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존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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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마경훈 목사
본문 :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사람이 불행을 느끼는 것은 환경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불행의 가장 큰 원인은 잘못된 자화상입니다.
잘못된 자화상으로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민 13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뚜기 자화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자화상으로 자신들을 광야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12명의 정탐꾼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왔습니다. 12명 중에 10명은 아주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들의 보고의 내용을 보면 그들은 잘못된 자화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보고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니 과연 하나님이 말씀하시던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 땅 사람들은 얼마나 장대한지 모릅니다. 그들은 대장부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들 앞에 서면 메뚜기 같은 존재들입니다.” 이들의 보고를 들은 백성들은 밤새도록 곡을 하면서 하나님과 주의 종들을 원망했습니다. 그런 중에도 건강한 자화상을 가지고 믿음의 고백을 했던 두 사람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이 두 사람도 가나안 사람들이 장대하고 대장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배후에 계시는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얼마나 강한 존재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땅은 기름진 땅이고 그 땅 거민은 강하지만 그 땅 백성들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땅을 우리에게 주셨고 하나님이 우리의 보호자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 보고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잘못된 자화상을 가진 사람들, 메뚜기 자화상을 가진 사람들은 광야에서 평생 방황하다가 가나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죽었고, 건강한 자화상을 가지고 믿음의 고백을 했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잘못된 자화상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인생을 망치게 합니다. 잘못된 자화상 몇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실패한 자화상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은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믿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행동하게 되고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면 실패한 자화상을 깨야 합니다. 특히 신자는 든든한 후원자이신 하나님이 도와주시니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하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를 데리고 메뚜기 떼처럼 많은 미디안 군대와의 전쟁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했습니다.
가난한 자화상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많은 것을 가졌어도 자신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생에 만족이 없습니다. 가난한 자화상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하루는 어떤 실직자 한명이 노만 빈센트 필 박사를 찾아왔습니다. 그 실직자는 자기 자신은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돈도, 지위도, 명예도, 권세도 없고 능력도 없고, 이 세상에 쓰레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노만 빈센트 필 박사가 그 사람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아내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돈을 잘 못 벌고 못 도와주지만 충성스럽게 나와 함께 살아주는 아내가 있습니다.” “자식이 있습니까?” “예, 교육은 잘 못시키지만 건강하고 튼튼한 자식이 있습니다.” “친구들이 있습니까?” “몇 친구는 참 좋은 친구입니다” “건강합니까?” “건강합니다. 없어서 못 먹습니다.” “잠은 잘 잡니까?” “돈벌이는 못하면서 잠은 잘 잡니다.” 이때 노만 빈센트 필 박사가 그 실직자에게 “당신이 들어 올 때는 아무 것도 없다고 했지만 당신은 굉장히 부자입니다.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건강하고 잠도 잘 자는데 왜 당신이 가난합니까? 당신은 잘못된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실직자는 “박사님의 사무실에 올 때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알았는데 박사님과 대화하면서 많은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빈센트 필 박사는 “그럼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십시오. 구두도 똑바로 신고, 외모도 반듯하게 하고, 나는 부유한 사람임을 고백하십시오.”고 충고했습니다. 이후에 그 실업자는 빈센트 필 박사의 말처럼 행동하자 곧바로 직장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의 자화상이 변화되자 다른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비뚤어진 자화상은 삶에 절대적인 실패를 가져옵니다.
그리스도인은 부요한 자화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부요하신 분이신데 그분이 가난하게 되신 것은 믿는 저와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이 가난하게 되셨으며 내가 부요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축복을 받고 싶다면 의식을 바꾸십시오.
사랑받지 못한다는 자화상이 있습니다. 자기는 가족들이나 친구들 직장 동료들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미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사랑을 표현해주면 자기를 동정하는 것이거나 자기를 이용하려는 수작 정도로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매사에 부정적입니다. 적대적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학대나 무관심의 상처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아니면 버림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그런 상처를 받았어도 사랑받는다는 자화상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믿는 다는 것은 엄청난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던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엄청난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병약한 자화상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큰 병을 앓았거나 지금 병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자화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하지 않다고 믿습니다. 이런 사람은 항상 병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몸에 약간의 질병의 증상만 나타나도 병에 대해서 저항하지 않습니다. 약함을 받아드립니다. 질병을 받아드리기 때문에 늘 육체적인 약함으로 고통을 당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병약한 자화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건강한 자화상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으셨기에 나는 병들 이유가 없고 내가 건강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담대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질병을 받아드리면 안됩니다. 담대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잘못된 습관에 매인 자화상이 있습니다. 잘못된 습관에 묶여서 자신은 그 습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믿습니다. 자기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화상을 갖게 되면 마귀는 그 사람의 약한 습관을 통로로 삼고 그 사람을 조정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어떤 중독적인 습관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알콜중독자였습니다. 그는 알콜을 찾는 습관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능력으로 알콜을 이기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목사님은 마약 중독자였습니다. 그분에게는 마약을 이길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약을 이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습관이 어떤 것이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잘못된 습관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축원합니다.
