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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완전케 하는 말씀 (요 4:4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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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완전케 하는 말씀
요한복음 4:43 ~ 54
김철현 목사


[어윈 루쩌(Erwin Lutzer)]목사가 쓴<7가지 대표적인 기적(Seven Convincing Miracles)>이라는 책에 보면 재미있는 유머가 실려 있습니다. 교회가 있고 그 교회 옆에는 술집이 있었습니다. 예배 때마다 술집에서 얼마나 시끄러운지 예배에 이만저만 방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날마다 작정기도를 했습니다. 술집이 없어지게 해달라고... 그런데 그 소식이 술집 주인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교인들이 자기가 경영하는 술집이 천둥 벼락을 맞아 없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는 소식을 들은 술집 주인은 굉장히 기분나빠했습니다. 그러던 몇 주후 진짜 그 술집이 천둥 벼락을 맞아 불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술집 주인은 변호사를 고용하여 교회를 고소하고 손해 배상을 청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교회 측을 대표하는 장로님이 나와서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아무리 교인들이 그런 기도를 했기로서니 정말 술집이 그 기도의 결과로 천둥 벼락을 맞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고...증거를 대라고 강력히 반박했다는 것입니다. 재판정도 술렁대면서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이윽고 고심하던 재판관이 최후 판결을 내렸습니다.“술집주인은 기도를 믿었고, 교회는 기도를 믿지 않았음”결국 교회는 배상도 하고 온전하지 못한 믿음으로 하나님께도 부끄러운 결과가 되고 만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함은 있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믿음이냐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즉 온전해지는 믿음,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목표이지 안주하고 머무르는 믿음으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믿음을 가져야할 것이요. 믿음이 있다면 더욱 온전해지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믿음과 상관이 없었던 한 사람이 믿음을 가진 것과 그 믿음이 온전해짐으로 인생의 위기를 극복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가 왕의 신하였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갈릴리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던[헤롯 안티파스]의 고위층 신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권력과 재력,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부족함 없이 권세를 누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치적으로 지도자급에 있는 인물입니다. 교육적으로 사회적으로 높은 층에 있는 사람이었다고 봅니다. 왕의 지위는 정치적 권력으로 가능하지만 신하의 지위는 자기능력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당한 지성인이라고 미루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가진 권력, 재력 그리고 영향력을 총동원해서 아들을 살려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인맥으로도 아들에게는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에 다시 오셨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전에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이미 갈릴리 지역에 파다한 소문이었습니다. 오직 이 희망을 근거로 그가 믿음으로 예수께로 나아왔을 때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위기가 기적의 기회가 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위기를 기적으로 만든 이 아버지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먼저는 그의 믿음의 동기를 봅니다. 결과로는 표적에 매달리는 믿음이 그의 믿음의 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늘 하는 이야깁니다만 우리들도 처음 주님 앞에 나올 때는 그 첫 동기가 있습니다. 알고 보면 이 첫 동기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답답해서 교회에 나와 봤고, 어떤 사람은 교양삼아 나와 보고, 혹은 친구 만나러 나오기도 하고, 심지어는 예쁜 여자 꽁무니 쫓아서 나왔다든가, 빚쟁이한테 빚 받으러 나왔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데서는 절대로 못 만나는데 교회에 오면 꼭 만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여간 이유가 여러 가집니다. 그래서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한테 그 동기가 무엇이냐고 묻지 마십시오. 그런 마음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느니 그런 소리하면 안 됩니다. 자기도 그래놓고 괜히 남을 탓합니다. 그런 이야기는 집사이상 된 사람들한테 나무라십시오. 다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누구나 처음 동기는 미숙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의 왕의 신하도 믿음을 잘 분석해보면 처음 그리스도께 나오는 믿음 치고는 그래도 훌륭한 믿음이라고 보아집니다. 왜냐하면 금방 알아듣거든요. 보세요. 그가 어떤 사람인가. 오늘 말씀에“듣고 가서 청하되”라고 합니다. 45절에 기록된 대로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여기서 하나 중요한 사실은 누군가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전도를 하려면 좋은 소문을 내야 됩니다. 우리 교회가 제일이다. 좀 못하더라도 우리 목사님 설교가 제일이다. 우리 장로님들이 제일이다. 이런 소문이 중요합니다. 연합집회나 교인들이 많이 모인 곳에 가면 여러 교회 제직들을 한꺼번에 만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목사님이 어떻고, 말씀이 어떻고, 자랑하는 말을 들으면 부럽습니다. 그걸 지나가는 사람들이 들으면 얼마나 궁금하게 여겨서 한번 가보고 싶지 않을까? 여러분들도 누군가에게 뭘 전하기라도 해야 들을 것 아닙니까? 어쨌든 오늘 이 사람은 듣고 나왔습니다.
