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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에 머물라 (눅 24:4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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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에 머물라 (눅 24:44-53)


이 성에 머물라
누가복음 24:44-53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50)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51)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 시니 (52)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지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거하면서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두 가지를 부탁합니다. 46-48절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어 모든 족속에게 이르러 죄사함의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49절 말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보내리니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이 성, 곧 예루살렘에 유하라는 말씀입니다.

복음 전파 명령은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명령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성령도 실은 전도의 영으로 오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내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예수의 증인으로 설 수 있는 권능을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는 그래서 자기만족적인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항상 밖을 향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벗어나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전도를 단순히 포교행위나 교회의 숫자를 채우는 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창조주를 알지 못하고 사는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삶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믿고 이 험한 세상을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냉정합니다. 세상은 살벌합니다. 오직 믿을 것은 자기 자신뿐인데 자기는 완벽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딱 정신병 걸리기 쉽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 이름 하나 붙잡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인지 모릅니다. 원칙 없는 세상에 하나님 말씀이 우리 빛이 되니 얼마나 확실한지 모릅니다. 우리 빛과생명 교회 성도님들도 이 복음을 세상에 나아가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좀 더 묵상하길 원하는 것은 두 번째 명령인 ‘이 성에 유하라’는 명령입니다. 주님의 부활도 보았겠다, 선교명령도 받았겠다,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제자들을 주님은 말립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성령을 기다리라 말씀합니다. 그 성령은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이라 표현합니다. 주님은 왜 이런 명령을 내렸을까요?

첫째는 주님은 우리가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광고 카피 중에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라는 광고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능력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75세의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너로 복의 근원 삼겠다고 하십니다. 나이의 무게에 짓눌린 인생으로 하여금 능력을 부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60장 22절에서는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는 비전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십니다. 능력 있는 백성을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능력은 ‘두나미스’입니다. 다이나마이트라는 단어가 여기서 파생되었습니다. 다이나마이트는 아주 작은 것이지만 여기에 불이 붙으면 온 주변을 산산조각 내고 맙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학문이 없는 범인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을 결정적으로 바꾸었던 것은 위로부터의 능력, 곧 성령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어부 베드로가 위대한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복음을 전하자 3천 명, 5천 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느 날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다 앉은뱅이를 보았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하니 앉은뱅이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전4:20),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살전1:5)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현장에서는 병 고침과 귀신이 축출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현장에서는 사람들이 과거의 우상과 타락한 옛 성품들을 버리고 새롭게 거듭나는 도덕적 갱신이 일어났습니다. 에베소 교회에서는 마술 책을 다 불사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양이 은 오만이나(수천 권) 되었다고 합니다. 술 취하며 살던 사람들이 성령의 취함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기쁨이 있었고,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되는 평화가 있었습니다.

현대 신학의의 거장은 칼 바르트입니다. 칼 바르트를 보수적인 사람들은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비판을 하지만 잘못 되었습니다. 칼 바르트는 오히려 자유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사람입니다. 당시 자유주의자는 1차 세계대전 중에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이에 자유주의의 한계를 느낀 칼 바르트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으니 모든 인간은 잠잠할 지어다”(전5:2) 하며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는 운동을 펼쳤습니다. 칼 바르트의 로마서주석은 이런 의도에서 집필한 것입니다. 이 책을 당시 신학계는 자유주의라는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에 비유할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인간의 생각을 깨뜨리는 폭탄입니다. 당시는 민족주의와 이성주의를 깨뜨리는 폭탄이었습니다.

