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믿음을 가집시다 (히 11:1-6)
본문
작년 1월에, 영국의 선데이타임스는, 지난번에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지진해일에 대해 보도하면서, 미국의 저명 지질학자가, 6개월 전부터, 초대형지진해일이 발생 가능성을, 수차례 경고했으나, 인도네시아 당국자들이, 이를 묵살했다고 밝혔습니다.
10여 년간, 인도네시아 지질학을 연구해온, 미국 캘리포니아 공대의 [케리 시] 교수는, 인도네시아에 초대형 지진해일발생 가능성을, 인도네시아 정부 당국자들에게, 알렸다고 합니다.
그는 또 섬 지역에, 5,000여 장의 경고문과, 대피 요령을 담은 책자를 만들어 배포하고, 교회와 학교를 돌며, 지역 주민들에게, 지진해일에 대해 경고하고, 해안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해, 대피요령 교육을 확산시키는 방안을 협의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관리들과, 만날 예정이었으나, 관리들이 “예산이 없다”며, 일방적으로 약속을 취소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케리 시] 교수는, 몇 주 전, ‘센프란 시스코’에서 열린 관련 학회에서, 인도네시아에, 대형 해저지진으로 초래된, 해일이 닥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지질학자들의 말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믿었어야 할 그 말을 믿지 못하였기에, 23만 명이 넘는 인명피해를 입고 만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귀한 교훈을 얻습니다.
이 경고를 믿었더라면, 23만 명의 인명피해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믿지 않았기에,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기에,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성경에서 수 없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메시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경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만 보고 아주 안주합니다.
오늘 이 시대도, 이런 현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영적인 부분에서, 더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도, 듣지 못하고 믿지 못합니다.
경고뿐 아니라, 은혜와 사랑, 축복에 대한 복된 말씀이 있어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가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합니다.
이런 시대에서, 우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생명을 안겨주고, 불신은 심판을 안겨준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믿음이 생겨지기를 기도합니다.
1. 말씀을 들어야 하고, 말씀을 따라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끄시고자하는,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하시고자 하는 곳을 향해, 나아가야합니다.
[아브라함] 같이, [모세]와 같이 말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인도하심을 받아, 미지의 세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나아가듯이, 우리는 하나님이 이끄시고자 하는 곳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시고자, 행하시고자하는 일과, 그곳을 향하여 가야 합니다.
생명력 있는 믿음으로 보고 들으며, 순종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믿음은 습득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외우거나 흉내 내서 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진리를 찾고, 확신하는 가운데 가지는 생명력이어야 합니다.
보세요.
오늘 말씀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습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철저히 영적이요,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요, 우리가 구하고 얻어야 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본문 1-2절)
첫 번째로,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1절)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 실상 = 휘포스타시스 = “아래로부터 밭쳐준다”)
‘실상’이란 ‘휘포스타시스’라는 말로, “아래로부터 받쳐준다” 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건물의 기초와 같은 것입니다.
곧 희망의 기초라는 말입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고 어려울 수 있지만, 믿음을 가질 때,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희망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을 때,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땅으로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을 받고 떠났습니다.
그때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미지의 세계, 그 세계가 어떠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희망으로 삼고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 증거 = 엘렉코스 = 확신.)
‘증거’란 ‘엘렉코스’란 말로 “확신”이란 의미입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내적인 확신입니다.
[노아]는, 참으로 무모하리만큼,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 땅을 홍수로 멸하겠으니, 산꼭대기에 가서 배를 만들라고 하실 때, 그는 아무런 징조도 보지 못했습니다.
비가 올 징조, 심판의 징조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배를 만든다는 것은, 이치적으로 맞지 맞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노아]는 믿음의 눈을 통해, 비가 철철 흘러내리고 온 땅이 물에 잠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보았기 때문에, 산꼭대기에서 배를 만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앞으로 되어 질 것을, 미리 믿음의 눈을 통해서, 보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세 번째로 믿음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하는 힘입니다
본문 2절을 보세요.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선진들이란, 믿음의 선배들, 믿음의 조상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이 증거를 얻었습니다.
