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묶인 것에서 풀어지라 (요 11:39-44)
본문
평안하셨습니까? 지난 20여일을 지내면서 심봉사가 심청이를 키우던 생각을 했습니다. 심봉사가 심청이를 키울 때 젖동냥을 하면서 이집 저집에서 남의 젖을 먹이며 키우던 모습이 우리 교회 양들 같아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직 금식 중이라서 조금 무리가 가지만 내 양을 먹이기 위해 단 위에 섰습니다. 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은 베다니라는 마을에서 발걸음이 멈추셨습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발걸음이 멈추는 곳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길에서도 주님의 발걸음이 멈추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베다니라는 마을에 심방을 가게 되었습니다. 베다니라는 마을의 뜻은 “괴로움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괴로움이 있는 곳에 주님의 발걸음이 멈쳤다는 것입니다. 그 괴로움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풀어지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괴로움의 집”이라 불리는 이 베다니 마을에는 어떤 괴로움이 있었느냐?하면 죽음에 이르는 병이 있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고 했고, 3절에는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6절에는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은 계속해서 베다니에는 병든 자가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살 수 있는 병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불치 병이 걸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인생의 질병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너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자식 걱정이 태산입니다. 남편 걱정이 말이 아닙니다. 물질적인 문제로 눌려 삽니다. 결혼 문제로 직장 문제로 걱정이 많습니다. 장래와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 저것 생각하면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도 인생의 짐이 무거워 쓰러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우리는 베다니의 나사로와 다를 것이 없는 괴로움의 집에 살고 있습니다. 이 괴로움의 집에서 벗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따라해 봅시다. “내 속에 있는 괴로움의 질병아 나에게서 떠나 가라!”
어디 이뿐입니까? 현대인들은 자신의 몸이 조금만 아프면 혹시 암이 아닐까? 혹시 불치병이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죄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기도온에 오신 분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부자집에 장난꾸러기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아이가 새총을 만들었습니다. 새총을 만들었으니 무엇인가 쏴 맞춰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침 아버지가 키우는 귀한 오리가 있었습니다. 새 총을 막 만들어 가지고 나오는데 이 오리가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집어 넣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어린 마음에 그 새를 맟추고 싶지않겠습니까? 돌을 넣고 쏘았는데 정확하게 오리 머리통에 가서 맞아서 그 자리에서 오리가 죽고 말았습니다. 이 아이에게 갑자기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두려움은 이처럼 뜻하지 않게 오는 것입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알면 나는 이제 끝장 난다고 생각하고 오리를 몰래 뒷 마당에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 마음에는 늘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오리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 되지 않는한 인간들의 마음에는 어둠의 세력인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날 하인이 아들에게 말합니다. “도련님, 꼴 졸 베오시지요?” “아니, 내가 왜해? 그것은 네가 하는 일이잖아!” “도련님, 뒷 마당 오리!”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 아이가 꼴을 베왔을까요? 안베왔을까요? 그 아이는 이제부터 툭하면 소와 닭 꼴도 주어야 하고, 마당도 쓸어야 했습니다. 죄는 우리를 종으로 삼고 두려움을 주고, 인생의 문제를 만드는 것입니다. 마음에 병을 가져 오게 한 것입니다. 결국, 이 아이는 견디다 못해 아버지에게 죽을 각오를 하고 이 모든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아버지가 이 아이를 죽였을까요? 아버지는 그의 정직성을 칭찬했습니다. 안아 주었습니다.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 때부터 이 아이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하인 앞에서도 당당해 졌습니다. 아들의 신분이 회복되고, 권세가 회복되었습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 기쁨이 없는 사람, 장래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근본된 문제는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의 마음 때문입니다. 괴로움의 집에 살고 있는 베다니 마을 사람들의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에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얼마나 많은 죽음의 병이 있는지 모릅니다. 어둠의 세력이 역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괴로움은 육체의 질병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마음 속에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고,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알지 못하고, 우리를 인치시고 보증하신 성령님의 능력에 의지하지 앟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마음에 얼마나 많은 미음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속에 다른 사람에 대한 악한 분노가 있습니다. 우리 속에 육체적인 정욕이 있습니다. 우리 속에 악한 음행이 있습니다. 술 취함이 있습니다. 방탕함이 있습니다. 게으름이 있습니다. 우리 속에 사랑이 없습니다. 