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 7:13~14)
본문
사람은 누구나 힘들고 불편한 것보다는 쉽고 편리한 것을 좋아합니다. 특히,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이 편의주의(便宜主義)에 길들어서 힘들고 불편한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현대의 생활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매우 편리해졌습니다. 쌀을 씻어 전기밥솥에다 안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밥이 되고, 세탁기에 옷을 넣어두면 세탁에다가 탈수까지 해 줍니다. 티비를 켜고 끄는 것이나 채널을 선택하는 것도 리모컨으로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되고,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원하는 정보를 신속하게 찾을 수 있어서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승용차가 보편화되어서 몇 백 미터만 되어도 걷지 않고 차를 타고 다닙니다. 과거에 비하면 상상할 수도 없으리만치 편리해졌습니다.
그러나 이 편리함이 우리에게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안일을 좋아하고 힘든 것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더 심각한 일은 이러한 생활 태도가 신앙생활에도 영향을 미쳐서 요즘 기독교인들을 보면 하나님을 믿더라도 가급적이면 편하게 믿고 싶어 합니다. 하고픈 일 다하고, 만날 사람 다 만나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하나님을 예배하러 교회에 나오는 신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대인관계에서도 가급적이면 긴장을 피하고 비난을 두려워하다보니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소신껏 신앙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 같이 안일한 신앙자세를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하기를 “값싼 은혜가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원수다. 우리는 값비싼 은혜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수고 없이 은혜 받으려 한다면 그것이 곧 값싼 은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실리주의자들입니다. 신앙생활에도 경제 원리를 적용하려고 합니다. 내가 이만큼 하나님을 섬기니까 하나님께서도 나에게 이만큼 복을 주셔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세적인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적지 않습니다. 기독교적인 기복과 무속적 기복을 혼돈 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기복이란 복을 빈다는 뜻이므로 기복 신앙이란 말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복이란 단어가 매우 빈번하게 나오며, 우리 하나님을 복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 둘 점은, 성경이 말씀하는 복은 하나님을 잘 섬긴 결과로 받아 누리는 복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은혜 받기 위해 교회에 나온다고 말합니다마는, 그것은 성경적으로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은혜 받는 것도 교회 나오는 목적 가운데 하나이지만, 가장 우선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고프면 하고 하기 싫으면 그만 두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마땅히 행해야 할 본분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는 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주님께서는 현실의 안일함에 젖어있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회개를 통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7-9)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구원의 문이 되십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만 구원의 문이십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단지, 교회에 등록해서 교인노릇을 하는 것만 가지고는 예수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주님의 인정을 받으려면 회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자신이 추악한 죄인임을 깨닫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명목상의 기독교인은 될 수 있어도 성도 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외치신 첫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는 것이었습니다. 오순절 날에 성령 충만 받은 제자들이 외친 말씀도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회개는 방향전환을 의미합니다. 세상으로 향하던 발길을 180도 돌려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뿐 아니라, 회개는 자기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자신의 아집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처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라야 좁은 문으로 들어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교회생활을 오래하고 직분을 맡았다고 할지라도 넓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에 불과합니다.
교회사를 보면, 주후 4세기 초까지만 해도 기독교는 큰 핍박을 받았습니다. 네로 황제를 비롯해서 열 명의 황제가 극악하게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핍박한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황제 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관리들은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면, “로마 황제 가이사를 큐리오스 곧 주(主)로 인정하고, 황제의 신상에게 향을 바쳐라. 그러면 살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큐리오스란 곧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황제를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 가이사를 주님으로 고백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우리의 주님이시라고 말했습니다. 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기독교인이 기꺼이 죽음을 감수했습니다.
