 보좌 가운데 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삶은 너무나도 불행하고 비참하게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를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26:24 말씀입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가룟 유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했던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단 한 사람도 가룟 유다와 같이 악한 일에 쓰임을 받다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한 삶이 되어서는 결코, 결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비록 베드로처럼 우리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믿고 우리의 잘못을 회개합시다. 그리함으로서 우리도 베드로처럼 회복이 되고 더 귀한 일에 쓰임을 받다가 주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날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재기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행1:15하-17).

둘째, 가룟 유다의 최후에 대한 누가의 설명을 살펴보았습니다(행1:18-19).

셋째, 베드로가 인용하고 있는 구약성경의 예언들을 살펴보았습니다(행1:20).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직분을 소중히 여기고 충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맡은 직분에 충성하지 않으면 타인이 우리의 직분을 취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에서도 이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25:28-30입니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직분을 맡기셨든지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충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예수님의 증인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복음전파의 사명이 있습니다. 이 사명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일에 우리 모두가 충성해서 우리가 예수님 앞에 서는 날, 우리 모두 생명의 면류관을 받기 바랍니다.

왜 가룟 유다가 구원을 못 받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습니까? 궁극적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거부하느냐, 이 한 가지 사실에 따라서 결정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어수선합니다. 불안합니다. 이럴수록 우리는 더욱 더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보면, 다음에 믿겠다고 결정을 미루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우리가 깨우쳐 줄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언제 우리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될는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일단 죽고 나면 그 뒤에는 전혀 돌이킬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히9:27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고 나면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때는 영원한 운명이 결정됩니다. 그때는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이 순간에 영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울러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도 뒤로 미룰 수 없는 것입니다.

10월 29일은 총동원 전도주일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을 하나님의 교회로 초청합시다. 그 초청은 우리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일로 간주될 것입니다. 한 성도가 다섯 명 이상씩 초청합시다. 그리해서 교회가 목표로 세운 5천 명의 초청이 달성이 되고, 아울러 “내 집을 채우라”는 하나님의 명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그날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상훈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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