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진정 은혜로 받자 (고후 6:1-10)
본문
오늘날에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예수쟁이나 예수꾼들을 찾아보기가 어렵다고들 합니다. 예전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별세계의 사람들도 아닌데, 그들의 신앙을 보면 우리보다는 훨씬 잘 믿었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그러면 그분들이 지금보다 잘 살았는가 하면 우리 시대보다 잘 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야만 좋은 신앙을 가질 수 있느냐고 하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경제적인 부요함이 신앙생활의 방해꾼이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요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은 변함없으신데, 우리들에게 사모하는 마음이 없고, 신앙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시대적인 풍조가 문제라고 보여 집니다.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두신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넓고 깊은 바다와 같습니다. 옛날 애굽에 풍년이 들었을 때에 요셉이 만든 곳간보다도 더 풍성한 곡식들이 쌓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많은 성도들의 신앙상태를 들여다보면 정말 허약한 신앙생활에 머물고 있습니다. 영적인 양식을 먹지 못하여 영양실조 상태에 들어갔으며, 영원토록 갈증을 느끼지 아니하는 생수를 옆에 두고도 마시지 못하여 헐떡거리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영적상태를 진단하여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계3:17에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요즈음 모두다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상태는 빈사상태였습니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벌거벗은”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전이나 오늘이나 같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풍성한 은혜를 예비하고 있으며 우리를 먹이시려고 기름진 것으로 준비하셨습니다. 그냥 사모하는 마음으로, 갈급한 심령으로 은혜의 강물에 뛰어들기만 하면 은혜의 생수를 마음껏 마실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칭찬은 없고 책망만 받은 교회가 라오디게아교회와 사데교회가 있는데, 우리 주님은 사데 교회를 향하여 책망하시면서 계3:1에서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이 말씀은 정말 심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다고 하지만, 실상은 죽은 자였습니다. 치욕스런 말입니다.
오늘은 “은혜를 진정 은혜로 받자.”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받으려고 합니다.
저는 요즈음에 저녁이면 일찍 저녁 식사를 하고 남산 북측 순환로에 나가 한 10Km 정도 걷고 있습니다. 2시간 정도 부지런히 걸어서 국립극장 이에 있는 장충체육공원까지 다녀옵니다. 요즘 남산에는 나무들이 얼마나 잘 자라서 길 양쪽의 나무들이 맞다 있고, 신록이 우거져 멋들어지는지 정말 좋은 산책로입니다. 그곳에 가면 시각장애인들이 많이 나오는데, 차량이 없고, 길이 넓어서 다칠 염려가 없습니다. 그들만 보아도 저는 너무나 건강하고 시력이 좋아서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감사한 마음이 들면 그것은 사실 유치한 감사라고 하지만, 언제나 그 분들만 보아도 나같이 건강한 사람이 무엇은 못할 것이 있겠느냐 하면서 은혜가 됩니다. 또한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저 남산의 수많은 나무를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 그 능력의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기만 하면 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내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하니, 좌충우돌이요, 실패하고 낙심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능력 있는 오른 손에 붙잡혀 일한다면 나의 생애는 분명히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일한 것보다, 지금까지 쓰임 받은 것보다 남은 생애가 더 아름답고, 보람도 있고, 의미가 있고, 알찬 열매를 거둘 것을 확신합니다.
남산에는 수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기에 참 좋은 산입니다. 한 종류의 나무만 계속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함께 자라나고 있습니다. 나무는 산과 들에 심겨져야지 화분에 심겨지는 것은 불행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희 집에는 동백나무와 회양목분재, 동양란과 산세베리아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정성껏 물주고 거름을 주어도 화분의 나무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화분에 심겨진 나무와 산과 들에 심겨진 나무는 전혀 다릅니다. 나무의 색이 다릅니다. 꽃이 다릅니다. 나뭇잎이 다릅니다. 줄기도 다릅니다. 화분에서는 겨우 죽지 못해 연명하는 꼴이지만, 산과 들에서는 하나님이 기르시기에 얼마나 탐스럽고, 보기에도 좋습니다. 좋은 땅에 심겨지면 나무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화분에 심겨진 나무는 잘 자라지 못합니다. 집에 들여놓아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자라지 않게 분재를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산과 들에 심겨진 나무는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대로 하늘을 찌를 듯이 자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은혜의 동산, 물댄 동산에 심겨진 나무는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잎이 시들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은혜의 동산에, 물댄 동산에 심겨만 지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은혜의 동산, 말씀의 동산에 심겨지기만 하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전망이 보입니다. 미래가 열려집니다. 주 안에 예비된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은혜의 동산이며, 물댄 동산입니까? 무엇이 화분이라고 생각됩니까? 저는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 인간의 의지, 인간의 물질만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이들은 겨우 화분에서 연명하는 것이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 하면서 사람을 의지하고 세상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슨 힘이 되는 줄 알고, 사람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화분 안에서 죽지 못하고 연명하면서 버티는 것에 불과합니다. 화분의 흙이란 지력이 고갈됩니다. 그러나 들과 산에는 무궁무진합니다. 화분에서는 꿈이 없습니다. 그러나 들과 산에서는 무한하게 뻗어나갈 수 있습니다.
