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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존재가 되는 4대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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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존재가 되는 4대 원리
열왕기상 17장 8-16절

<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십시오 >

지난주 토요일에 정OO 집사님이 가족들과 강원도에 놀러가게 되었습니다. 이미 민박집까지 정한 상태였습니다. 제가 그곳에 가서도 꼭 주일성수를 하라고 했습니다. 때로 가족들과 주일이 포함된 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성수에 대한 계획은 반드시 하고 여행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대단히 기쁘게 보실 것입니다.

토요일 11시쯤 출발을 하려고 다른 가족들이 집사님 집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일말씀 요약을 정오쯤 주었습니다. 할 수 없이 집사님은 예배 슬라이드를 만드느라고 여행 출발을 늦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옆에 있는 가족들은 짜증이 났을 것입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예배 준비를 다 해놓고 오후 2시 넘어서 출발을 했습니다.

원주쯤 도착했을 때 차가 너무 밀렸고 비 때문에 길이 막혔습니다. 라디오를 틀어 홍수방송을 들었습니다. 상황을 알아보려고 예약한 민박집에 전화를 했습니다. 전화가 불통이었습니다. 근처의 군청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지금 물난리가 났으니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급히 여행 방향을 대구 쪽으로 틀었습니다. 그리고 팔공산 근처에서 2박 3일간 즐겁게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나중에 정 집사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예약한 집도 물에 떠내려간 것 같아요. 만약 그때 3시간 전에 정선으로 들어갔으면 우리도 죽었을지 몰라요.” 제가 말했습니다. “집사님! 집사님이 먼저 예배 준비를 하니까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하셨어요.”

우리는 언제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때로 한 길이 막혀서 조금 늦게 가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리에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만 하면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지금 삶이 메마른 것 같고 잘 풀리지 않는 것 같습니까? 그래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보십시오. 그러면 우리 삶과 영혼에 생수의 강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 복된 존재가 되는 원리 >

오늘 본문에는 사르밧 과부에게 주어진 축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 복된 존재가 되는 몇 가지 원리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복된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1. 훈련을 통과해야 합니다.

본문 8-9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으니라.”

본문 바로 앞부분을 보면 엘리야는 아합에게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고 그릿 시냇가에 숨어 지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곳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까마귀가 아침저녁으로 가져다주는 양식으로 연명했습니다. 그런데 물까지 떨어졌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르밧 과부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먹고살기 힘든 곳으로만 보내십니까? 간단히 말하면 그런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훈련과 시련은 같은 개념입니다. 시련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연단 과정이고, 훈련은 내가 자원해서 뛰어든 연단 과정입니다. 그처럼 훈련이든지 시련이든지 많이 통과할수록 축복된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축복된 존재로 만들려고 그릿 시냇가에서의 어려운 훈련을 마친 그를 다시 사르밧 지역의 가난한 과부에게로 보낸 것입니다. 이 훈련은 쉽지 않은 훈련이었습니다. 왜 쉽지 않았을까요?

첫째, 사르밧이 속한 시돈 땅은 당시 사악한 왕비 이세벨의 고향으로 엘리야에게는 적진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때로는 문제의 중심으로 들어가 훈련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곳이 적진 깊숙한 곳이니까 사람들은 엘리야가 그곳에 숨었을 것이라고는 전혀 의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적진 깊숙한 곳은 피난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피하지만 말고 때로는 문제 깊이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본문 12절 말씀을 보면 사르밧 과부는 너무 먹을 것이 없어 마지막 한 끼 식사를 하고 죽으려고 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여인에게 가면 엘리야도 마찬가지로 먹는 문제로 훈련받아야 합니다. 물질 훈련은 가장 보편적인 훈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물질 훈련을 통해서 낮아지고 겸손해집니다.

셋째, 그 훈련은 엘리야에게는 그릿 시냇가 훈련 후 연속된 훈련이었기에 쉽지 않았습니다. 사람에게 어려움이 한 번으로 끝난다면 그런대로 견딜 만 합니다. 그러나 훈련이란 항상 반복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한 번에 잘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역기 한 번 들고 몸이 좋아지면 다 역기를 들고, 에어로빅 한 번 해서 몸매가 좋아진다면 다 에어로빅을 할 것입니다. 공부도 한 번 해서 성적이 오른다면 누가 공부를 안 하겠습니까?

대개 보면 시험과 훈련은 끊임없이 계속되기 때문에 중도에서 포기하고 축복의 대열에서 탈락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이 반복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의 근육이 좋아지지 않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께서 때로는 연속해서 어려운 과정을 허락하십니다. 그때 겸손한 심령으로 훈련을 잘 소화시킬 때 그 사람이 복된 존재가 될 것입니다.

