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와 실리 사이에서 (막 14:53-65)
본문
체포된 예수님은 우선 유대 재판정에 서게 됩니다. 당시 세계를 재패하고 있던 로마제국은 식민지에 사형집행권을 제외하고 상당한 사법적 자율권을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그 조건은 황제에게 세금을 잘 바치고 선동적인 움직임이 없도록 잘 단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재판정은 피고의 범죄유무를 살피고 선고를 내리는 곳이기에 매우 심각한 장소입니다. 하여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재판에 연루된 주요인물들의 진실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재판정도 예외가 아닙니다. 재판정을 둘러싼 주요 인물들은 피고인 예수님, 검사이자 재판관인 유대 지도층 인사들, 베드로입니다. 이들은 모두 진리와 실리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자리 매김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진리와 실리 사이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왔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분을 붙들게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의 진면모를 발견하고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놀라운 축복을 누릴 수 있기 바랍니다.
1. 어정쩡한 베드로(53-54)
베드로는 진리이신 예수님과 자기안전이라는 실리 사이에서 분명한 선택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택하자니 실리를 잃는 것이 두렵고 실리를 택하자니 진리를 버리는 것이 괴로웠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런 어정쩡한 마음은 행동으로 그대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순순히 체포되시자 베드로는 일단 도망을 쳤습니다. 자기안전이라는 실리를 택한 것이죠. 그러나 마음이 편치를 않았습니다. 내면에서 솟구치는 양심의 소리를 완전히 누를 수 없었던 베드로는 힘든 발걸음을 옮깁니다. 체포되어 끌려가는 예수님 뒤를 멀찍이 떨어져 따라갑니다. 결국 대제사장의 집 안 마당까지 들어갑니다. 거기서 하인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쬡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기 위함이었겠죠. 그는 자기안전을 포기할 만큼 예수님 즉 진리를 사랑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 즉 진리를 완전히 내팽개칠 만큼 뻔뻔스럽게 실리를 챙길 수도 없었습니다. 진리와 실리 사이에서 엉거주춤하다 그만 추위에 오들오들 떠는 초라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우리 자신을 비쳐보는 좋은 거울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려 할 때, 종종 진리와 실리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물론 영원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진리를 따라가는 것이 가장 큰 실리를 챙기는 것입니다. 잠시 고통을 당한다고 해도 견뎌내기만 하면 그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생애가 이를 증명하고도 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비참하게 체포당하고 심문당하고 결국 십자가에 처참히 못 박혀 사형까지 당하는 비극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끝내 그 고통을 참아내심으로 말미암아 그는 무덤 문을 열고 나와 부활하십니다. 만왕의 왕으로 등극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구름 떼 같은 하나님 백성들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으십니다. 계산을 장기적으로 하면 올곧게 진리만을 따라가는 것처럼 수지맞는 장사가 없습니다. 요즘 말로 인생대박을 터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기적인 삶의 길목 길목에선, 진리를 따라가는 것이 나의 안전과 실리를 위협하는 경우가 자주 생기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매사에 청렴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투명하게 살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적당히 속이면서 사사로운 자기 이익을 챙기라고 속삭입니다. 자기는 안 챙기더라도 동료들이 불의한 이익 챙기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을, 최소한 눈감아 줄 것을 요구합니다. 은행의 경우 투명하고 정당한 절차를 밟아 대출을 허락하고 고객으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아선 안됩니다. 그러나 세상은 리베이트를 챙기라고 합니다. 이런 분위기에 대항하면 불이익을 받는 것은 불 본 듯 뻔한 이야기입니다.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왕따 당하거나 승진에서 누락될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밖에도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경우가 수 없이 많습니다. 사회악, 정치적 억압 그리고 경제적 탈취에 대항하여 목소리를 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두려워 침묵을 지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과감하게 포기하지도 못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관망만 하며 어정쩡한 삶을 살아갑니다. 독재치하의 한국교회 대부분의 모습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우리 자신도 그 중의 일부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런 어정쩡한 삶에 대한 진실하고 통렬한 참회입니다. 이제 어정쩡한 삶을 과감히 청산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손해와 위험을 각오하고 진리를 택해야 합니다. 이런 각오와 결단 없이는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한국교회는 여전히 어정쩡한 제자들을 양산해내는 분위기입니다. 