나무는 화분을 떠날 수 없고, 일생 그 자리에서 고사하여도 벗어날 길이 없지만, 우리는 지금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부정적인 환경을 박차고 일어나 성령의 충만한 동산으로, 말씀의 강이 흐르는 들판으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사랑과 능력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품에 심겨져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품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나는 은혜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저를 받아주십시오.” “저를 품어 주시옵소서.”라고 매어달려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이 강같이 흘러가는 하나님의 교회에 깊이 들어와야 합니다. 아주 보잘것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동산에 들어가 그 물댄 동산에 심겨지고 보니, 하나님은 저의 생애를 통하여 참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사58:11에서는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동산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겠다고 전적으로 위임하고 위탁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로 메마른 땅에서도 그 영혼을 만족하게 하시며, 물댄 동산,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곁에 두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은혜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 받았습니다. 은혜 받으세요.”라고 하는데, 도대체 은혜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은혜란 말은 헬라어로 “카리스”입니다. 하나님의 친절과 호의라고 하는데, 사람들에게 유익하게 하시려고 무조건적으로 돌보시는 사랑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은혜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복음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구절이 골1:6입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고 했습니다. 이 복음이 이르니,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엡2:5에서도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은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복음을 통한 은혜입니다. 거듭남의 은혜, 새로운 피조물의 확신을 가지게 하시는 은혜, 하나님의 자녀로서 계속하여 누리게 하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님을 모신다고 하는 것은 은혜 중에도 은혜입니다. 딤후2:1에서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라고 했습니다. 은혜의 가장 중심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은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은혜를 받으며, 받은 은혜를 다 사장시키지 않고, 계속하여 유지할 수 있습니까? 저는 하나님만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 안에서 살겠다고 다짐하고 살아갑니다. 물질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세상 명예도 다 지나갈 것이며, 고통스러운 순간도 있을 것이지만, 그것도 지나갈 것이며, 내가 붙들어야 하는 분은 우리 구주 예수님이시며, 성령 충만을 소원합니다. 다 지나갈 것인데, 그것이 나에게 영원히 함께 하지 않으며, 힘이 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시며, 힘이 되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영원히 함께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싶어 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알찬 내용의 말씀, 진정한 양식이 되는 말씀, 영원히 힘이 되어주는 말씀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시시하게 쓰임 받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은혜가 되어야, 다른 사람도 은혜가 되지, 내가 은혜가 되지 않는데, 누가 은혜를 받을 것입니까? 내가 잘 먹어야 잘 먹일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영을 잘 분별해야 우리 교회에 들어오는 영들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가지고 요약하여 세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어 받지 말아야 합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말씀은 아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화해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는 구속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받아 천국 백성이 되는 이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헛되어 받지 말라”는 말씀은 “헛된 것으로”, “허사로 돌리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 않고, 그 은혜를 소중하게 간직하지 않고, 가장 값진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예사롭게, 흔하게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2. 오늘 이 자리에서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2절의 말씀에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49:8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사49:8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모인 이 곳, 이 자리에서 주시는 은혜를 사모해야 됩니다. 우리는 오늘의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예비하신 은혜, 지금 주시고, 오늘에 주시는 은혜를 사모해야지, 은혜 받는 것은 좋으나 다음에 받아도 좋으며, 아주 늙어서 힘을 없을 때에, 다음 번 부흥회에 가서 은혜 받겠다고 말하면 그런 사람에게는 영원히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다시 “지금은”이라고 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라고 하십니다. 바로 지금이 은혜 받을 때입니다.
“지금”이란 말은 광의적으로, 예수님이 초림하신 이후로 다시 오시는 날까지를 말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작게는 우리 각 사람이 살아있는 생애의 날을 말합니다. 더 작게 말하면 오늘과 같이 이런 권면의 말씀을 듣는 이 시간을 말합니다. 은혜 받을 시간을 놓쳐버리면 오늘에 임하시는 그런 은혜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은혜의 때가 다 지나가면 그 때는 심판의 날이요, 책임을 묻는 날이 될 것입니다.
