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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막10:46-52절, 482.483.549장.&

본문에 기록된 여리고의 소경 "바디매오"의 태도가 오늘 우리에게 감동을 끼쳐 주고 있습니다. 그는 소경인데다 길거리에서 구걸로만 연명하고 있던 거지였습니다. 이 소경이 군중들 사이로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길가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때에 많은 군중들은 그 거지 바디매오가 소리지르는 것을 보고 잠잠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바디매오는 더 심히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더욱 소리질렀던 것입니다. 이때에 군중들 사이로 지나가시던 예수님은 그 거지의 애원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 거지를 내게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가서 "당신을 부르시니 안심하시고 일어나시오." 그렇게 부를 때에 이 거지는 겉옷을 내어 던지고 달려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주님은 "내가 무엇을 해주길 원하느냐? 네 소원이 무엇이냐?" 그렇게 물었을 때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52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1.소경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기다린 자입니다. 소경이 눈을 뜨기 위해서 예수를 맞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를 택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거리에서 예수님이 지나가시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기다리다가 기회가 오자,

곧 그 기회를 잘 선용한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기다리게 된 것은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듣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이 자기에게도 나타날 것을 믿고 좋은 위치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이는 신앙이요 대망이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인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기다리는 소경의 모습을 우리는 한번 연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한나"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리다가 결국 하나님께서 그가 기다리던 아들 "사무엘"을 주셨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기다렸다가 자기의 소원대로 주님을 만나는가 하면,

자기 집으로 모시게 되었고, 이로써 가족 모두가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도 주님을 우리 가정으로 모시기 위해서 기다리고 인내하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2.자기의 소원을 위해 간구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서 열 심히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눈이 보이지 아니하니까 언제 주님이 지나가실 지 물어보니까 계속하여 소리를 지르면서 간구를 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많은 사람이 꾸짖어도 반대해도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보통 나사렛 예수로 통했는데 "다윗의 자손 예수여" 한 것은 바디매오의 신앙표현이기도 한 것입니다.(눅1:68). 즉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습니다"란 뜻입니다. 예수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해 내시는 자"란 뜻입니다.(마1:21절). "불쌍히 여기소서"는 "나는 만민이 다 아는 대로 불행한 자 중에 가장 불쌍한 자"라고 고백하는 뜻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은혜 받는 것 가운데 하나는 간절한 부르짖음입니다. 응답이 있을 때까지 큰 소리로 외치는 일입니다.

방해와 꾸짖음과 외침이 있어도 구주에 대한 확신이 잠잠케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영적인 개안을 위해서도 이와 같은 신앙과 열심과 간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1)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여기에 계시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마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동행을 하면서도 주님을 알지 못한 것과 같이 말입니다. 2)성령 받아 영안이 뜨기 위해서는 열심히 필요합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눈을 뜨게 하소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불쌍히 여기소서" 간절한 울부짖음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주님은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하시었던 때문입니다. 3)주님의 응답이 있을 때까지 강력한 요구와 열심히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이 알아줄 때까지, 긍휼의 대상자로 여겨질 때까지, 소원을 성취시켜 주겠다는 주님의 응답이 마음에 확신이 올 때까지, 열심히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3.자기의 소원이 분명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디매오에게 "네 소원이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하심에 소경은 "선생님을 보기를 원하나이다"고 했습니다. 이는 바디매오의 일평생의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뚜렷한 목표를 가진 그의 기도는 응답되어 그는 보게 되었고, 예수를 따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오직 예수님 이외는 구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러므로 그의 마음에는 광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영안이 어두운 데 있다고 생각하면 이제 곧 소원을 아뢰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새로운 세계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4.군중이 만류해도 자기 소원을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지금 그곳을 지나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그가 얼마나 간절히 부르짖었던지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막아서면서 잠잠하라고 꾸짖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바디매오가 지나치게 소리쳤기 때문에 소란을 막으려고 자연스럽게 막아섰던 것입니다.

모처럼의 기회를 통해 재생의 기쁨을 얻고자 갈망했던 그에게 있어 사람들의 방해는 예수님과 그의 사이를 여지없이 차단시키는 장벽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그런 장애에도 불구하고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거듭거듭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막아 선 사람들의 힘겨운 벽을 뚫고 뛰어 넘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사람의 장벽에 그만 주저 않고 말았다면 그의 갈망까지도 그만 좌절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벽을 뛰어 넘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이르기까지엔 무수한 사람들의 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벽은 밖에만 아니라 교회 안에도 많고 어떤 경우엔 자기의 지도자가 그런 벽이 되기도 합니다.(마23:13). 그러기에 우리는 어떤 벽도 뛰어 넘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많은 사람들이 소경을 꾸짖었습니다. 많은 대중 속에 살면, 대중의 뜻에 살기 마련이요 소수의 일은 무시당하기 쉽습니다.

모두 자기 일에 바빠 옆 사람의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그때 바디매오는 거지요 집도 돈도 배경도 없는 자였습니다. 누가 그를 안중에 두었겠습니까? 2)그는 더욱 더 소리를 높여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짖었습니다. 예수가 지금 지나갑니다. 주님께서 다시는 그 길을 지나가지 않을지 모릅니다.

