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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되기, 제자삼기 (마 28: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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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되기, 제자삼기 (마 28:16-20)


어떤 백수가 그의 친구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의 친구한 명은 잘생긴 친구, 한 명은 아주 부자였다. 바다 여행 중에 풍랑에 배가 침몰해서 무인도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요술병을 발견한다. 뚜껑을 열었더니 왠 거인이 나타나서 “주인님! 무슨 소원이든지 한 가지를 제가 들어주겠습니다.”

잘 생긴 친구는 여자 친구들이 있는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는 여자 친구들이 우글거리는 집으로 갔다. 부자인 친구는 30층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 백수인 친구는 아무 할 일도 없고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없어서 이렇게 말했다. “야, 얘들 다 어디 갔어? 나 심심하니까 5초 만에 다 잡아와!” 그래서 그 친구들은 그 무인도로 다시 잡혀 왔다고 한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자유로워지고 싶은 부분이 있다. 목사는 설교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한다. 주일 지나면 다시 다음 주 설교를 위해 고민하는 이 악순환을 끊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다. 아무리 준비하고, 아무리 많이 책을 읽어도 설교의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리스도인이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는 부분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마 전도가 아닐까 한다. 사람들은 전도에 대해 자유로워지고 싶어 한다. 그것을 완전히 통달해서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든지, 그것으로부터 의도적으로 피하고 회피함으로써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든지 사람들은 이 전도의 부담감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전도는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가까이 다가온다. 전도 한 번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어떤 계기를 통해서 전도하고 자신감을 가진 사람에게도 전도는 우리들의 눈 앞으로 다가온다. 마치 이제는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에게 거인이 불쑥 찾아와서 다시 옛날의 자리로 데려가 버리는 것처럼 우리는 전도라는 그 거인 앞에 그렇게 다시 서게 된다.

우리의 두려움이 무엇이든, 왜 그것이 우리에게 오게 되었든지 간에 분명한 것은 우리는 절대로 전도를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제자는 전도를 피할 수 없다.”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제자도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다. 주님은 제자인 우리들에게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오늘은 이 모든 제자도의 결론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오늘 이 말씀을 끝으로 제자도에 대한 말씀을 마치려고 한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명령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래서 위대한 명령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이 위대한 명령과 전도를 항상 관련시킨다. 즉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전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제자 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은 시더릿지 커뮤니티 교회의 탁월한 설교자 브라이언 맥라렌 목사님과 같은 분이다.
브라이언 맥라렌이 전도를 말하기보다 제자삼기, 또는 제자가 되고, 제자 삼는 것을 말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오늘날 세상은 텔레비전과 같은 세상적인 비전의 도구들이 모든 문화에서 선두자리를 차지하게 되어서 전도라는 말은 더욱 답답하고, 음울하고 심지어는 천박한 느낌까지 주는, 종교용어가 되었다. 전도는 기계적인 일인극이요, 부정직한 상술이요, 아무도 부탁하지 않은 설교요, 위선자의 눈물이요, 불편한 대립이며, 과장된 눈맞춤이요, 한 사람의 영혼과 그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지나칠 정도로 진지한 선언이다.

그래서 브라이언 맥라렌은 전도하면 우리에게 떠오르는 것이 싸움이라고 했다. 무엇인가 저 사람을 회심하기 위해서 저 영혼과 싸워야하고, 논쟁을 벌여야 하고, 그래서 내 앞에서 굴복시켜야 하는 것으로 전도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우리에게 제안하는 것은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전도방식, 마치 춤을 추듯이 부드럽게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한다. 그는 전도를 춤추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가 통찰력을 가지고 전도를 싸움으로 이해하는 우리의 시각을 뒤엎고, 춤으로 이해하는 것은 탁월함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도라는 말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나 또한 부정적이다. 그러나 어쨌든 저는 그가 오늘 성경 본문을 가지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단순한 전도가 아니라 제자삼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찬성한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단순히 전도하는 것을 뛰어넘어 제자 삼으라고 하셨고, 세례를 주라고 하셨고, 주님이 우리에게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제자란 무엇이며, 제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발견한다.
오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주님 자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고 말씀하신다.
제자란 예수님의 온전한 권세를 확신하는 사람이다.
제자는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다. 여러분도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가?
제자는 예수님께서 모든 것에 옳으심을 믿는다. 제자는 그 분이 가르치신 것이 진실이며, 하나님 또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그 분께서 옳으셨음을 확증하셨음을 믿는다. 여러분도 예수님의 모든 것이 옳으심을 믿는가?

제자는 예수님이 예수님 자신에 대해 하신 말씀이 진실임을 믿는 사람이다. 제자는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고, 그 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는 구세주임을 믿는다. 여러분도 예수님에 관한 모든 말씀을 믿는가? 여러분은 예수님의 온전한 권세를 확신하고 있는가? 제자도에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요구된다.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고 믿는 제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주님은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신다. 주님은 “가라”고 하신다. 제자란 사명을 품고 보냄을 받은 자이다. 우리 성경에는 단순히 “가서” 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헬라어 문법 구조로는 “네가 가고 있을 때”, 또는 “네가 갈 때”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의 여정에서 네가 어디를 향하든지”라는 뜻이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권세를 확신하는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가야하는 사람들이기에 우리의 삶은 여행이며, 모험이며, 사명의 길이다. 그리고 제자된 우리의 사명은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일”이다. 제자인 우리들에게 주님은 제자 삼으라고 하셨지만 과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내가 누군가를 제자 삼으려면 바로 내가 제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제자가 되고, 누군가를(세상을) 제자를 삼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사는 법을 내가 배우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며,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제자인 우리들의 사명이다.