1878년, 구세군의 명성이 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구세군에 입대했습니다. 그 중에 사무엘 브렝글이라는 미국인도 있었습니다. 그를 보고 윌리암 부스 사령관은 그에게 다른 훈련병들의 군화 닦는 일을 시켰습니다. 그러자 브렝글이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기껏 군화나 닦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 이곳에 왔나?”

바로 그때 환상 중에 그는 예수님이 거칠고 무식한 어부들의 발을 씻겨주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이 그들의 발을 씻기셨군요. 그렇다면 이제 저는 저들의 구두를 닦겠습니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훈련병들의 군화를 닦아주었습니다. 그런 자세를 가지고 섬겼기에 그는 구세군 최초의 미국인 감독이 되었습니다.

살다 보면 시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일을 결심했으면서 시련이 있다고 흔들리면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시련이 오면 그때야말로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고, 우리의 너그러움을 보여줄 때입니다. 그때 우리의 인격과 가치관과 신앙이 다 드러납니다. 우리기 시련이 있어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믿음을 가지고 나가면 반드시 복된 역사가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2.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엘리야는 하나님이 가라고 하면 갔습니다. 사르밧 과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11절에서 엘리야가 그녀에게 떡 한 조각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떡은 없고 통에 가루 조금, 병에 기름 조금 있는데 그것으로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그때 엘리야가 떡 하나를 만들어 가져오라고 한 것은 과부의 순종하는 믿음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결국 과부가 엘리야의 말대로 순종하니까 정말 엘리야의 말대로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않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엘리야의 말에 이런 권세가 있게 되었습니까? 그가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사르밧 과부가 왜 축복받게 되었습니까? 그녀가 어려운 중에도 엘리야의 말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유학 시절에 금방 없어질 돈만 가진 채 간신히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무슨 필요를 들으면 그냥 잘 지나가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마침 교회 건축할 일이 생겨서 20년 전 당시 한 학기 등록금을 헌금했습니다. 돈이 생명처럼 소중할 때 그렇게 건축헌금을 작정해서 훨씬 살기 힘들고 일도 더해야 했지만 그렇게 바치니까 하나님께서 새로운 사는 길을 열어주셨고, 공부도 잘 마치게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무엇보다 순종하기 어려울 때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감동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마지막 남은 것을 내가 취하면 그것은 정말 마지막이 되지만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그것은 기적의 씨앗이 됩니다. 우리는 축복만 바라지 말고 축복의 씨앗을 심고, 기적만 바라지 말고 기적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기적은 순종하기 어려울 때 순종하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면 말에도 권세가 나타나고 기도에도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지나가는 말로 “모든 것이 잘될 겁니다.”라고 말하면 정말 모든 것이 잘되는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를 많이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특히 어려울 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애쓰면 그가 드리는 기도에 놀라운 권세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3. 주의 종을 잘 섬겨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보냈습니까? 본문 9절 말씀처럼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를 공궤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에서 “공궤한다”는 말은 “윗사람에게 먹을 것을 바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참 이상하십니다. 주의 종을 공궤하게 하려면 좀 있는 사람에게 보내어 공궤 받게 할 일이지 하필이면 자기 한 몸 추스르기도 힘든 과부에게 보내어 공궤 받게 하십니까? 그런데 그런 힘든 사람에게 주의 종을 붙여 섬기게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때 어려운 중에도 주의 종을 잘 섬기면 그 가운데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선교사님을 잘 섬기고 힘들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의 먹을 것을 책임지게 하시는 것은 사르밧 과부의 가장 당면한 과제인 먹는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거룩한 부담을 지게 하시면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형편이 어려운데 이런 부담스런 일을 시킬까?”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때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한 부담을 주시는 것은 인생의 짐을 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의 짐을 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요새 저에게는 선교사님이 많은 편지를 보내오고 많이 찾아오는 편입니다. 그분들의 기도제목을 들으면 솔직히 부담이 됩니다. 그러나 그 기도제목을 듣는 것은 부담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해결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선교사님의 기도제목을 들으면 그 문제를 “내가 맡겠다”고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선교사님을 공궤하고 그의 필요를 채울 때 우리에게는 당면한 문제 해결의 문도 열리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 임준호 선교사님의 기도편지를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선교사님은 지금 몽골에 우물을 파주는 사역을 새롭게 시작하면서 ‘사랑의 1미터 파기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모금 목표액은 총 10개의 우물을 파는데 2만 불(약 2천만 원)이고, 150미터까지 팔 수 있는 우물 파는 기계 구입비 3만 불(약 3천만 원)입니다. 선교사님의 사역은 도움을 주실 분들은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임준호 선교사님 사역여정 보시려면 여기 클릭) (임준호 선교사님 최근편지 보시려면 여기클릭)

