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고후 5:13-19)
본문
우리문화의 특성을 지적할 때, “신바람 문화”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신바람이야말로 우리 민족정서의 원형질”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민족은 신바람이 나면 두려운 것도, 불가능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배고픔도, 서러움도, 원망도, 자질구레한 일상사에 얽매였던 자신도 잊고, 현실을 떠나 탈혼의 경지인 더 큰 세계로 빠져 들어갑니다.
옛날 우리 농부들은 무더운 여름의 폭염아래서도 그 힘든 김매기도 김매기가 아니라 축제였습니다.
소리꾼과 일꾼들이 어우러져 선창, 후창으로 노래하며, 어깨를 들먹이면서 춤추고 일하다 보면, 어느새 김매기는 끝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바람의 현장입니다.
이런 신바람은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집단적 헌신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IMF의 한파가 이 땅을 찾았을 때, 대통령의 호소 한마디에 나라 살리자고 결혼반지, 돌 반지 싸들고 은행으로 달려가 거국적 금 모으기에 줄을 설 수 있었던 것도, 이 민족 안에 잠재된 신명만 나면 거칠 것이 없는 신바람정서의 결과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우리 고현의 성도님들과 함께 이제부터 새롭게 행복하게 거룩하게 미쳐 사는 비밀을 나누고자 합니다.
바울 사도는 13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바울은 무엇에게 왜 그렇게 미쳤을까요?
이 대답을 찾는 과정에서 저는 여러분도 저와 한가지로 미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에 미쳤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무엇에 미쳐야 합니까?
1.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쳐야 합니다.
14절을 읽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여기서 강권이란 말은 “꼼짝달싹 못하도록 붙잡아버린 모습”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혀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열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이유는, 우리가 정말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바울처럼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빠져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은 대부분 이기적인 동기에서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라도 서로를 위해 죽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모와 자식간이라도 부모를 위해 죽는 자식은 거의 드물고, 자식을 위해 죽는 부모도 결코 흔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아니요, 나와 같은 민족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정말 사건 중의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롬5:7절이하에서 “이 세상에서는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 죽는 일도 쉽지 않은데, 그리스도는 죄인인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이것이 어쩐 일인지 모르겠다”고 고백하며, 롬5:8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인터넷을 통해 남동생의 뒷바라지를 위해 시집가기를 거절하고 평생을 희생한 어느 간호사의 간증을 읽었습니다.
동생 자신도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고, 주변 사람도 좀 지나친 것이 아니냐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오직 동생을 위해서만 살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전, 그 이유를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사춘기 시절 수술을 하고 수혈을 받아야 하는데, 특이한 혈액형이어서 피를 구하기 어려웠답니다.
그런데 마침 어린 남동생이 같은 피형이어서 자원했는데, 수혈이 끝난 후 이 남동생이 입원실에서 의사선생님에게 뜻밖에 “선생님 저는 언제 죽게 되나요?” 이렇게 물었답니다.
이 소년은 수혈의 의미를 충분히 모른 채, 죽기를 각오하고 누나를 위한 수혈에 임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후에 전해들은 이 누나는 그때 하나님께 “저는 평생을 제 동생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결심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를 위해 죽을 결심을 하고 수혈한 동생을 위해 한 여인이 동생에게 빚진 마음으로 동생을 사랑하여 동생을 섬기는 일에 헌신했다면, 우리를 위해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예수님과의 사랑에 빠져 살아가는 것이 지나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삶의 이유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15절을 읽겠습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사도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다시 사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사신 이유는, 우리로 우리를 위해 다시 사신 그분을 위해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요, 또한 삶의 목적이 된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 우리에게 주어진 까닭도 안디옥의 성도들이 늘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을 칭송하고, 예수를 전하였기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적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는 분명히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는 대상이 생겼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나는 너를 위해 죽었고, 나는 너를 위해 다시 살아났으며, 그리고 나는 너를 위해 살고 있단다. 넌 나를 위해 살지 않겠니?”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음성을 들은 그날부터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에 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미쳐야 합니다.
행26:24절에 보면, 바울이 전도하다가 죄수로 잡혀 왔으면서도 자기를 심문하는 총독 베스도에게 전도를 하자, 총독은 말하기를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은 정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미쳐있었습니다.
저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래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미쳐야 할 것이 본문에 의하면 두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예수의 사랑만이 인간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가진 가장 큰 존재의 갈망은 변화의 갈망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존재 그대로를 만족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진 가장 큰불만은 자신에 대한 불만입니다.
그리고 이 불만이 크면 클수록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에 대한 열망은 더 증폭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변화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선언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는 사람치고 변화되지 않은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좋은 직분을 가졌어도, 그리스도와의 사랑에 빠지지 않은 사람치고 변화된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변화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복음만이 인간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처방입니다.
그래서 롬1:16절을 보면 바울은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복음을 믿는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미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의 사랑만이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시키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류최대의 과제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정립입니다.
인간이 범죄한 이후 인간은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비극은 하나님을 등진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주경학자 척 스윈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정보였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육자를 보내셨을 것이다./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기술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과학자를 보내셨을 것이다./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제학자를 보내셨을 것이다./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쾌락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연예인을 보내셨을 것이다./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중보자요 화목자인 구세주를 보내신 것이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18절에서 전도의 책임을 “화목하게 하는 직책”이라고 했고, 19절에서는 복음을 가르쳐 “화목하게 하는 말씀”이라고 했고, 20절을 보면 전도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을 전도하는 이 일에 미쳤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또한 미쳐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바울과 같은 열정으로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한다면 우리 가정과 직장 그리고 익산시는 얼마나 많이 변할까요?
우리 다 함께 이 거룩한 비전을 위해 한번 미쳐보지 않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