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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전공필수 (마 16: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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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전공필수 (마 16:21-28)

오늘은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필수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신앙고백을 받으신 주님께서는 이때로부터 비로소 당신님의 ‘수난’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21). NIV 영어성경은 이 장면을 좀 더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먼저 예수께서 두 번의 must(반드시 …해야 한다)를 사용하여 ‘단호한’ 의지를 표명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rebuke(꾸짖다)하기 시작했고, 두 번의 never(결코 …할 수 없다)를 사용하여 ‘강경하게’ 반대합니다. 예수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23a)는 ‘초강경’ 대응, 곧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사단에게 결론적으로 내리신 명령으로 베드로의 반발을 진압하셨습니다(4:10) 베드로는 충격을 받았는지, 더 이상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합니다.

신앙고백 후 은혜로웠던 분위기가 일순간 전투적인 상황으로 돌변했습니다. 직전까지 축복의 말씀들을 쏟아 부으시던 주께서 베드로를 향해 사단이라 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 곧 반석이라고 하신 주께서 여기서는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23b) 곧 걸림돌이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축복이 책망으로, 반석의 역할에서 걸림돌의 역할로 바뀐 이유가 무엇입니까?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c).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느냐 사람의 일을 생각하느냐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동안 무리들을 대상으로 사역해 오셨던 예수님은 이제부터는 제자들이 수난을 준비할 수 있도록 집중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온전한 인간이신지라 고난이나 죽음이 달갑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서 고난을 받고, 반드시 죽어서 부활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되면 메시아의 수제자로서 누리게 될 유익들, 곧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자신의 기대를 송두리째 흔드는 예수님의 선언을 그냥 지켜 볼 수 없었기에 결코 그런 말씀 마시라고 꾸짖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스승이 고난과 죽임 당함을 말씀하실 때, 가만히 듣고만 있다면 그것은 제자로서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태도에서 우리는 스승에 대한 제자로서의 충성심과 의리를 보게 됩니다. 동양인의 미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칭찬할 만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님을 사랑해도, 아무리 스승에 대한 충성심과 의리가 있어도,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자는 예수님의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고, 예수님께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찬양을 부를 때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며 목매인 고백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명 그 순간만큼은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고백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함이 아니라 자기위안과 자기만족과 같은 ‘사람의 일’ 때문이라면 주님의 책망을 피할 순 없을 것입니다. ‘집사’나 ‘장로’나 ‘목사’와 같은 직분을 맡고 봉사함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함이 아니라 명예나 삶의 보람, 사람들의 칭찬과 같은 ‘사람의 일’ 때문이라면, 그는 아무리 충성스럽게 봉사할지라도 주님의 일에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복이 있다고 칭찬 받는 사람, 참으로 교회의 반석이라고 칭함 받을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문제는 베드로뿐만 아니라 나머지 열 한 제자에게도 동일한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24) 이 말씀의 의미는 앞 구절 말씀과 연관해보면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반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결국 ‘자기 부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은 자기 기대, 자기 야망, 자기의 열정과 자기의 노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생각과 태도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인간적인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를 건설하실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열정에 사로잡혀서 예수님께서 must를 연발하시며 강조하신 그리스도의 수난 말씀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never를 연발하며 발발할 뿐이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끝내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는커녕 걸림돌이 되고 예수님의 사역을 훼방하는 사단의 앞잡이 노릇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부인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명목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자기 영광과 자기 이름을 위해서 일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기 야망을 예수 믿고 얻게 될 복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기 기대를 이루어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어떤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인지 자기 영광을 위함인지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본문에 그 답이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을 위해서 하는 것 같은 느낌과 기분이 들지라도,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방법을 사용한다면, 자기 영광과 자기 이름을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서 해야 할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셔야 할 십자가가 따로 있고, 제자들이 져야할 십자가가 따로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에게는 저마다 독특한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회피하고서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제자의 전공필수과목인 셈입니다.

먼저 ‘자기 십자가’가 아닌 것부터 집고 넘어가야할 것 같습니다. 첫째로 인생고는 자기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인생고를 겪으면서 ‘팔자타령’하는 것처럼, 예수님 믿는 사람들 중에도 인생고를 겪으면서 ‘자기 십자가 타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1:28-29절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초청하시고 그들로 쉼을 얻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는 삶의 수고와 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멍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육체의 가시와 같은 질병도 자기 십자가가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2:7-8절을 보면, 바울은 그 육체의 가시를 늘 짊어져야 할 자기 십자가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벗어버리기 위해 세 번 주님께 간구했습니다. 세 번째로 무조건 고난 받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나 ‘일사각오’하는 것이 자기 십자가라면, 때때로 위험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피하셨던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피한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기 십자가’란 무엇일까요? 본문 말씀에 의하면 첫째로, 자기 십자가는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는 성도라면 져야 하는 전공필수과목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아닌 사람에게는 있지 않습니다. 둘째로, 자기 십자가는 누가 억지로 지워주는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피하려면 얼마든지 회피할 수 있는 성질을 가졌습니다. 셋째로 자기 십자가는 날마다 일생동안 져야 하는 것입니다(눅 9:23). 삶의 어떤 순간에만 혹은 가끔씩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아닌 사람도 겪는 현대인의 생활고나 원해도 벗어날 수 없는 생활의 굴레나 삶의 어떤 순간에만 있다가 없어지는 질병 등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신 사명을 상징합니다. 우리 주님께는 하나님께서 주셨던 일생의 사명이 있었고, 그 정점이 십자가였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일생의 사명’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명은 어떤 조직이나 단체가 목표로 세운 ‘사명’과는 다릅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그 구체적인 삶의 형태와 내용은 각자가 발견해야만 합니다. 주부로서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일은 남편이 대신 질 수 없는 ‘자기 십자가’입니다. 가장으로서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일도 아내가 대신 질 수 없는 ‘자기 십자가’입니다. 목회자가 하나님 백성답게 목회하는 일도 성도가 대신 질 수 없는 독특한 ‘자기 십자가’이고 일반 성도가 생업전선에서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일도 목회자가 대신 질 수 없는 ‘자기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삶의 자리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도라면 누구에게나 요청된 일이지만, 누구든지 회피하고자 하면 회피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겉보기에만 하나님 백성답게 눈가림식으로 생활하거나, 간간히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것, 혹은 특정 장소에서만 하나님 백성답게 행동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주님을 좇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삶의 순간마다, 그리고 모든 삶의 현장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에베소서 6:6절에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 삶이 어렵기 때문에 성경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이론과목인 ‘신앙고백’에서는 A+학점을 받았지만, 실천과목인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에서는 낙제를 면치 못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성도도 베드로와 별반 차이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회복되었던 것처럼, 회복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은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일이지만, 그 길이 진정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길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인 줄 믿습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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