지금 세상에는 바다 이야기가 시끄럽다. 사람들의 사행성을 부추기고, 그러한 제도가 만들어지기까지 법을 만드는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검은 고리가 있었다는 정황들이 포착되고 있다.
80대의 부모가 자식집을 찾아왔는데 자식들의 재산싸움 때문에, 자식이 부모를 향해서 냄새가 난다며 한 겨울에 창문을 다 열어놓고, 보일러 코드마저 뽑은 채 늙은 부모만을 남겨놓고 여행을 가버려서 아버지는 동상과 패혈증으로 숨지고, 어머니는 지금도 그것으로 인해서 고생한다는 뉴스가 들린다.
이 모든 사건들은 오늘 우리들에게 세상의 모든 경쟁적인 사명을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다. 세상이 오늘도 경쟁적으로 추구하는 사명들은 이런 것들이다.
부와 재산을 얻기 위해, 안락함을 얻거나 여가를 즐기기 위해, 유명해지거나 권력을 갖거나 인기를 얻기 위해, 정치적인 명분을 얻기 위해......
오늘 우리는 이런 세상으로 부름 받았다. 부와 쾌락과 명예와 권력과 인기를 추구하는 세상의 한 복판에서 우리에게는 주님이 말씀하신 가치와 삶의 방법과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제자 삼는 사명이 있다.
주님은 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다. 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로, 성령님을 ‘높은 곳’ 혹은 ‘저 멀리’ 계신 하나님일 뿐 아니라 바로 ‘여기’에 계신 하나님, 우리들의 마음과 우리들의 삶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발견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우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신 것은 단순히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 전도하라고 부르시지 않았다. 그들을 전도하고, 제자삼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며, 무엇보다도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모든 삶을 그대로 내 삶 속에 재현하며 지켜 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들을 제자 삼으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어떻게 가능할까? 주님을 보면 그것이 보인다. 주님은 어떻게 제자를 낳았을까?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끝까지 제자들을 돌보셨을까? 바로 주님의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제자를 낳는다.”

저는 오늘 말씀의 보면서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울부짖은 모습이 생각났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 분은 왜 그토록 멸망당할 성읍을 보면서 우셨을까? 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 분은 암탉이 새끼를 품듯 주님을 원하지도 않는 그 사람들을 끝까지 품기를 원하셨을까? 주님의 끝없는 사랑 때문이다.
우리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그 분이 이 세상을 섬기신 방법이 사랑이셨음을 알 때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지만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온 삶을 드리신 그 분의 사랑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모든 민족을 제자삼기 위해서 기꺼이 우리의 길을 떠날 수 있다.

그 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기다리시며 기대하시고 있는지를 알게 될 때 우리는 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 분의 모든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할 수 있다.
지난 수요일 인터넷 신문에는 “미국은 예수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었다. 흥미로운 제목이어서 읽어보았는데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미네소타 세인트 폴의 우드랜드 힐스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그레고리 보이드(49) 목사는 보수적인 교회의 목사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지난 2004년 미대선 직전부터 이라크 전쟁의 상황 속에서 '십자가와 검'(The Cross and the Sword)이라는 제목으로 여섯 차례에 걸쳐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불러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주제로 설교를 하면서 교회를 정치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미국 교회는 도덕적 차원의 성적 이슈에 대한 논쟁을 중단해야 하며, 미국이 벌이는 전쟁에 축복을 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교회가 세속적 논쟁에서 승리하고 세상을 지배하게 될 때 더욱 세속화 되며, 검에 대해 신뢰하게 될 때 십자가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미안하지만 미국은 세계의 등불이나 희망이 아니며, 세계의 등불이자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강조한다. 그 교회는 이런 민감한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불만 때문에 교인들이 5천명에서 1천명이나 빠져 나갔지만 보이드 목사의 용기 있는 설교에 감동한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저는 아직 이런 문제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오늘 교회는 빨리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 분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변함없는 사랑과 종으로서의 섬김만이 우리의 살 길이다.

앞에서 인용했던 브라이언 맥라렌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 없는 이벤트성 전도는 종교인을 낳을 뿐이다.”
멸망 받을 성읍 예루살렘을 향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통곡하시며 울부짖으셨던 주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구원해 주시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 울라고 말씀하신다.
영혼 구원과 진정한 목사이기 위해서 늘 깨어있기를 원했던 19세기의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복음 전도자였던 호라티우스 보나는 이렇게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우리도 그렇게 가슴을 치며 기도하기를 원한다.

주님, 주님의 심정을 저희에게도 허락해 주소서. 주님이 흘리신 눈물을 저희에게도 허락해 주소서. 주님, 인간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너무 강퍅합니다. 주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도 우리는 편안히 잠을 잡니다. 그들 앞에 놓여있는 무시무시한 운명을 보고도 무서워하지 않으며, 잃어버린 영혼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도 가슴아파하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도, 그들을 제자 삼는 사역도 사랑에서 출발해야 한다. 사랑은 늘 새로운 영적 생명을 낳는다. 사랑은 언제나 제자를 낳는다. (이양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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