가끔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저도 살기 힘든데 어떻게 선교사님을 돕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마지막 것을 먼저 드리라!” 먼저 할 일은 먼저 해야 합니다. 극한 상황에서 먼저 거룩한 일을 하라는 것은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인가 거룩한 부담을 주는 얘기가 들리면 그 얘기가 우리에게 복 주시는 얘기인 줄 알아야 합니다. 선교사님의 기도제목을 들으면 “우리에게 복 주시려고 저 얘기를 듣게 하셨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기를 원하면 무엇보다 주의 종을 감동시켜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큰 것을 주어야 감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이라도 마음과 정성이 담긴 영적인 별미를 바치는 모습을 볼 때 감동합니다.

본문 10절에서 엘리야가 물을 달라고 하자 그녀는 산에서 나무 줍고 그 나무를 가지고 마지막 한 끼 식사를 하려는 극한 상황에서도 나무 줍는 일을 중단하고 물을 가지러 갔습니다. 그처럼 작은 행동으로 엘리야를 먼저 감동시켰기 때문에 엘리야가 그녀에게 축복을 주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왔을 것입니다. 그처럼 어려움 중에도 주의 종을 힘써 섬기면 하나님께서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4. 마음이 따뜻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르밧 과부는 사실 엘리야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인 줄 몰랐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곧 죽게 된 순간에서까지 엘리야에게 물과 떡을 나눠주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시의 재력가에게 엘리야를 보내지 않고 힘없는 과부를 통해 엘리야를 공궤하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은 재력가의 재력보다 사르밧 과부가 가진 따뜻한 마음을 더 귀하게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돕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정말 복된 존재가 되기를 원하면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세워주고 사람을 일으켜주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사람에게 좌절감을 주고, 사람을 무너뜨리는 사람은 결코 축복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그는 능력 있는 기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공동체에 가든지 섬김 받는 주인공이 되려고 하지 말고 섬겨주고 위로해주는 주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처럼 어디 가든지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베푸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결국 베푸는 길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빈민구호 단체인 엠마우스 공동체를 창설한 프랑스의 피에로 신부님이 쓴 ‘단순한 기쁨’이란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자살 직전에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살하려고 하는 이유를 죽 설명했습니다. 그 얘기를 다 듣고 신부님이 물었습니다. “정말 충분히 자살할 이유가 있네요. 그런데 자살하기 전에 이왕 자살할 거라면 죽기 전에 저를 좀 도와주고 죽으면 안 될까요?” 그가 말했습니다. “뭐 어차피 죽을 건데 죽기 전에 신부님이 필요하다면 제가 얼마간 신부님을 돕겠습니다.”

그 다음부터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집 짓는 일을 같이 돕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그는 자살을 포기하고 말했습니다. “만약 그때 신부님이 돈을 주었든지, 살수 있는 집을 지어주었던지, 자비를 베풀었더라면 저는 결국 자살했을 겁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내게 아무 것도 주지 않고 오히려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과 같이 어려운 사람을 섬기면서 저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고, 무엇이 행복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삶의 의미와 행복은 내 것을 나눠줌에 있습니다. 어떤 분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아이들이 평생 남에게 사랑받고 존경받으며 살기를 원합니다.” 정말 그 아이는 사랑 많이 받고 관심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부모님이 기도제목을 바꾸었습니다. “하나님! 제 아이들이 남을 많이 섬겨주고 도와주고 대접하는 삶을 살게 해주소서!” 행복은 받는데 있지 않고 주는데 있습니다.

< 많이 드리고 베푸는 꿈을 가지십시오 >

결국 사르밧 과부는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않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물질적인 축복을 받았습니다. 물질을 심자 물질이 채워진 것입니다. 남을 물질적으로 도우면 하나님으로부터 물질적인 도움을 받습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17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그녀의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베푸는 삶을 실천하면 하나님은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 자녀들을 살려주실 것입니다. 사실 부모가 주의 종을 잘 섬기고, 이웃에게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베푸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들이 잘못 되겠습니까? 그 자녀는 틀림없이 그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게 될 것입니다.

육이오 직후 울산에 동태를 파는 한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동태 장사를 하면서도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죽기 전에 반듯한 성전 하나 봉헌하고 천국에 갈 수 있게 해주소서!” 그렇게 10년 가까이 기도했는데 여전히 삶에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동태를 이고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꿈을 기억해주세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세요.”

