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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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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 5:1)


근래에 모 TV 방송에서 서해의 어느 섬에 끌려가서 보수도 받지 못하고 매일 같이 장시간의 중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르포를 방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현대판 노예 노릇을 하는 이 사람들은 대부분 정신박약자들이거나 노숙자들로서 돈을 벌게 해 주겠다는 말에 속아서 그런 처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간에 국민의 기본권을 헌법으로 보장하는 민주국가인 대한민국 땅에서, 그것도 오늘처럼 국가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시대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모세의 율법인 출애굽기 21장 6절에 보면, 사람을 후린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여기서 후리는 것은 사람을 도적질하는 것 곧 유괴를 말합니다. 그 죄가 얼마나 악독한 것이면 그런 짓을 한 자를 반드시 죽이라고 명하셨을까요? 죄 가운데서도 유괴를 특히 무서운 죄로 취급하신 이유는 그것이 남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독립 운동에 헌신했던 패드릭 헨리(Patrick Henry 1736∼1799)는 “나에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한 말로 유명합니다. 이 표어는 우리에게 자유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할 만큼 소중한 것임을 깨우쳐 줍니다. 따라서 자유를 빼앗긴 상태로 사는 것은 죽음만도 못한 삶입니다. 이 세상에서 남의 종노릇하는 사람처럼 가련한 사람은 달리 없을 것입니다.

이는 영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는 영적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적 자유를 빼앗기고 종노릇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시간 저는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근거해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함으로 피차에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예수 믿기 이전에 우리는 죄의 종 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유대인들이 주고받은 대화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더니, 저들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누구의 종이라고요? 예, 죄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 죄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어긴 것이 죄입니다. 국법도 마찬가지지만 수많은 법조항 가운데서 하나를 범했을지라도 그 사람은 범죄자가 되듯이, 율법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대하여 야고보서 2장 10절로 11절에는 이르기를 “10)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처음 지음 받았을 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범죄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와 그의 후손이 다 죄인이 되었습니다. 아담이 범죄했는데 왜 그의 후손들조차 죄인이 된 것일까요? 그것은 아담은 개인이면서 동시에 인류의 조상의 자격으로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똑같은 죄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 타고난 죄성을 원죄라고 합니다. 이 타락한 본성은 유전병과도 같이 아담에게서 그의 후손에게로 전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죄가 인간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씀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죄를 짓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점점 자라면서 자의식이 생기기 시작할 때부터 비록 어리지만 악한 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욕심을 부리고 미워하고 싸웁니다. 이는 사람의 본성이 죄로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오염된 샘 근원에서 오염되지 않은 물을 얻을 수 없듯이, 본성이 타락한 인간은 거룩한 언행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7장 18절 이하에 이 같은 탄식이 나옵니다. “18)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20)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 말씀처럼, 죄가 내 속에서 주인이 되어서 강권적으로 나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합니다. 죄의 유혹 앞에서 타락한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지 못하고 죄의 영향력에 좌우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 아무리 도를 닦고 수행을 한 사람이라도 타고난 죄성을 없애지는 못합니다. 도를 닦은 사람은 도 닦은 죄인이요, 윤리적인 사람은 윤리적인 죄인입니다. 요즘은 남자가 성전환수술을 받고 여자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아무리 겉모습이 여자처럼 보여도 그 사람이 가진 남자의 염색체는 변함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자기를 선량한 사람인양 꾸밀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 타락한 본성이 거룩하게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인이 의인인 척 하려니까 위선 죄를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동정심을 느끼고 자선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선량함을 과시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선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참된 자선은,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구제를 하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것은 진실한 선행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선행을 행할 때조차 온전하지 못합니다. 로마서 5장 21절에 이르기를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다’고 했습니다. 죄가 왕이 되어서 명령하는 대로 사람들은 행합니다. 사람들은 죄의 종이므로 죄의 명령에 대항하지 못합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은 마귀의 종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에 보면, 마귀를 일컬어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5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하여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라”고 증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죄와 마귀의 종이 되어서 죽음을 무서워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무슨 선한 행위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죄와 마귀가 시키는 대로 물마시듯이 죄를 지으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죄의 종 된 사람은 하나님의 법인 율법의 정죄 아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소망이 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 결과, 인생의 참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인생의 의미를 상실하고 단지 욕망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무가치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면 이와 같이 비참한 인간들이 살 길은 없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법을 말합니다. 율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우리의 양심에 새겨 놓으신 법이고, 다른 하나는 모세를 통해서 주신 것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양심과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언급하자면, 양심은 율법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간의 양심은 그 완전함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람에 따라서 양심의 수준이 다릅니다. 선한 양심이 있는가 하면, 더러운 양심이 있습니다. 진리를 거슬려 거짓말과 악행을 좋아하는 자들은 그 양심이 화인 맞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본래의 순수한 상태를 회복하기 전에는 온전한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더러워진 양심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주신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9절과 2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을 이같이 말씀합니다. “19)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법이 없으면 죄도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법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죄가 죄로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 율법은 죄의 삯이 사망이라고 선언하고,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알려 줍니다. 율법에 의해서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될 자신의 비참한 운명에 대하여 알게 된 사람은 그 다음 단계로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곧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만 있다면 그로 인해 의롭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어서 스스로 비참한 운명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완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모든 조항을 하나도 어김이 없이 온전히 지켜야지 만일 그 중 하나라도 범하면 율법을 범한 죄인이 되고 맙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것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은 제 힘으로 무언가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제 고집대로 행합니다. 그 결과, 여러 종교가 생겨났습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의 공통점은 인간이 스스로 도를 닦아 의롭게 되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같은 세상 종교들의 주장은 범죄한 인간의 무능을 깨닫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통해서 자기의 절대 무능을 알게 된 사람은 그 다음 단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됩니다.