물론 너무 율법적으로 혹은 강압적으로 그리스도인을 몰아가선 안 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이 넘어지는 것을 용서하시고 너그럽게 기다리셨습니다. 하지만 어정쩡한 제자의 삶을 위로하거나 정당화해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한국교회는 마치 베드로에게 불을 쬐어주는 것 같은 역할을 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어정쩡한 삶을 청산하도록 도전하고 격려하고 용기를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값싼 위로를 제공해줍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믿음만 좋으면 진리와 실리를 얼마든지 동시에 챙길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어 줍니다. 이런 메시지는 마약처럼 듣는 사람들의 분별력을 마비시키고 기분 좋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안전에 아무런 위협도 없는 달콤하고 꿈결같은 삶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런 삶을 약속하는 가르침은 사이비요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 점에서 언덕은 마냥 편안한 곳만은 아닙니다. 때론 힘겹게 올라가야 합니다. 때론 대책 없이 언덕 밑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해야 합니다. 세상사람들 속에 섞여 따뜻한 불이나 쬐며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는 삶을 청산합시다. 더 이상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지 맙시다. 이왕 예수님을 따라갈 바에는 그 뒤를 바짝 따라 붙는 우리 모두 될 수 있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2. 진리를 저버리고 실리를 택한 유대지도자들
예수님을 재판하기 위한 의회가 열렸습니다. 주요 인물은 대제사장들, 장로들, 율법학자들입니다. 이들은 심문도 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을 처형하기로 작정하고 그를 정당화할 구실을 짜 맞추는 식으로 재판을 진행하였습니다. 재판은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런 식의 재판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전후 그리고 군부독재정권 하에서 무고하게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당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도 사형선고를 내릴 만한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에게 거짓으로 불리한 증거를 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증거들 마저 서로 맞지가 않았습니다. 이는 실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유대교율법에 의하면 사형선고를 내리려면 적어도 두 사람의 증인이 있어야했기 때문입니다(신 17:6; 19:15; 민 35:30).
개중엔 이렇게 거짓 증언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내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은 다른 성전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 하였습니다." 이 증언은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한 것입니다. 요한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요 2:19).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두고 성전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러나 거짓 증언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한 것처럼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면서 '성전을 허물라'는 명령형으로 말씀했지만 거짓 증언자는 마치 예수님 자신이 성전을 무너뜨릴 계획을 갖고 있는 것처럼 왜곡합니다. 만일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당시의 상황에서 예수님은 사형선고를 받을 만한 충분한 근거를 제공한 셈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증언이 거짓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왜곡하다보니 그 증언과 맞아떨어지는 다른 증언이 없었습니다.
예수를 사형에 처할 근거를 찾지 못해 다급해진 대제사장이 한 가운데 일어나더니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 사람들이 그대에게 불리하게 증언하는데도, 아무 답변도 하지 않소?' (61).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말꼬리를 잡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입을 꾹 다무신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제사장은 다시 함정을 파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대는 찬양을 받으실 분의 아들 그리스도요?'(62) 예수께서 침묵을 깨고 인정하셨습니다. '내가 바로 그이요. 당신들은 인자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62).' 대제사장은 신성모독발언을 들었다는 표시로 자기 옷을 확 찢었습니다. 그는 자신 만만한 어조로 의원들에게 묻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인들이 더 필요하겠소?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오?'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일방적으로 단정지은 다음, 사형선고 여건을 만들기 위해 의원들로 하여금 증인이 되어 줄 것을 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의원들은 모두 레위기 24장 16절을 근거로 삼아 예수는 사형을 받아 마땅하다고 정죄하였습니다. 이에 의회의 분위기는 험악하게 돌변했습니다. 그 중 몇 사람은 예수를 조롱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달려들어 예수께 침을 뱉었습니다.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알아 맞추어 보아라'고 놀려대었습니다. 하인들도 덩달아 예수를 손바닥으로 쳤습니다.