이 ‘증거’란 말은 앞에서의 증거와 뜻이 다릅니다.
( 증거 = 말튜레오 = 법적인 증거)
‘말튜레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인데, “법적인 증거”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법적인 증거로 채택된 것만큼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심증이 아닌 물증이지요.
곧 선진들이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다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 확실하고 분명한 결과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움직일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를 가져왔다는 말입니다.
믿음이란 이러한 것입니다.
이것을 외운다고 해서, 흉내 낸다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생명력이, 내 안에서 꿈틀거려야 합니다.
‘그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나는 믿고 순종할 수 있다’
이것이 생명력이 있고 꿈틀거리는 믿음입니다.
2. 생명력이 꿈틀거리는 믿음이, 여러분에게 넘쳐나야 합니다.
이 믿음을 가지십시오.
이 믿음은 먼저 하나님께서 내게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 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도록 주셔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은혜를 받으십시오.
겸손한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똑같은 것을 보아도, 어떤 사람은 회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믿지 못하고, 오히려 불평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강림의 역사로, 사도들이 예루살렘 거리로 나아가 복음을 전했을 때, 그 말씀을 듣고 어떤 사람들은, 저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새로운 일이라 하면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 꼬?” 회개하고, 성령을 받은 무리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새 일이로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고 회개하는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들은 놀라운 구원의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은혜를, 내가 받아들인다는 그 자체는, 정말 축복입니다.
내 마음이 변할 수 있고, 감동 받을 수 있다는 그 자체는 축복입니다.
이 믿음을 더 크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제자들이 주님께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할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리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
바로 생명력 있는 믿음을 말합니다.
믿음을 우리가 구하고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 믿음 안에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음의 사람들을 본받으며 나아가야 합니다.
밭이 열매를 내기 위해서는, 씨앗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씨앗을 받아들이고, 그 씨앗이 밭 속에서 썩어질 때, 비로소 싹이 나고 열매를 낼 수 있습니다.
밭이 씨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면, 결코 열매를 낼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허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투신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리할 때, 말씀이 생명이 되고, 진리가 능력이 되고, 그리할 때, 생명의 역사, 곧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히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도,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점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10:17)
그리고 확신하십시오.
들은 것을 의심하거나, 회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니는 것은, 부정적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불의하고 악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일, 있어야 할 곳, 가야 할 곳....
그곳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하라 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그것에 확신을 가지십시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듣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행동해야 합니다.
믿음은 행위입니다.
행동입니다.
우리가 범하는 실수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행동하지 못함으로, 소멸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잃어버리게 되고, 하나님의 축복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말씀을 들었다면, 그리고 확신을 가졌다면, 행동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조상들의, 또 하나의 공통적인 모습은, 믿고 순종했다는 점입니다.
곧 행동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행동함으로 역사를 이루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3. 믿음이 있는 사람은, 뭔가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다른 차원의 삶을 산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믿음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다르다는 것은, 곧 믿음의 차원에서 살아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민14:24)
열 명의 정탐꾼은, 가나안의 현실을 보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이끌고 들어가셔서, 그곳을 차지하게 하시고, 그 땅에서 이룰 아름다운 삶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삶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사람들에 대해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라고 하고 있습니다.(히11:38)
우리가 생각하고 결단하고 행하는 모든 과정에서, 믿음으로 바라보고, 믿음으로 행하는 삶이라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나아가십시오.
‘우리는 저들과 다른 차원의 삶을 산다.....’ 그것은 능력이고 힘이며 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느끼십니까?
하나님께서 소망을 주십니까?
믿음으로 보십시오.
믿음으로 듣고 순종하십시오.
순수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이끌림을 받으면서, 하나님과 함께 가십시오.
그렇게 갈 때, 여러분은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 삶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다르게 살기로 작정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복주시고, 당신의 나라를 위해 친히 이끌어 가십니다.
이렇게 쓰임 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저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가, 그렇게 복 받고 쓰임 받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