♪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이처럼 우리 자신이 죄인이며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완전 무능한 존재임을 아는 것은 구원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자신의 완전 무능을 철저하게 인식해야만 더 이상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범죄 한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택하신 방법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결론부터 말씀하면, 독생자를 죄인들의 구세주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에 앞서 어느 안식일에 고향 나사렛의 회당에 들어가셔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이사야서 61장의 구절을 읽으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16절로 21절에 이 같이 증언합니다.

“16)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종 된 인생들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자손을 해방시켰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죄의 종노릇하던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출애굽 당시에 이집트의 모든 장자가 죽임을 당하는 때에 히브리인들은 양의 피를 문에 바름으로 죽음을 면했습니다. 그 첫 번째 유월절에 희생당한 어린양들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보혈이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켰습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4절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노예해방선언과도 같습니다. 죄와 마귀와 사망의 종살이하던 인생들을 자유케 하시는 영적 해방선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주님의 보혈로써 모든 죄를 용서받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율법의 정죄를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6장 14절에 이르기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마귀는 그리스도인들을 간섭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해결했으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불화한 관계를 청산하고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진노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사랑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 15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 받은 성도들은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종은 자유가 없으나 아들은 자유합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5장 1절로 2절에서 사도는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여러분은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고 있으십니까? 오늘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이르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자유를 빼앗기고 다시금 종노릇하는 신자들이 있음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복음의 진리를 거역하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 믿음 이외에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을 지키지만 그것은 구원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함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여기에 무엇이라도 더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는 복음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지금 우리는 영적으로 매우 혼미한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이단들이 출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단에 속한 자들은 구원과 거리가 먼 자들로서 여전히 죄와 마귀의 종 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영적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7절 이하에서 사도는 이 같이 경고합니다.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화제 가운데 하나는 종교 간의 화해입니다. 종교를 가진 자나 종교가 없는 자를 막론하고 종교 간의 대화를 좋은 것으로 지지합니다. 우리도 타 종교를 적대시하지 않습니다. 타 종교를 비방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타 종교와 기독교를 혼동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간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하신 말씀과 같이,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종교다원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갈수록 우리의 영적 자유를 빼앗으려는 마귀의 도전이 더욱 치열해 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진리에 굳세게 서서 우리의 자유를 엿보는 자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적 자유를 너끈히 지켜나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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