이런 칼 바르트에게 막대한 영향을 마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블룸하르트 부자(요한 블룸하르트,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입니다. 아버지 블룸하르트의 목회를 결정적으로 바꾸었던 것은 귀신에 들렸던 고트리빈 디투스라는 소녀와의 영적 싸움의 경험이었습니다. 이 소녀는 전형적인 빙의 현상을 보였습니다. 이상한 말을 하고 이상항 형제가 보인다고 말하기도 햇습니다. 거품을 내 품고 자주 병에 걸리고, 그야말로 영화의 장면들처럼 집안에 있는 물건들이 갑자기 흔들리기도 하였습니다. 이 지역의 목회자였던 아버지 블룸하르트는 이 사건 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나 그 소녀의 손을 잡고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손을 모으고 기도해! 예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마귀가 하는 것을 충분히 보았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그러자 발작이 멈추고 소녀가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가장 깜짝 놀랐던 것은 블룸하르트였습니다. 예수의 이름에 이런 능력이 있는 것에 놀랐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영적싸움은 1년 반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언니의 병 때문에 이 소녀의 동생까지도 병에 걸렸었는데 이 싸움은 결국 성탄절 무렵이 되어서야 끝이 납니다. 이때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데 그 동생이 발광을 하면서 큰소리를 지르다가 귀신이 최종적으로 떠나갔습니다. 이때 마지막으로 이 소녀의 입으로 외쳤던 것은 “예수는 승리자다” “예수는 승리자다”는 외침이었습니다. 이 ‘예수는 승리자’다는 말은 이후 블룸하르트 부자의 신앙적 슬로건이 되었습니다. 당시는 이성주의와 진보적 낙관주의가 판을 치던 19세기였습니다. 그런데 인간 이성으로는 제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예수의 이름의 능력으로 제어한 것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이 마을에 놀라운 각성운동과 참회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블룸하르트' 목사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목사관에 찾아와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참회했습니다. 만성 알코올 중독자들이 술을 끊고 회의에 빠진 사람들이 다시 믿게 되었으며 병든 사람들이 다시 그들의 건강을 회복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동안 텅 비었던 교회가 가득 찼고 평일에도 사람들은 교회에 모여 성서를 읽고 찬양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정규적인 예배 외에 특별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예수는 승리자이십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예수가 승리자로서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우리 빛과생명 교회가 능력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곳에 오면 기도 응답이 있다. 이곳에 오면 희망이 있고 사랑이 있다. 이곳에 오면 해답이 있다.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도 그렇게 되었으면 합니다. 여러분 안에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와서 상담을 받고, 기도를 받을 수 있는 그런 능력의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둘째는 자기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전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의 얼굴만 바라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념과 운동에 끌려다니던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자기 스스로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가 밖에 있어서는 안 되고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제자들의 관심이 끊임없이 정치적인 것을 봅니다.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때가 언제 입니까?” 그러자 주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 속한 것이니 너희의 알 바 아니다” 고 하시며 “오직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마디로 쓸데없는 일에 관심 끊고 네 할 일이나 하라는 말씀입니다. 할 일이 무어냐 하면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한 실제적인 출발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니, 이스라엘 나라니 하는 정치적이고 큰 이야기들은 다 쓸데없다는 뜻입니다. 너희 한 사람 한사람이 성령 받아서 변화되고 능력 받는 게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일반 사회 운동이나 정치 운동은 구조나 법을 바꾸려고 하지만 기독교는 사람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아무리 구조를 바꾸어도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한 사람이 바뀌어야 세계가 바뀝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을 받아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아갈 때 바로 거기에 하나님 나라는 임하고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수피 바야지드의 기도문).

내가 젊었을 때 나는 혁명가였고 하느님께 드린 나의 기도는
“주여 저에게 세상을 뒤엎을 힘을 주소서.” 였네.
그러나 내가 중년에 이르러 내 인생의 절반이 덧없이 흘렀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기도의 내용을 바꾸었네.
“주여 저에게 저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변화시킬 힘을 주소서.”
그러나 나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주위에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을 보았네
이제 내가 늙고 여생을 헤아리게 되면서 나는 나의 우둔함을 눈치 채게 되었다네.
지금의 내 기도는 이렇게 되었네.
“주여 저에게 내 자신을 변화시킬 힘을 주소서!”
내가 처음부터 이런 기도를 했더라면 내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을 거야.

다른 사람 바꾸려고 하지 마십시오. 바꿀 수도 없습니다. 자기를 바꾸십시오. 자꾸 세상 탓하지 말고, 환경 탓하지 말고 자기를 바꾸십시오. 그러면 세상이 바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온 영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 성령 받아야 믿어지고, 성령 받아야 생각이 바뀌고, 성령 받아야 능력 받고, 성령을 받아야 온갖 악한 습관이 끊어집니다.

한 개인의 변화는 성령을 받을 때 가능합니다. 그런데 성령충만을 받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자주 오해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믿음이 생기고, 방언을 말하고, 심지어 예언을 행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 게 다가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를 신비적이고 감정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성령이 임할 때 일어나는 더 중요한 변화는 자기 생각이 죽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이 죽는 것입니다. 대신 예수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자기를 복종시키려고 합니다.

