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능력을 머물게 하려면(고후12:1-10)
본문
예수 믿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될 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는데, 먼저 하나
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요1:12). 그리고 신앙으로 세상을 승
리하게 될 약속을 얻었습니다.
롬 8: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
시겠느뇨』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은사들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 충분 조건들을 신앙 가운데서 주신다는 말입니다.어떻게 하면 주의
능력을 우리 삶 가운데 머물게 하고 효과를 나타내게 할 수 있습니까?
1.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된 능력, 곧 하나님이 성도에게 역사하시는 능력의 약속들
에 대해 아셔야 합니다. 교회 다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현실적
인 삶의 역사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간섭하시고 능력 있게 대처
하게 하시는 것을 깨닫고 기대하고 간구하고 체험해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의 공생애 3년 기간에 사도가 된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예수
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잡으러 다니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공중에 나타나
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되어 쓰러지고 그 직후 그는 변화를 입게 되었
습니다.
그는 부름 받은 초기에 고향에 가서 오랜 묵상으로 예수의 제자로 변신
하게 된 자아를 철저히 정리하고 복음의 사도로 나아가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마 본문에 소개한 그의 체험을 얻지 않았을까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늘을 일곱으로 나뉘어 생각했고 세 번째 하늘은 죽은 자가
가는 곳이라고 여겼습니다.그러나 바울의 셋째 하늘에 대한 형용은 아마
영광의 하나님이 계신 영적 하늘의 그 곳을 의도할 것입니다.
엡 4:10『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
만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한 표현도 있고,
느 9:6『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왕상 8:27『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
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고
하는 말씀에서도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란 중복적인 표현으로써 하나님
의 영광의 그 곳을 의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곳을 낙원이라 했는데, 셋째 하늘은 낙원이라는 헬라어 파라데
이손은 아담과 하와가 죄 없이 살던 에덴 동산이란 단어이고, 주께서 십
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옆에 한 쪽 강도에게 약속하셨던 낙원이고(눅23:4
3) 신약의 성도가 신앙으로 승리하는 자가 가서 살 영생의 장소로 표현
되고 있습니다,
계 2:7『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
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최근에 나온 조용기 목사가 번역한 책「천국은 확실히 있다」(토마스 주
남 씀, 서울말씀사, 2004)에서 보면 별 희한한 이야기가 다 나옵니다.거
기엔 식사 준비를 하는 도구와 여자들의 화장하고 옷 갈아입는 곳 등,사
는 집들을 현 세상의 문화 양식 이대로 설명합니다.
한 마디로 성경의 근거 없는 거짓된 증언이고 비성경적인 말입니다.
무슨 신비스런 체험이라도 첫째로 우리들이 체험할 하나님의 능력은 그
런 그림이나 바울의 셋째 하늘에서 일어난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신비한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서 발견된 자아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하나님은
광대하셔서 우리가 주께 순종으로 살 것에 대한 깨어나는 감각이 중요합
니다.
2. 개인의 약점을 확실히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약점이 많습니다.
롬 15:1『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히 7:28『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
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고 하
면서 성경은 약점의 존재인 인간을 말해줍니다.
문제는 약점을 인정하려들지 않는 것이 마치 잘 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
은 아주 잘 못된 것입니다. 소위 긍정적 사고방식이라는 말이 와전되어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문제점을 인식하거나 괴로워하는 것이 잘못된 것으
로 오해하는 것은 신앙적이지 못합니다.마귀가 가르쳐 주는 이상한 복음
입니다.
막무가내로 매일 기뻐하라고만 외치는 목사도 있고 그렇게 하면 좋은 거
라고 여기는 신자들이 많은데 성경은 그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긍
정적, 적극적 사고방식이라는 사고의 철학이 교회 안에 도입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심리철학에 속아서 신앙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결코 긍정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거나 자신을 그렇게 부추기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자아에 대한 진정한 반성을 요구하고 분
명한 모습을 철저히 하나님께 내놓고 교정할 것을 권면합니다.
약 4:9『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너희 즐거움
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부정적이고 소
극적으로 들리는 주의 말씀에 오히려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긍정적 사고방식이 마치 복음의 혜택을 입는 수단에 만능인줄 착각들 하
는데, 가령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 날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막 14:34『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고민하신다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긍정적으로
감사하며 십자가를 지면 될 것인데 고민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가시가 될 아픔이 있었습니다.그가 많은 능력을 체험하고 소유하
여 사도로서 충분했지만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7『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
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체에 가시는 질병 같은데(약함, 아스데네이아,ajsqevneia 나약함,질병
)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빛을 받았을 때 안질의 변화가 생겼을 가능성
을 뜻한다고 하는 자도 있고(갈 4:13-15) 사단의 사자라는 말을 보고 간
질병이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 자도 있습니다.혹은 언어 장애자로도 봅니
다(10:1, 9-11;11:6).