잘못된 자화상의 문제는 하나님께 위대하게 사용된 사람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목동생활을 하고 있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3:10)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모세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1)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네가 가서 너희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라고 말하고, 나중에는 “주여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소서.”(출4:13)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내가 누구 길래 수백만의 사람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킬 수 있습니까?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못합니다. 나에게는 리더십도 없고, 나는 말도 못하고,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의 이런 대답들은 사실 잘못된 자화상에서 나온 말들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행 7:22을 보면 스데반은 모세에 대해서 “애굽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모세는 똑똑하고 지혜 있는 사람이었고 말도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잘못된 자화상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르실 때 못한다고 다른 사람 보내라고 했던 것입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문둥병이 고쳐지는 표적과 지팡이가 뱀으로 바뀌는 표적을 주셔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못할 일이 없다는 믿음과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셨던 것입니다.
건강한 자화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합니다. 성공합니다. 건강합니다. 부요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께서 크게 두 가지 일을 해주십니다.
첫째는 하나님 없는 내가 누구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내가 얼마나 영적으로 비참하고 무능력하고 교만하고 죄악으로 가득한 존재인 것을 가르쳐줍니다. 성경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자신이 죄인인 것을 고백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가르쳐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주시고 새롭게 변화된 자기의 존재를 확신하게 만드십니다. 주님 안에서 존재의 변화를 확신하는 사람들은 건강한 자화상을 갖게 됩니다. 자신이 주님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확신하게 되면서 인생의 의미도 바뀌게 되고 인생의 목적도 바뀌게 됩니다. 생활의 방법도 변하고, 만남도 새로워집니다. 하는 일도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서 인생 전체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는 자신을 위해서 어느 정도의 투자가 되었는지를 알면 간단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가치 없는 것에 투자하는 사람 봤습니까? 없습니다. 운동선수에게 투자를 해도 가능성이 있는 선수에게 투자합니다. 많은 돈을 투자했다는 것은 그만큼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럼 주님을 믿는 나는 얼마나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까? 나를 위해서 하나님은 어느 정도 투자를 하셨습니까? 나는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 존재입니까? 요3;16에 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살리기 위하여 나에게 영생을 주시고,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투자하셨습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면서 까지 나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독생자를 투자하시고 나를 살리신 것입니다.
믿는 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어떤 존재로 변화되는가를 살펴봅시다. 본문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 새로운 존재가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 1:12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내가 능력이 부족하고 인격이 좀 부족해도 나는 너무나 존귀한 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존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을 들으면 아버지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과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세상 아버지는 실수도 하고, 자식들에게 상처도 주고, 심지어 자식을 버리는 아버지도 있지만 하나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세상 아버지가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것처럼 타락한 아버지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다 보여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에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저는 두 아이를 사랑합니다. 이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혹시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두 아이를 사랑합니다. 만약 우리 아이들 중에 한 명과 다른 아이들이 물에 빠졌다면 저는 제 아들을 먼저 꺼내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아이의 아버지이고 그 아이는 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아이가 제 아들보다 공부를 더 잘해도, 얼굴이 잘생겼어도, 그냥 죽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아이라 할지라도 저는 제 아들을 먼저 구원할 것입니다. 다른 아이가 살기만하면 인류 역사에 크게 공헌을 할 아이라 할지라도 저는 우리 아들을 먼저 구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제 아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믿는 자들의 관계가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니까, 죄가 많으니까, 하나님의 자녀이기는 하지만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분명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내가 비록 실수를 하고, 죄를 범하고, 엉뚱한 사고를 친다고 하더라도 나는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저에게 100만 원짜리 수표가 있습니다. 은행에서 막 나온 신권입니다. 이 수표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요? 100만 원의 가치가 있습니다. 