제가 동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목사님”, “아저씨”, “선생님” 이렇게 부르는데, 어쩌다가 “할아버지”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누가 저에게 “할아버지”라고 하면 아니, 많고 많은 말 중에 “할아버지”라는 말을 붙이느냐고 기분이 매우 상합니다. 한 5년 전에 상도동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유치원생들이 저의 집 계단의 문 앞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제가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니, 아이들 중에서 한 아이가 “할아버지 들어가, 비켜”라고 하는데, 아무리 두리번거려 사람을 찾아보아도 어른은 나뿐인데, 그 때 정말로 기분 나빴습니다. 이제는 좀 익숙해졌습니다. ‘할아버지’라는 말이 있으니 사용하는 것이지, 할아버지라는 말은 듣기 거북합니다. 아직도 할아버지가 아니라는 느낌인데, 손자들이 찾아오면 할아버지라는 말 외에 붙일 수 있는 말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제 입에서 “할아버지”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저의 집에 가끔 외손자가 찾아옵니다. 두 내외만 지내다가 두 딸의 아이들이 오면 우리 집에는 가장 큰 손님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 애들이 와서 함께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아주 어렸을 때에는 밥을 떠먹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컸는데도 손자가 귀엽다고 밥에다 반찬을 올려놓아 떠서 먹여 줍니다. 저는 “흘리건 말건 자기가 먹게 내버려두라.”고 합니다. 숟갈을 가운데쯤 잡아주고 떠먹는 훈련을 시킵니다. 자꾸만 숟가락의 끝을 잡고 먹으니 흘리게 되고 혼자 먹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옛날 같으면 멀리 시집가려고 그런다고 야단했을 것입니다. 며칠간 소식이 없다가 놀러오면 이제는 숟가락과 포크로 제법 먹는 것을 봅니다. 아이들이 말을 베우고 커가는 모습이 좋아서, 오면 참으로 반갑습니다. 아직은 어려서 그런지, 가면 더 반가운 것이 아니라, 가면 또 보고 싶습니다.
우리 교우님들은 각자가 스스로 영적인 음식을 먹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먼저 기도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말씀을 읽고 그것을 가지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나의 삶에 적용시키기 위하여 오늘의 할 일을 찾아내야 합니다. 이것을 매일 같이 훈련하듯이 해야 신앙이 자라납니다. 좋은 신앙생활하기를 원하십니까? 좋은 생각과 좋은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원로장로님 중의 한 분은 연초부터 성경을 읽어서 한번 읽으시고, 다시 한번 읽은 분이 계십니다. 두 달 반 정도면 일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좋은 습관이 좋은 인격을 만들게 됩니다. 성경 백독하십시오. 자기 나이 수만큼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백독하시고 천수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정상적으로 자라나는데, 악한 음식, 먹어서는 안 되는 이단 사설, 동양철학을 가장한 사주팔자, 운명철학 이런 것을 먹으면 잘못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영이 악한 영으로 인하여 미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음담패설 같은 것은 몰라도 됩니다. 어느 모임에 가서 음담패설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으려고 그런 것을 메모해 가지고 다니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고 복음 성가를 암송해야지, 쓸데없는 시시한 이야기를 가지고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모여 설교를 듣는 것은 음식의 맛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에게 주시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자기 성경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자신만의 기도 시간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봉사의 현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모여서 말씀을 듣고 함께 예배하는 것은 은혜의 문에 들어가는 것이요, 정말 은혜 생활하는 것은 여러분, 각자가 열심을 내어야 하고, 열정을 가지고 영성을 예민하게 해야 됩니다.
3. 이제 마지막으로 받은 은혜를 소중히 여겨야 진정 은혜가 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시시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세상에 없는 은혜로 알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은혜로 믿음을 지켰습니다. 계3:8에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교회가 아주 큰 능력이나 큰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우리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교회와 성도들을 원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큰 건물을 가지고 있어서 신앙생활 잘 하는 것입니까? 예산이 많아서 신앙생활 잘 하는 것입니까? 목사님이 유명세를 타는 목사여서 은혜를 받는 것입니까? 우리는 아주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적은 은혜를 받고도 아주 큰 은혜를 받은 사람 못지않게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은혜 받을 날은 오늘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결단해야 됩니다. 내일이 있다고 다음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이 은혜 받을 날이요, 구원받을 때입니다.
사55:1에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돈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과 같은 말씀과 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은혜 받는 것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음식을 앞에 두고 구경만 하고 돌아간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요, 굶어죽을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운 말씀을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에게, 이 자리에서 오늘 주시는 말씀으로 우리 마음 육비에 새겨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의미 없이 들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말씀을 증거하는 성목사가 결코 사도바울에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처럼 처신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3절 말씀에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목사라는 직분, 하나님의 종이라는 신분, 성직자라는 사람으로 비방 받지 않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처신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이것도 제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도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고 하더라도 저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의식을 기억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잘 참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처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 들어가지는 못하였어도, 깨끗한 마음, 자비한 마음, 성령의 감화, 거짓이 없는 사랑,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름 없는 사람 같지만, 이름 있는 사람이요, 죽은 자 같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요, 항상 기뻐하고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은혜 생활 하고 있습니다. 은혜는 받는 것만이 아니라, 받은 은혜를 유지하고, 주님을 닮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어 받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받은 은혜를 소중히 여겨야 진정 은혜가 됩니다. 은혜의 강물이 여러분, 심령 속에 넘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