갈 4:13『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는 자신의 약점을 해결하려고 간절히 구했습니다.
8『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주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같은 내용의 기도를 피땀 흘리시며 간구하셨
듯이 바울은 사도로서의 약점을 제거하기 위해 그렇게 3번을 간구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약점이 왜 생겼고 왜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매우 심각
한 고민이 있어야 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열망과 또 그 문제점의 이유에
대한 확고한 해석이 갖추어져야 합니다.한번 해서 안되면 두 번, 그리고
안되어도 3번해서 간곡하게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약점을 인정하고 그 인정된 바의 약점에 대한 근원적인 이유를 잘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주의 능력은 겸손해야 머물 것입니다
바울이 세 번이나 기도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는데,
8-9『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
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
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소위 완벽주의자처럼 자신의 약점을 해결하려고 간곡하게 기도한
결과 그가 받은 은혜와 신령함이 많으므로 스스로 교만할까봐 하나님이
육체에 가시를 주신 이유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끈질기게 죽는 순간까지 따라다니는 그림자가 있는데 그
것은 교만이라는 죄악입니다. 세상은 적당한 교만으로 자신의 존심을 표
현하려고 합니다.그러나 성경에서 교만은 사단의 본성임을 지적해줍니다.
창 3: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지식만능의 시대에 줄기세포 운운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 도전하
며 과학은 생명공학이라는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고전 8:2『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고전 10:12『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속죄와 영생 구원이라는 놀라운 은총을 위하여 자신
을 주셨는데 먼저 당신의 영광의 자리를 비우시고 이 죄된 땅에 오셨다
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빌 2: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
이 되었고』
하나님은 겸손한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약 4:6『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사람이 겸손의 미덕에 대한 도덕적 생각은 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
궁극적으로 죄인 됨에 대해 깨달아야 제대로 인생의 승리를 얻을 것입니
다.단적으로 말해 겸손의 윤리를 잘 가르친 공자도 속죄와 구원은 못 받
았기 때문에 윤리적인 정도를 넘어서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가 고기를 못 잡았을 때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다시 그물을 던
졌더니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의 고백에서 우리는
구원 얻는 자의 특색 있는 고백을 보게 됩니다.
눅 5: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니 라고 했습니다. 혹은 구원 얻
을 자의 기도의 태도를 말씀하실 때 주님은 세리의 기도를 본보기로 말
씀하셨습니다.
눅 18: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
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
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최근에 많은 이들이 의지를 다하여 무조건 강한 심령만 있으면 잘 될 것
으로 여기는 심리주의를 신앙으로 오해하는데,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전 1:25『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
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유대인이 바벨론 포로 때에 그곳에서 자라 나중 파사왕 고래스 때 유대
인들을 귀국시키며 스룹바벨이 인솔하여 성전 건축을 하게 되었는데 주
변에서 환난을 일으켜 낙심하고 힘들었습니다. 그 때 주신 말씀은,
슥 4:6『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일에나 성도의 현세 생활에서 신앙인으로 그 효과적 삶을 살아
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하신 말씀입니
다.
고후 1:9『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
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
심이라』
갈 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
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
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윗도 자기 실수를 지적한 작은 한 선지자 나단의 말에 엎드려 져서 하
나님께 죄를 고하고 회개하였기에 위대한 성군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나아만 장군도 겸손했을 때 그의 문둥병을 낫게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혼의 급증은 여러 이유들보다 사람들이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감사가 없어진 것은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겸손하면 감사해집니다.
심지어 교주가 되는 것도 교만하다가 그렇게 변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머물게 하려면
스스로를 강하게 하려는 의도적인 긍정적 사고방식이라는 것보다 오히려
자아를 내놓고 나의 약점을 하나 하나 고민할 줄 알고 문제점을 주께 물
어보고 위로를 받으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고민하는 애통하는 자는 반드시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기독교 신앙은 강
해서 강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약해서 강해지는 원리를 가지고 있습
니다.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
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한 바
울의 명철학을 깊이 마음에 새겨서 항상 거만하고 교만한 자아를 죽이고
겸손하여 은총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강종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