여리고 성에서 예수는 그 길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바디매오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 기울인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를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사55:6절에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5.예수를 만나고자 원했던 자입니다. 바디매오는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하고 소리쳤 습니다. 그는 먼저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외쳤는데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야를 일컫는 명칭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실 여리고로 예수께서 지나시는 일도,

드물었지만 소경된 자로서 그분을 만나기도 쉽지 않을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때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시는 길은 그것이 마지막 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디매오에게 있어선 그것이 예수님을 만나게 된 모처럼의 기회이자 마지막 기회였던 것입니다.

또한 기회란 한번 놓치면 다시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주님을 만나는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바디매오는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가 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길가에 사람들의 출입이 잦은 것을 보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에 응답해 주지 않았습니다. 또 물어 보니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내가 어디서 들었는데…기억이 났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린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구나 했을 것입니다.

2)바디매오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가 소리를 지른 원인은 소경으로 길을 몰라서 지름도 아니요 단지 예수를 보려고 함도 아니요 눈을 뜨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는데 그를 놓칠세라 하는 심정에서 부르짖었습니다. 더구나 거기는 예수님의 일행 외에도 유월절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여리고는 도피성으로 레위인들이 거주하는 성으로 제사장 레위인 반열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속에 묻힌 예수를 놓칠까봐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3)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예수가 다윗의 자손임을 알았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 함은 유대 민족적인 메시야 사상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때 바디매오는 유대 메시야 사상보다 훌륭한 메시지를 통해서 자기의 눈을 뜨고 싶은 심정에서 이렇게 부른 줄 압니다. 그때 그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그를 저지했습니다.

저 유명한 예수 선생은 너 위해 상대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잠잠하라고 제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올바른 호소를 한 것입니다. 그는 불쌍히 여겨줄 것을 호소했던 것입니다.

6.자기의 입장을 호소한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는 자기 의 입장을 호소한 것입니다. 48절에 보면 많은 사람이 꾸짖었습니다. 그랬더니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는 데는 어떤 공적이나 대가가 필요 없습니다. 그저 상대편보다는 자기 입장만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 요구만 이루어 달라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목표를 긴장과 불안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실상은 이 긴장과 불안은 우리로 하여금 건설적인 용기와 의미를 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목표를 갖지 아니하고 살다가 실패하기보다는 목표를 정해놓고 도달하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실패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도리어 그리스도인의 삶의 보람된 삶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소경 바디매오는 버려진 자리에서 위대한 기회를 찾았습니다.

7.자기의 소원대로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경 바디매오의 부르짖는 소리를 빠 짐없이 들으셨습니다. 그의 갈망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기 위하여 한동안 못들은 척 하고서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러다가 바디매오의 사무친 절규를 거듭거듭 듣고 나서야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면서,

그를 당신 곁으로 데려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디매오는 겉옷까지도 팽개치고 뛰쳐 일어났습니다. 이런 간절한 모습은 본서에만 기록되어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윽고 예수께서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시자 바디매오는 "즉시 눈을 뜨고, 보기를 원합니다"하고 크게 소리질렀습니다.

소경된 자로서 그 이상 다른 무슨 소원이 따로 있을 까닭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에게 평범하게 들리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일에 있어 그 목적성은 신앙 생활의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무엇 때문에 신앙 생활을 하냐고 물으면 대개는,

우물쭈물하고 마는데 이런 일은 목적지 없이 여행길을 나선 자처럼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인 것입니다. 1)예수님은 가시던 길을 멈춰 그를 불렀습니다. 저희가 그를 부르니 그는 너무 기쁘고 이 기회를 빨리 얻기 위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왔습니다.

그 겉옷은 낮에는 옷이지만 밤에는 이불이 되는 귀한 옷입니다. 그는 그러한 그의 소유 때문에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즉시 예수께 달려갔습니다. 2)"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의 생각은 주님은 내 눈을 뜨게 해 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대로 그 소원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눈이 뜨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는 또한 은혜를 감사할 줄 알았습니다. 은혜를 아는 것은 희귀합니다. 그는 소경으로 있다가 눈이 뜨였으니 가족에게 가볼만 합니다. 이것은 믿는 자가 행할 참 믿음입니다.

이 역시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시작했고 감사로 마쳤습니다. 이것은 믿는 자가 행할 참 길입니다. 이 역시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믿는다고 하는 것은 절대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거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의 가진 것 없고 아는 것 없어도 순진한 신앙 간절하고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은 오늘 우리들에게 본이 되고 있습니다.

8.말씀을 정리합니다. 소경 바디매오가 눈고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간적으로 남달리 뛰어난 점이 있어서가 아니고 그의 간절한 간구와 믿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할 때 주의 것은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는 그와 결속되고 그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도 바디매오의 믿음과 간구함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숱한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전능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을 의지하고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이런 기도를 드리므로 응답 받아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의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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