대제사장이 주도한 이 재판정은 진리를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오직 예수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실리적 목적을 성취하는데 혈안이 되어 기본적 사법적 정의 마저 짓밟아 버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발언의 진정성을 심사하는 과정을 일체 생략했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주장이 오류라는 증거도 나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사법적 절차라는 요식행위를 이용해서 예수님 처형의 형식적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어느 시대든지 교회지도자들의 부패가 절정에 도달하면 이런 식으로 진리를 억압하고 핍박합니다. 맹수가 발톱을 감추듯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한 욕망과 집착을 슬쩍 감춥니다. 유창한 말과 강력한 카리스마를 활용하여 마치 자신들이야말로 가장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포장합니다. 그리고 정당한 절차를 밟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갑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적지 않은 종교개혁자들이 순교를 당하거나 파문을 당하고 박해를 당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얼마 전 한국교회의 대표적 목회자 한 사람이 교회재정 31억 원을 횡령한 죄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3년 750만원 벌금형을 확정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분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에서 곧 세계감리교지도자대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그리고 바로 몇 일전 구역인사위원회에서 그의 요청과 추천에 의해 그 아들이 그 교회 후임자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는 적어도 교계에선 여전히 실권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설자리가 별로 없습니다. 얼마 전 제가 잠시 진행자로 일했던 기독교방송국 중견 PD로부터 슬픈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와 제가 함께 심혈을 기울였던 프로그램 즉 한국교회건강회복에 주안점을 둔 교계시사프로그램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유인즉슨 대형교회의 압박을 받는 경영진의 은근한 압력에 의해 이것 빼고 저것 빼다 보니 의미를 찾을 수가 없게 되어 폐지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가 언덕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안주하지 않을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눈을 돌려 한국교회 전체를 바라봐야 합니다. 다른 것은 못해도 간절히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개혁운동에 직·간접으로 동참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이번 합창대회도 그런 맥락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부지불식간에 신앙을 빙자해 자기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켜 보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늘 조심할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런 신앙을 은근히 정당화하는 가르침이 난무합니다. 『깨끗한 부자』, 『긍정의 힘』, 『야베스의 기도』같은 책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 책들 안에는 유익한 말들도 많기 때문에 건전한 책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배울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엔 교묘하게 신앙을 욕망충족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3. 실리를 버리고 진리를 택하신 예수님
이미 언급한 그의 침묵과 발언 정황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실리를 버리고 진리를 택하신 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상식적인 사람 같으면 거짓 증거들에 대하여 항변을 하고 자신을 변호하려고 애를 썼겠죠.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이 소용없는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미 받아드리셨습니다. 하여 일체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십니다. 묵묵히 모든 것을 받아들이십니다. 진리의 길을 열어가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포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비겁한 침묵이 아니라 용감한 침묵입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고 계십니다(사 53:7):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러분 근거 없는 비난, 악의적인 비난을 듣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저에게도 그런 경험이 몇 번 있었습니다. 물론 제 경험이 예수님의 경험과 똑 같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한 점 허물없는 분이지만 저는 실수도 하고 허물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도가 넘치는 비난을 공개적으로 들을 때 정말 참기 어렵대요. 주변 분들이 때론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라고 권면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꾹 참았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마음에는 여전히 못 미쳤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용서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하여 모든 비난과 거짓 증거를 온 몸으로 묵묵히 받아주십니다. 주님의 침묵엔 죄인들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반면에 보통사람 같으면 당연히 피했을 질문엔 순순히 답변을 하십니다. 함정이 파여 있는 것을 뻔히 보시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시인하십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 죽음을 불러 올 것을 아시면서도 기꺼이 밝히십니다. 주님은 진리를 위해 죽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우리로 하여금 결국에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믿어 구원에 이르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발언에도 죄인을 향하신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떡과 잔은 바로 그런 예수님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실리를 버리시고 우리를 구원하는 진리를 택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을 택하셨습니다. 하여 그 몸은 십자가에 갈기 갈기 찢기고 피를 철철 흘리셨습니다. 떡과 잔을 나누면서 주님의 사랑의 침묵을 묵상합시다. 주님의 용기 있는 발언을 묵상합시다. 예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깊이 성찰합시다. 우리는 혹시 베드로처럼 진리와 실리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어정쩡한 삶을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지불식간에 유대교 지도자처럼 진리를 저버리고 실리를 취하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그런 삶을 통렬히 회개합시다.
예수님은 그렇게 연약한 사악한 우리를 용서하시고 살려주시기 위하여 실리를 포기하고 진리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요 왕으로 다시 한번 고백합시다. 마음을 활짝 열어 그 분을 맞아들이십시다. 그분께 우리의 진실한 믿음과 사랑을 새롭게 드릴 수 있기 바랍니다. 하여 우리도 주님과 함께 실리를 포기하고 진리의 길을 걸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