자, 그런데 이런 간곡한 호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냉정하기만 합니다. 48절입니다.“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이 말씀은 이 사람의 믿음의 동기를 나무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표적에 매달리는 믿음은 믿음의 출발로서는 수용될 수 있지만 결코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미리 주님께서는 일러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족한 믿음의 동기로 출발하는 이 사람의 믿음을 온전한 믿음으로 바꾸시려는 주님의 의도라는 것입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께서 자기 아들의 병상까지 내려와 자기 아들의 이마에 손을 대시고 기도하셔야만 행여나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원시적이고 미성숙한 믿음의 자리에 있었고 주님은 성숙하고 온전한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기적으로 보여주시려는 의도였단 말입니다. 사실 당시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런 유형의 믿음에 머무르고 있었고, 이것은 오늘날의 21세기 과학의 세기에도 변하지 않은 인류의 일상적인 믿음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일찍이 고린도의 성도들에게“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라고 말한 것입니다. 표적에 매달리는 믿음은 시작으로서 필요하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될 믿음인 것입니다. 진정한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 이 왕의 신하에게는 다음 단계의 믿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떤 면에서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 믿음은 필요한 부분인지 모릅니다. 위기에 처해 있고, 도움이 필요하고, 희망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할 것입니까? 예수님께 나아와서 그분의 능력을 믿어야합니다. 기적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때도 있단 말입니다. 우선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할 위기가 있고 어려움이 있다면 그 위기는 믿음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거기에서 다음 믿음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믿음으로 나가는 길입니다. 오늘 보세요. 왕의 신하가 보여준 믿음의 다음 단계는 무엇입니까?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성숙되어집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기대를 알아차리지 못한 왕의 신하는 또 한번 예수님께 요청합니다.49절입니다.“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이때 예수님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아들이 아파 누운 곳으로 내려 가셨습니까? 아닙니다. 50절입니다.“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으로만 선포하십니다. 그와 함께 그의 아들의 병상에 내려가 그의 이마에 손을 얹으시고 안수하여 기도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그렇게 아니하시고 그는 다만 치유의 말씀을 선언하시는 것으로 반응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께서 이 반응을 통해 왕의 신하의 믿음의 성숙을 기대하신 것이었다고 믿습니다. 진정한 기적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방법 곧 표적으로만 아니라 말씀에 의지하고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왕의 신하는 이런 주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성숙함으로 반응하였습니다. 다시 50절을 보십시오.“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드디어 그의 믿음의 근거로 말씀을 붙들고 있는 이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제목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에 있어서 내가 정한 시간과 방법으로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작 하나님은 다른 시간,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주시겠다면 그것을 믿는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나는 오늘 이루어지길 바라지만 하나님은 3년 뒤에 이루어주시겠다고 응답하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순종할 수 있느냔 말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나에게“이대로 너를 사랑한다. 실패했든 성공했든 병들었든 건강하든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하시면 그것을 믿을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왕의 신하의 소원은 당장 예수님이 내려오셔서 거창하게 손을 얹고 기도해 주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원하는 방법을 거절하시고 당신의 방법으로“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만 하십니다. 여러분, 내가 생각지 않은 시간, 내가 생각지 않은 방법으로 응답받을 줄 아는 믿음, 이것이 온전한 믿음입니다.

이제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53절입니다.“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왕의 신하는 아들의 병을 고치러 나왔던 연약한 믿음이 채워짐을 받고 집에 내려갑니다. 급하게 갔으면 그날 저녁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천천히 내려가다가 하룻밤을 도중에 잤습니다. 다음 날 가는데 허겁지겁 올라오는 하인들을 만납니다. 하인들이“주인님, 아드님이 살아나셨습니다.”하고 보고합니다. 그는 빙긋이 웃으면서“그때가 몇 시더냐?”물었습니다.“어제 칠 시입니다.”예수께서“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하실 때의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이 하인은 이 사실을 온 가족을 모아놓고 전했을 것이고 온 집이 다 믿게 되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죠.
“네 아들이 살아났다.”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었습니다. 믿고서 가버나움으로 가는 중에 말씀대로 되어진 것을 확증 받게 됩니다. 순종이 먼저요, 깨달음이 뒤따르는 신앙의 중요한 원리가 이 속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먼저 순종하고 먼저 감사하고, 그 다음에 되어진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할 때 믿음 없는 사람이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미숙하고 유치한 믿음을 가졌던 왕의 신하가 이제는 원숙하고 온전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사건의 말씀 속에서 우리의 부족한 믿음의 부분이 치유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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