제가 그 수표를 지갑에 넣기 위해서 반절 접었습니다. 이 수표의 가치는 얼마입니까? 우리 아들이 가지고 놀다가 심하게 구겼습니다. 이 수표의 가치는 얼마입니까? 제가 실수를 해서 이 수표를 흙탕물에 떨어뜨렸습니다. 아주 더러워졌습니다. 이 수표의 가치는 얼마일까요? 더 큰 실수를 해서 시골 재래식 화장실에 빠뜨려서 겨우 건져내서 물로 씻어냈습니다. 씻었는데도 고약한 냄새가 납니다. 지저분한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이 수표의 가치는 얼마일까요?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습니까? 주님의 고난이 나를 위해 대신 받으신 고난이라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구겨질 때도 있고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 쓸 때도 있습니다. 실수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때도 있고, 죄악으로 더러워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답게 살지 못해도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존귀한 사람인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책임져주시는 것입니다. 자식이 잘났든 못났든 내 자식이기 때문에 책임져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돈 많은 집에서는 일군들이 많았습니다. 주인과 일군이 비슷한 시기에 아들을 하나씩 낳았습니다. 주인집 자식은 늘 사고를 치고 문제를 일으킵니다. 머리도 별로 좋지 않습니다. 일군의 자식은 착하고 똑똑합니다. 둘 다 여덟 살이 되었습니다. 학교 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일군은 돈이 없어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못합니다. 주인은 돈이 많으니 당연히 사고치고 못난 자식이지만 학교에 보냅니다. 일군의 아들은 학교를 가지 못했지만 반듯하게 자랐습니다. 쓸만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주인집 아들은 학교는 다니지만 공부에 관심이 없고 역시 사고나치면서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두 청년이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일군은 쓰러져가는 초가집 빌려서 아들 며느리 살게 합니다. 주인은 기와집 하나 지어서 아들 며느리 살게 합니다. 일군도 주인도 나이가 들어서 죽게 됩니다. 죽으면서 자식들에게 유산을 물려줍니다. 일군은 평생 모은 것이 별로 없으니 남겨줄 것도 없습니다. 자식은 낳아주고 길러준 것만도 감사해야 합니다. 주인은 계산하기도 힘들만큼 많은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줍니다. 일군의 아들은 착하고 똑똑한데도 아버지에게 큰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주인 집 아들은 말썽도 많이 피우고 머리도 좋지 않지만 일군의 아들 보다 항상 좋은 조건에서 살았고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단지 아버지의 자녀라는 것이 이유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의 모든 잘못을 받아줄 수 있는 분입니다. 세상 아버지는 그렇게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는 우리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탕자의 비유에 보면 둘째 아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돈을 챙겨서 집을 나갑니다. 외국으로 가서 생활을 하는데 생활이 규모가 없어서 가진 돈이 빠져나가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창기들과 어울리면서 모든 재산을 다 날리고 말았습니다. 완전히 거지가 되고 남의 집에서 돼지 치는 일을 합니다. 고생고생 하다가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 집에는 품꾼들도 양식이 많은데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구나 생각하니 아버지 생각이 간절합니다. 그래서 탕자가 결심을 합니다. 아버지 집에 돌아가서 품꾼으로 있더라도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자. 결국 아버지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 아들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받아드리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을 목욕시키고 새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송아지 잡아서 잔치까지 합니다. 아버지가 왜 그렇게 할까요? 내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자식이 내 재산 말아먹었으면 원수가 될 겁니다. 감옥에 집어넣을 겁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내 아들입니다. 그래서 다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영혼의 친 아버지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면 세상사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가슴에 뿌듯함이 있습니다. 예전에 소망교회에 있을 때 일입니다. 어느 날 하은이가 친구들을 데리고 교회에 왔습니다. 예배당을 보여주고 제 사무실로 와서 친구들에게 “이게 우리 아빠 사무실이야!”라고 하는데 그 얼굴을 보니 너무나 자랑스러운 표정입니다. 아마도 그 아이 생각에는 아빠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부족한 저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요. 우리 아들 모세는 좀 어른스럽습니다. 믿음직합니다. 듬직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가끔 자기는 엄마 아빠를 잘 만난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지요. 그런데 사실은 이 세상에는 저보다 더 좋은 아빠도 참 많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어떤 분입니까? 어떤 책의 저자가 자기 아들과 아들 친구가 노는 것을 보고 있는데 아들 친구가 아빠 자랑을 하면서 “우리 아빠는 훌륭해, 시장님하고 잘 아는 사람이다”라고 하니까 그분 아들은 “우리 아빠는 하나님하고 친한데”라고 하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하고 알고 지내는 정도, 친한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마 7:11에 보면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기에 우리는 당당하게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은이 어릴 때 일입니다. 예배 시간에 설교를 하고 있는데 강단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저에게 손을 내밀면서 “아빠, 용돈”라더군요. 참 기가 막힌 일이지요. 그런데 그 아이가 그렇게 당당하게 용돈을 요구했던 이유는 제가 자기의 아빠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이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확신하십시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아버지와 자녀 관계를 확신하시고 건강한 자화상을 가지고 행복하게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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