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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현 목사 [성경본문] 왕상19:1-8
왕상 19:1-8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특징 중에 하나가<탈진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대는 살아 보고자하는 의욕이 사라져 버렸고 살아가려고 해도 도저히 용기와 소망이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갑니다. 도덕도, 윤리도, 가정도, 직업도, 사업도, 기업도....심지어는 인간성마저도 희미해져 가는 심각한 이<탈진의 시대>에 우리가 서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희망지수가 얼마냐 하면 100을 기준으로 62정도라고 합니다. 현실이 이렇다보니까 교인들조차도 살아가는 모습이 무척이나 힘에 겹습니다. 심방을 하거나 전화통화를 하는 가운데 몹시 힘겨워하는 성도들을 대하면 여간 가슴 아픈 게 아닙니다. 그런데 가슴이 더욱 아픈 것은 육신적인 삶이 고단하다보니까 그것이 영적인 침체에까지 이어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힘에 겨운 모습들을 자주 대할 때입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성경에도 보면 믿음의 영웅들도 곧 잘 탈진에 빠지곤 했는데 왜 우린들 그렇지 않겠습니까?[모세]가 그랬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육신 적인 욕구에만 집착하여 출애굽의 진정한 의미를 망각하고 불평하는 가운데 모세의 인간적인 고뇌가 묻어나오는 부분을 보면 그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모세의 괴로움이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단순히“하나님, 골치가 아픕니다. 일이 귀찮습니다. 짜증납니다. 사람들이 싫습니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죽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죽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가 지고 있는 짐이 얼마나 컸으면 이랬겠습니까? 시편102:3-7에 보면[시편기자]에게도 이런 아픔이 있었습니다.“흩어져 버리는 연기처럼 이 몸이 살아갈 날이 사라집니다. 내 뼈가 냉과리(덜 구워져서 피울 때 연기와 냄새가 나는 숯)처럼 타들어 갑니다. 베어 놓은 풀과 같이 시들어 버린 이 마음 입맛조차 잃어버렸습니다. 탄식 소리 그칠 길 없으니 살가죽이 뼈에 붙어 버렸습니다. 이 몸은 광야에 사는 사다 새(펠리컨)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잠 못 이루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니 지붕 위에 덩그러니 홀로 앉아 있는 외로운 새처럼 되고 말았습니다.”(현대어성경)라고 아픔을 노래합니다. [요나]역시 회개하고 돌이키는 니느웨를 보며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소리칩니다.“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욘4:8) 이렇듯 누구에게나 찾아 올 수 있는 것이 탈진입니다. 신앙의 위대한 지도자들, 영적 거장들에게도 삶의 의욕을 잃어버릴 때가 있었고 그들도 아파했고, 그들도 절망했고, 실의에 빠져 헤맸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 오늘 본문의[엘리야]도 깊은 자기탈진에 빠져 우왕좌왕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가 지금 흔들립니다. 로뎀나무 아래서 너무나도 뜻밖의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살기도 포기할 정도로 지쳐있고 소망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 400명의 아세라 선지자를 처단했던 용맹스러운 선지자가 지금 이세벨이라고 하는 한 여인의 협박에 남 왕국 최남단인 브엘세바까지 도망쳐 왔어도 모자라 죽여 달라고 하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그 정도로 탈진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결정적인 경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엘리야가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좌절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렵고 힘든 상황이 자기 앞에 펼쳐졌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앙인인 엘리야가 오늘 이 상황에서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이었겠습니까? 불신앙적인 한탄과 불만족스러운 환경과 인간적인 연약함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에게 들려주었던 하나님의 말씀들“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는 약속들을 바라보아야 했고 더군다나 방금 전에 갈멜산에서 자기에게 보여 주었던 하나님의 그 능력과 인도하심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보지 말아야 할 이세벨의 협박을 바라보고는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갈멜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스라엘에 3년간이나 계속 된 가뭄에 아합왕은 그 책임을 엘리야에게 전가하면서 핍박했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을 벌였고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비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적을 보고도 아합왕은 바알을 포기 할 의지가 없었으며 이세벨은 기가 꺾이기는커녕 두 눈을 부라리며 죽이겠노라고 합니다. 그것도 먼 훗날이 아니라“내일 이맘 때”죽이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이 협박에 그만 유감스럽게도 엘리야는 하나님대신 악녀의 얼굴만 보고 겁에 질려 줄행랑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최남단 브엘세바까지 도망 와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혼자서 더 깊숙한 광야로 또 들어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더 우스운 것은“자기의 생명을 위하여”도망 쳤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죽을까봐 겁나서 그랬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끝까지 생명을 위해 뛸 일이지 왜 이제 와서 죽여 달라는 건 또 무엇입니까? 조금 전에 자기의 생명을 걸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대결해서 이기고 건진 생명, 그 생명이 살기 위해 곧 바로 그 날, 그것도 몇 시간 뒤에 도망쳐 온 사람이 이제 와서 죽여 달라니 뭔가 모순이라도 이만 저만 모순이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에 엘리야가 죽었으면 벌써 죽었어야 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하나님이 자기 생명을 지켜 주셨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들을 통해서 먹여 주시며, 아합의 수색대들로부터 숨기시며, 심지어 바알의 본토인 시돈 땅에서까지 사르밧 과부의 집에 숨기시고 오래 보호해 주셨음을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시대가 어렵습니다. 