블룸하르트 부자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아들 블름하르트는 독일의 종교사회주의 운동의 선구자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하시는 ‘예수는 승리자’라는 목회 방침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들 블룸하르트는 여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갑니다. 그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 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 신체적 치료만을 바라고 나아와 고침만 받지 자기 본래의 이기적 중심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데에 대한 실망감에서였습니다. 인간에게 무엇보다 절박한 것은 그분과 나 사이에 의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비록 인간들의 정신적 신체적 결함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가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고 예배한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건강한 존재입니다. 오히려 몸이 건강해도 하나님의 의가 없다면 그 사람은 전혀 건강하지 못한 존재입니다. 육체적 건강이나 행복은 이런 의의 관계가 회복될 때 주어지는 부산물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180도의 방향전환을 의미합니다. 즉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나로의 전환입니다. 그래서 아들 블룸하르트는 그 중심 신앙 슬로건 수정합니다. ‘예수는 승리자’란 슬로건 위에 “죽어라, 그래야 예수가 산다”라는 슬로건을 보강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현대 교회는 이 반대인 것 같습니다. 은과 금은 있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복음이 우습게 여김을 받습니다. 교회 십자가가 세우는 것에 부담이 들 정도로 교회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입니다. 아무리 복음이 임해도 우리의 편견이나 고집, 이기심들이 꺾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 복음이 전락됩니다. 성령충만은 예수충만입니다. 성령이 잘못하면 자기 이기적 욕심을 만족케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 경배의 대상이지 우리가 부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령충만은 우리 이기심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예수의 증인으로 살도록 만드는 능력입니다.

셋째는 우리에겐 준비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버지 블룸하르트가 처음 귀신을 축출하는데 걸린 시간은 무려 1년 반이나 걸렸습니다. 왜 예수님처럼 단 번에 고치시도록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연단을 받습니다. 기도의 훈련을 받고, 말씀의 약속을 확인하며, 실전에서 담대함을 얻습니다. 이렇게 연단 받은 후의 후 블룸하르트의 사역은 놀랄 정도였습니다. 교회당 안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어 창문을 통해서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다가 병이 낫는 기적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아픈 만큼 성장하고 연단 받은 만큼 큰 그릇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곧바로 사역자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동안 주님으로부터 훈련을 받습니다. 그리고 다소라는 곳에서 또 10년을 조용히 후학들을 가르치며 보냈습니다. 그러다 바나바가 안디옥으로 바울을 초청함으로써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합니다. 13년의 준비기간이 있었습니다.

빨리빨리 하고 싶은 데 사람이나 사회의 성장은 시간이 요구됩니다. 성수대교 붕괴나 삼품백화점 붕괴와 같은 사건은 고속 성장에 대한 대가입니다. 몸은 어떻게 빨리 성장시켰지만 정신이 따라오지 않으니 부실이 많고, 부정직이 많습니다. 우리 사회의 사회적 혼란도 그렇습니다. 서구는 몇백 년에 걸쳐 민주주의와 여권신장을 이루었는데 우리는 짧은 시간에 그것을 이루려하니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에 머물라’는 이유입니다. 모든 족속을 향하여 나아가기 전에 먼저 내실을 다지라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상처가 있으면 그런 사람의 복음 전도는 상처의 세계화로 귀결될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유래를 볼 수 없는 개교회주의와 교파주의입니다. 다 미국식 근본주의 교파주의 선교의 결과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가 현재 중국선교나 북한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실제 노력을 하고 있는데 우리의 상처나 오류마저 선교하고 있지 않은지 염려됩니다.

주님은 성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를 돌아보시길 원하십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무슨 일을 했는가? 44-45절에 비추어 볼 때 말씀연구에 집중했을 것 같습니다. 25절에 보면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으로부터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하는 책망을 받았던 전력에 비추어보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후 베드로나 제자들의 설교가 깊어지고 권세 있는 자의 말처럼 되었던 것은 이런 말씀연구가 바탕이 되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깨달음의 과정은 처음에는 오래 걸리지만 어떤 계기를 만나면 비약적으로 발전하니까요. 또한 그들은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곳곳에는 그들이 모여서 전혀 기도에 힘썼다는 기록들이 나와 있습니다.(1:14, 2:1, 2:42, 4:30-31, 6:4, 12:5-7, 13:3, 16:25-26) 또 오늘 읽은 53절 말씀에 보면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고 전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을 소망하는 것이 바로 찬미입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에 머물러 말씀과 기도와 찬미로 준비했습니다. 그러자 성령이 임하고 그들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를 증거하는 능력 있는 사역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성에 머물며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받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심령이 더 간절해야 하겠고, 더 자주 모이며 기도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말씀을 연구하고 하나님을 찬미하기를 즐겨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넘치는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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