말씀과 삶이 다릅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사실이 우리 속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자꾸 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리를 죽인 아들처럼 아버지께 와서 회개하기만 하면 해결될 문제를 자꾸 숨기기 때문에 괴롭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이 심해지는 것입니다. 베다니 마을 사람들처럼 괴로움의 집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이 서로 마음을 열고 자신의 죄와 부족함을 말하면 서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베다니라는 괴로움의 집에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오늘 나사로는 병들어 죽었습니다. 죽음이라는 살 수 있다는 소망을 완전히 없앤 것입니다. 베다니라는 괴로움의 집에 이제 괴로움을 넘어선 슬픔과 완전한 절망이 찾아 온 것입니다. 죽은 사람에게 어떤 희망이 있겠습니까? 죽기 전에는 그래도 살 수 있다, 죽기 전에는 그래도 살려 보자라는 희망이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다음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희망과 소망이 없었는지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마르다는 주님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 그의 동생 마리아도 말하기를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절)고 합니다. 33절 말씀에 보면 이 죽음의 현장에 마르다도 울었고, 마리아도 울었고 모인 모든 사람들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눈물을 흘린 것은 그들 속에 있었던 소망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말처럼 주님께서 조금만 더 일찍 오셨다면 이렇게 눈물을 흘릴 이유가 있었을까요? 죽음의 집이 될 필요가 있었을까요? 3절 말씀에는 나사로를 가리켜 “사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5절에도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고 했습니다.
따라해 봅시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분명히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셨고,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빨리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보다 빨리 모든 일을 뒤로하고, 죽기 전에 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생각에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기 전에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하는 것이 당연한 주님의 의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18절을 보면 베다니는 주님께서 계신 예루살렘에서 아주 멀리 수천 수백 킬로 떨어져 있는 동네도 아니었습니다. 몇 날 며칠을 걸어가야 하는 곳도 아니었습니다. 불과 예루살렘에서 3Km 정도 되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걸어서 한 시간도 안 되는 거리였지만 주님은 그가 병들었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그에게 가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모든 소망이 사라진 뒤에야 주님은 그 집을 향해 걸어 가셨습니다.
따라 합시다. “그래도 소망을 가지자” 나사로는 이제 죽었습니다. 그의 시체를 보면서 어느 누구도 살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풍습에 따라 돌무덤에 그를 안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벌써 죽은 지 사흘이나 되었고, 사흘이나 된 시체에서는 썩은 냄새가 코를 진동했습니다. 무덤에 들어가서 썩어가고 있는 시체에서는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없지만, 주님에게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소망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주님이 우리의 주가 되신다면 끝까지 포기하면 안됩니다. 주님은 산 자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죽은 자의 하나님되 되십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끝났다고 할 수 있지만, 주님의 눈에는 끝이 아닐 수 있습니다. 주님의 눈에는 산자나 죽은 자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소망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어느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 부인에게는 딸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아들은 몇 명 있었지만 딸이 하나기 때문에 얼마나 귀엽고 예쁘게 키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자라면서 그만 타락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친구와도 잠자리를 같이하고, 오빠 친구들과도 이 호텔 저 호텔을 다니면서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직장을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오빠들도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이 부인은 그 딸이 죽었으면 좋겠다고까지 기도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딸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지 말고, 그 딸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을 믿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부인은 자신이 받은 상처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애는 너무나도 더럽고 천박하고 추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집사님,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나요? 죄인을 위해서가 아닙니까? 지금부터 딸이 변화 될 것을 믿고, 그 딸이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아 새롭게 될 것을 믿으십시오. 머리 속에 변화된 딸의 모습을 그리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그 때부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변화된 딸의 모습을 마음에 두고 머리 속으로 그리며 기도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했습니다. 부인이 기도한지 몇 주가 지났습니다. 그 날도 딸은 어느 이름모를 남자를 만나 호텔에서 잠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마음에 자신이 정말 창녀 같다는 생각이 들어 왔습니다. 