어느 날, 한 아는 할머니가 그분을 불렀습니다. 그래서 가보니까 그 할머니가 골동품 상자에서 복주머니 하나를 꺼내 풀면서 말했습니다. “여보게. 이 동전들은 내가 평생 모은 동전 보따리들인데 이 보따리랑 동태 한 상자를 바꿔주게.” 그분은 평생 모은 동전 보따리라는 말에 감동이 되어서 그냥 동태 한 상자와 바꾸어 주었습니다.

집에 가서 그 복주머니를 풀어보자 동전도 아닌 이상한 것이 하나 들어 있었습니다. 너무 이상해서 목사님께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도 보니까 하도 이상해서 서울 인사동 골동품 가게에 들러서 감정을 의뢰했습니다. 가게 주인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값을 많이 쳐줄 테니 팔라고 했습니다. “얼마 주겠소!” 하고 물으니 10만원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가슴이 덜덜 떨렸습니다. 45년 전에 10만 원이면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내 물건이 아니고 감정만 하러 온 것이니까 팔 수 없습니다.” 그때 가게 주인이 다시 팔라고 조르면서 “100만원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목사님은 그게 엄청난 골동품임을 눈치 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팔 수 없다면서 가게 밖으로 나오자 가게 주인이 나와서 붙잡으며 이번에는 200만원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 백만 원씩 500만원까지 올랐습니다. 그래도 목사님이 안 팔겠다고 하자 가게 주인이 말했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600만원 주겠습니다. 안 되면 그냥 갖고 가세요.” 그때 목사님은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느끼고 600만원에 팔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골동품은 6.25 때 미군장교가 가지고 있던 것인데, 그 미군장교가 전사해서 몸이 다 썩고 그 골동품만 남은 것을 할머니가 산에 갔다가 주워 놓았던 것입니다.

목사님은 6백만 원을 들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고 울산에 내려와 그 집사님에게 600만원을 보여주자 집사님이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살아 계심을 보여주셨군요.” 그 집사님은 400만원을 목사님께 건축헌금으로 드렸습니다.

200만 원이 남았습니다. 집사님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돈으로 무엇을 할까요?” 며칠 동안 기도하는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울산 바닷가에 있는 모래 자갈밭을 환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 자갈밭은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도 자라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거저 주어도 안 갖는 땅인데, 기도만 하면 그 자갈밭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땅이 모두 5천 평인데 평당 300원씩 해서 150만원을 주어 샀습니다.

그분은 그 땅을 가지고 몇 년 동안 계속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땅을 어떻게 사용하실 건가요?” 어느 날, 집사님 집에 자가용 한 대가 멈추더니 두 명의 신사가 내렸습니다. 그들은 가방을 열더니 서류를 꺼내놓고 자기 땅을 팔라고 했습니다. 얼마 주겠냐고 물으니 1천만 원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집사님은 팔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다시 며칠 후, 그 신사 일행이 또 와서 1억을 줄 테니까 그 땅을 팔라고 했습니다. 안 판다고 했습니다. 2억원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안 판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29억원에 팔았습니다. 그곳이 울산 현대자동차 정문 자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집사님은 다시 교회에 2억원을 건축헌금으로 내놓아 교회당을 크고 아름답게 지어 드렸습니다. 나머지 27억원으로 무엇을 할까 하고 기도하다가 다시 땅을 샀는데 몇 년 후에 그 땅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바람에 그 집사님은 수천억 원대의 거부가 되었습니다. 결국 죽기 전에 성전 하나 짓게 해달라는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멋지게 이루어주셨고, 그 꿈을 좋게 보시고 물질적인 축복의 문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물론 그렇게 거부가 되는 것은 보편적인 사례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소중한 꿈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받으시고 우리의 생각하는 것이나 구하는 것보다 더욱 넘치게 주실 것입니다. 이제 돈을 붙잡고 돈에 연연해서 살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비전을 붙잡고 사십시오. 그런 비전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잘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잘 사는 사람’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하나님도 모르고 선한 일도 할 줄 모르고 그저 물질만 많은 못난 사람이 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누구보다 ‘잘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죽을 때도 “저분은 정말 잘 사셨어!”라는 소리를 듣고 하나님 앞에 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가서도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제 시련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자가 되고, 주의 종을 잘 섬겨주고, 드리고 베푸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러면 사르밧 과부처럼 복된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 축복받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축복을 나눠줄 수 있는 엘리야나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되는 꿈을 꾸십시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크게 쓰임 받는 진짜 잘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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