지금도 로마에 가면 콜로세움이라는 원형 경기장이 남아 있는데, 그곳은 기독교인들이 굶주린 맹수들에게 잡혀 먹히거나 화형을 당하여 순교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구(舊) 로마 근교의 지하에는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를 카타콤이라고 합니다. 층계를 몇 십 계단 내려가면 지하에 바둑판처럼 사방으로 뻗은 통로가 나오고, 그 통로를 따라가면서 좌우에 시체를 넣어둔 관 크기의 공간이 빼곡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간혹 수십 평이 넘는 넓은 공간이 나오는데, 그곳은 당시 기독교인들의 비밀 예배장소입니다. 근 250년 동안 죽을 각오가 없이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주후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허락했습니다. 그 얼마 후에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콘스탄틴은 교회를 후원하고 성직자들에게 특권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황제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 벼슬아치들이 교회로 몰려왔습니다. 일반 백성들도 교회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회개의 관문을 거치지 않은 교인들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틴에 의해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사라졌지만, 그 때부터 기독교의 타락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반드시 회개의 관문을 거쳐야 합니다. 회개한 사람이라야 좁은 문으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는 대부분 회개하지 않은 채 값싼 축복을 추구하는 교인들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수가 전 인구의 25%가 된다고 자랑하지만 우리사회의 부정부패는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인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믿을 적에 회개의 좁은 문을 통과했습니까? 회개가 좁은 문인 까닭은 회개란 자기의 죄인 됨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그 교만을 버려야 회개의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구원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받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구원은 우리의 공로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무슨 의로운 행실이 있어서 구원을 받게 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받습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선물은 값없이, 거저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그 다음 단계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전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살았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삶이야말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지옥 백성에 불과했을 것인데, 그가 자기 생명을 버려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자기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셔서 천국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사는 목적이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14장 7절로 8절에 이르기를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말씀합니다.
♪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이 찬송이 저와 성도님들의 진실한 고백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조금이라도 깨달은 사람이라면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주님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데 실패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핍박과 희생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좀 쉬운 방법으로 주님을 믿고 싶어합니다. “핍박을 받지 않고 칭찬 받으면서 믿을 수는 없을까? 희생하기보다는 대접 받으면서 기분 좋게 믿을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는 예수님의 인정을 받는 믿음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려면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공생애가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비로소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너무나도 놀랐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다니, 그러면 지금까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라 다닌 것이 물거품이 되는 것 아닌가’ 이에 생각이 미치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만류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 때, 예수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살다가도 때때로 자아가 살아나는 바람에 일을 그르치는 경험을 합니다. 내가 살면 주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 살려면 내가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기란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했습니다. 사도가 날마다 죽는다고 한 것을 보면, 그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영적 싸움을 계속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옛 성품은 우리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어느새 살아서 우리의 영적 삶을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자기를 부인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신 대속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대속의 십자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우리 각자가 주님을 섬기기 위해 받아야 할 고난을 말합니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려면 고난을 이겨내는 인내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또는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다 맞추어주고 주님을 위해서 살려면 자기 십자가를 제대로 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7-38) 부모와 자식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보다 그들을 더 사랑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믿지 않는 가족들은 화를 내며 항의합니다. 자기 아내에게 “지금 당장 예수님이 더 중요한지, 남편인 내가 더 중요한지 말하라” “당신은 예수님과 남편인 나, 둘 중에 누구를 더 사랑하는지 말하라”고 윽박지르는 남편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 분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알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부모와 배우자와 자식을 사랑하는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을 제일로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 믿는 것이 생명의 길이요, 좁은 길임을 알기에 불신 가족에게 부지런히 복음을 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을 두려워 마시고 기쁨으로 감당하십시오. 그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수고를 결코 잊지 않으시고 영광스러운 상급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큰길에는 들어가는 문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이 너무 크고 넓어서 어디로 들어갈지라도 문이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구태여 문을 따질 것도 없습니다. 방탕하고, 죄짓는 데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어깨동무를 하고 휩쓸려 들어갑니다. 극장이나 술집은 아무리 크게 지어도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지으려면 말이 많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서 반대하기도 합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너나 할 것 없이 그리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험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합니다. 기독교인이 되었다가는 괜한 고생을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 믿는 좁은 길,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는 좁은 길을 애써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좁은 문이 구원의 문이요, 그 좁은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머지않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 재림하실 터인데, 그 때가 되면, 넓은 문을 선택한 사람들과 좁은 문을 선택한 사람들 둘 중에 과연 어느 편이 현명한 선택을 하였는지 판명 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어느 길이 멸망의 길이고 어느 길이 생명의 길인지 확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실 것입니다. 양은 주님을 믿는 자들이요, 염소는 불신자들을 말합니다. 그 날에 심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실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넓은 문과 좁은 문, 이 둘 가운데 어느 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는 영원한 운명이 결정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로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끌고 요단을 건넜습니다. 가나안 일곱 족속을 쫓아내고 그 땅을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게 분배했습니다. 이 위대한 과업을 마쳤을 때 그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대표들을 불러 모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4-15)
하나님이냐, 우상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냐 재물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람은 누구나 넓은 문과 좁은 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생명과 복을 누릴 수도 있고 사망과 화를 당하기도 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복락을 원하십니까?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무쪼록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여 좁은 길로 들어가심으로 영원히 복되고 영광스런 삶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