자신이 정신적으로 아주 불구자이고, 불행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마지막으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고,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 때,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가슴으로 앉아 주었습니다. 그 딸에게 가지고 있었던 미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 딸과 어머니는 목놓아 함께 울었고, 그후부터 놀랍게도 그 부인이 마음에 그리며 기도했던 모습으로 그 딸은 완전히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부정적인 마음들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시각들이 있습니다. 안된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안된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살아 계심이 분명한 사실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절대로 절망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은 4절 말씀을 보면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40절에는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따라합니다. “인간의 방법으로는 안된다 주님께 의지하자” 이제 생각해 보십시오. 나사로가 죽었으니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은 멈춰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방법으로 그를 살려 보겠다는 시도나 생각은 이제 그곳에 없습니다. 오직 그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본문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는 오직 네 방법과 네 생각을 포기하고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만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를 향한 인간적인 희망과 그를 향한 인간적인 방법이 모두 포기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인간의 방법과 인간적인 소망이 포기되어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주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앞으로 나가기를 원합니다.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는 손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전쟁은 칼이나 창과 같은 무기로 승리하는 줄 알았지만, 하나님은 기도로 승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다윗은 물매돌 다섯 개를 가지고 골리앗 앞으로 나갔습니다.
인간의 방법을 포기하고 주님께만 의지해야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를 체험하고, 믿음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방법을 다 동원해서 일이 안되면 겨우 주님께 와서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참 어리석은 짓입니다. 베드로처럼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져야 합니다. “내 생각에는 ...”이라는 것을 포기하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붙들고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믿으면 기적을 볼 것입니다.
4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따라합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42절에서도 주님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결정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세상의 방법이나 자신의 경험이나 자신의 지식을 선택할 것인가? 믿음은 언제나 이와같은 결단을 요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있지만 그리고 말씀을 듣지만 주님의 능력과 권세에는 의지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그들의 인생의 문을 여는 열쇠요 해결 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38절에서 우리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시고, 주님께서 통분이 여기셨다는 구절을 읽을 수 있습니다. 통분이 여기다라는 말씀은 “화가 나서 씩씩거리다”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주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은 주님을 분노하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베다니라는 마을에 오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베다니는 “괴로움의 집”이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괴로움의 집에 오신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마태복음 1:21절에는 천사가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놀랍게도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괴로움과 죽음과 슬픔의 눈물이 있는 베다니라는 괴로움의 집”에 구원자로서 그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그분이 있는 곳에는 구원의 역사가 있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며, 인생의 문제가 해결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영접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은 죽은 나사로와 같은 인생들을 향해 큰 소리로 “나오라”고 합니다. 큰 소리로 따라합니다.“문제의 무덤에서 나오라”더 큰 소리로 소리칩니다. “나오라!” “나오라” “나오라”
우리는 이제 나사로가 되어야 합니다. 나사로라는 뜻은“하나님의 도움”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 나사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의 무덤에서 나온 나사로를 향해 주님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문제가 풀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죄의 문제야 풀어질 지어다. 질병의 문제야 풀어 질지어다, 가정의 문제야 풀어질지어다. 돈 문제야 풀어질지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모든 인생을 묶고 있는 어둠의 권세는 물러가고 풀어질 지어다. 진실로 인생의 삶 속에서 감겨져 있고, 뭉쳐져 있고, 엉켜 있는 마음의 모든 찌꺼기들과 인생의 모든 문제들아 풀어져라!
이제 자신들이 풀어져야 할 문제를 놓고 기도합니다
(한용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