먹고살기 어렵고, 일하기가 힘들고, 돈벌기가 쉽지 않은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로 이 때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왜 이 상황 앞에서 깊은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죽겠다고 엘리야처럼 푸념만 합니까? 오늘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자주 십자가의 승리를 내 던지고 주님의 얼굴을 외면한 채 도망쳐 버리는지 모릅니다. 갈망했던 일에 약간의 차질만 생겨도 당황하며, 고난의 조짐이 조금만 비쳐도 무서워하기 일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에 지금까지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바라보는 눈이 선명하지 못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신앙적 시야가 흐려져 있을 때 무슨 걱정을 합니까? 2절 말씀처럼“내일 이맘 때”에 있을 일을 염려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아침에는 갈멜산의 정상으로 올라갔다가도 저녁이 되면 브엘세바 사막의 내리막길로 치닫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허점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문제는 갈멜산의 체험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체험이 없어서 주저앉고, 그 체험이 없어서 쉽게 좌절하고 낙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우리 모두에게는 갈멜산의 체험은 있습니다. 어려움 가운데서 승리하게 해주셨고 맨 손으로 태어나서 비를 피하고 바람을 막을 수 있는 단칸방이라도 있다는 것이 분명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게 갈멜산의 체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체험이 갈멜산에 있을 때는 모르겠는데 이스르엘 평지, 그것도 로뎀나무 아래에 있을 때 묘하게도 기억이 나지 않아서“죽고 싶다.”는 푸념만 늘어놓는 것이 우리의 문제요, 엘리야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도망치고 싶고 때로는 살기 싫으니까“죽었으면 딱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며 살아갑니다. 보세요, 이세벨에게 죽을까봐 생명을 위해 도망친 자가“살려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죽여 달라.”고 합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애완용 거북이를 키우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연못에 죽은 듯이 가만히 누워있는 거북이를 발견한 소년이 엉엉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도무지 그칠 줄을 모릅니다. 이 모습을 보던 아빠가 아들을 달래봅니다.“울지 말아라. 우리가 거북이를 위해 멋진 장례식을 치러 주자. 관을 만들고 그 안에 비단을 쫙 깔아주고 장의사를 불러다가 묘비도 만들고 거북이의 이름도 적어주자. 그런 다음에 매일같이 그 무덤에 싱그러운 꽃을 갖다놓고 무덤 주위에는 작은 말뚝으로 하얗게 울타리도 만들자. 그리고 늙은 거북이 보다는 새 거북이를 연못에 키우자”그 말에 아이는 눈물을 그쳤고 뛸 듯이 기뻐하면서 그 모든 것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거북이 시체가 없어졌습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자니 그 때 죽은 줄 알았던 거북이가 연못 깊은데서 솟아오르며 즐겁게 헤엄쳐 다니는 것이 보였습니다. 소년은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실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더니 이윽고 말했습니다.“아빠! 우리 저 거북이 죽여요”이렇게 이율배반적이고, 순간적이고, 언제나 상황적인 연약한 모습이 인간입니다.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심한 백성들을 계속 참아 주시고 마침내 온전한 주의 자녀들로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보십시오. 엘리야는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로뎀나무 아래서 자신을 던지고 죽기를 애원합니다.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선지자의 소명도, 이스라엘의 영적 갱신에 대한 그 큰 희망도, 자기와 동고동락했던 충실한 사환도, 갈
멜산의 영광스러운 승리도 모두 내 던지고 말았습니다. 끝장났다고 여겼습니다. 여러분! 오늘 나에게 끝장나 버린 것이 무엇입니까? 직장입니까? 사업입니까? 아니면 신앙입니까? 바라건대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실망한 자리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시고, 우리가 실패한 자리에도 하나님은 계시고, 우리가 로뎀나무 아래서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에도 엘리야의 하나님, 그 하나님이 바로 곁에 계셔서 먹여 주시고 살려 주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엘리야를 보십시오. 천사가 어루만지며 먹을 것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음식을 먹고 바로 벌떡 일어 난 것이 아닙니다. 6절에 보니까“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일어나서 힘내라고 주신 귀한 것들을 먹은 후에 다시 누워 버린 적이 한 두 번이었습니까? 주님이 바로 옆에서 날마다 부드럽게 어루만지시면서 깨우시지만 잠시 일어 나는가싶다가 다시 드러누워 버리기를 밥 먹듯이 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자주 신앙의 탈선인 로뎀나무 아래로 떨어져 버립니까? 어쩌면 우리는 항상 다시 드러눕고 싶은 마음으로 사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처럼 다시 드러눕는 엘리야를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7절입니다.“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어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엘리야는 다시 드러눕고 말았지만 하나님께서“또다시”오셨고,“또다시”어루만지셨고,“또다시”먹여 주셨습니다. 엘리야가 다시 누워 버렸을 때 그냥 내버려두셨다면 틀림없이 광야에서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에게“또다시”오셨기에 엘리야는 소생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서 있는 자리가 탈진한 현실과 절망의 현장인 로뎀나무 아래가 아닙니까? 하지만 그 곳은 실패의 자리, 마지막 종착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피어나는 새 힘의 출발점이기도 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로뎀나무 아래에 서 있습니까? 얼른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머물러야 할 곳은 지쳐서, 귀찮아서, 힘겨워서, 고독해서, 시험이 너무 많아서, 인생살이가 너무도 고달파서“내가 죽겠다.”고 푸념하는 광야의 로뎀나무 아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이 있는 갈보리의 십자가 아래입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탈진한 시대의 현실과 희망이 사라지는 오늘을 신앙으로 승리하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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