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곳에 가서 쉬어라 (막 6:30-34)
본문
본격적인 휴가철이 되었는데, 태풍피해와 장마로 인한 수재로 쉰다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여론조사 기관인 한국갤럽이 전국의 20세 이상 남녀 1507명을 대상으로 2006년 올 여름 휴가 계획에 대한 조사를 발표하였습니다. 평균휴가 경비는 1인당 179,000원으로 2002년 조사 때보다 14,000원이 줄었다고 합니다. 금년에 반드시 휴가를 가겠다는 사람이 약 60%로 예년과 비슷하였지만, 3박 이상의 여행은 예년보다 약10%가 낮아진 30%였습니다. 휴가 장소로는 바다가 산보다 2배나 많은 45%였으며, 함께 가는 사람으로는 73%가 가족이었고, 친구. 동료가 16.6%, 애인이 3.6%, 혼자 가는 사람은 2.2%였습니다.
매거진 ‘줌마’에서 조사한 것을 보면, 휴가에 가장 동행하기 싫은 사람은 시집식구가 가장 많았고, 남편과 함께 휴가가기 싫다는 여성도 상당수 있었고, 자녀도 데려가기 싫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시집 식구라고 하면 그럴 수 있다고 보지만, 남편과는 휴가를 함께 보내고 싶지 않다는 여성들은 어떻게 된 분들인지 모르겠습니다. 남편 되신 여러분, 가족들과 휴가 가실 때에 얼른 차에 타고 계십시오. 잘못했다가는 혼자 집에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휴가’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사람도 있고, 할 일이 태산 같은데 휴가는 생각도 못한다는 분도 있습니다. 요즈음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휴가는 무슨 휴가냐고 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여가나 휴가를 말할 때마다 거론되는 한 분의 학자가 있습니다. 듀마제디라는 분인데, 그는 프랑스 사람으로 세계적인 ‘여가학자’입니다. 듀마제디라는 분이 쓰신 “현대 여가 위락론”이라는 책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가가 우리의 삶에 주는 좋은 기능들이 말하는데,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일에서 오는 육체적 피로를 해소시켜주는 휴식의 기능입니다. 두 번째는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기분전환의 기능입니다. 세 번째는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더욱 창조적인 활동을 가능케 해주는 자기 계발의 기능이라고 합니다. 듀마제디가 말하는 것을 조그만 더 소개하면 그는 “여가란 놀이라”고 정의합니다. 여가는 “기쁨과 즐거움과 재미를 위한 시간”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여가를 즐긴다고 하면서 “지나치게 진지하게 되면 놀이가 아니라, 일이 되고 만다.”라고 경고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논다’는 말을 참으로 불편하고 여겼고, 어색하게 느꼈습니다. 이솝우화 중에 “개미와 베짱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에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이상하지만 많은 자극을 받았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봅니다.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개미들이 여름 내내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고 있을 때, 베짱이는 이 꽃 저 꽃 옮겨 다니면서 바이올린 연주만 했습니다.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이 되자 베짱이는 배가 고프나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짱이는 개미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개미들은 베짱이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습니다. 베짱이는 일을 하지 않고 놀기만 한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열심히 일한 개미들은 배부르고 따뜻하게 겨울을 보낼 수 있었지만, 베짱이는 배고프고 추위를 이기지 못하여 죽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나는 커서 열심히 일하여 먹을 것이 있고,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교에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여 가난을 물리쳐야 한다고 귀가 닳도록 들었습니다. 놀기만 좋아하다가는 베짱이처럼 가혹한 저주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논다’는 말이나 ‘쉰다’는 말을 죄악처럼 느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서구문명이 발달한 사회일수록 여가를 죄악시하지 않고, 아주 귀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을 봅니다.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가란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며, 가장 고귀한 인간 활동”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휴가가 단순한 놀기 위함이나, 소비 위주의 휴가가 아니라, 즐김과 여유를 가지는 건전한 휴가문화를 만들어가야겠습니다.
우리 사회가 일중독에 걸린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일중독이란 말은 “계속해서 일을 하다 보니 일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하게 여기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일중독의 3단계”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독일의 신경정신과의 의사 페터 베르거박사는 “하던 일을 중단하거나 미룰 수 있다면 건강하게 일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일중독의 3단계가 있는데, 1기입니다. 집에 와서도 일하는 사람입니다. 일중독의 2기는 일중독에 걸렸다고 자각하면서 일부러 취미, 봉사, 여가를 하려는 경우입니다. 일중독의 3기는 어떤 일이든 환영하고, 주말이나 밤에도 일하고 건강이 무너질 때까지 일에 매달리는 경우입니다. 일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는 식으로 매달리는 것이 건강을 해치고 맙니다.
일중독을 이길 수 있도록 미리 예방해야 됩니다. 일중독의 예방법을 말합니다. 쉬는 시간을 정하고 쉬어라, 자기의 사생활을 즐겨라. 퇴근 후 친구를 만나고 취미생활을 누려라. 주말에는 일을 하지 말라. 외출, 영화구경, 취미 활동을 즐겨라. 휴가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라. 시간을 내서라도 가족과 함께 대화하고,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라고 합니다.
무작정 열심히 일한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일은 집중적으로 계획성 있게 처리해야 합니다. 일의 순위를 정해야 좋습니다. 스스로 조절이 힘들면 주위에 도움도 청하고, 필요하면 정신과 상담도 하라고 합니다.
일주일 동안 열심히 일한 사람이 안식을 누릴 때 참된 안식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안식을 말하고, 성수주일을 말하는데, 먼저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할 것을 명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됩니다.
출20:8-9을 보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엿새 동안의 창조의 사역을 마치면서 일곱째 날에 하나님이 쉬셨습니다.
출20:11에서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일곱째 날에 쉬셨다고 합니다.
창세기2:2-3에는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하던 사역이 너무나 힘들어서 쉬셨는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쉬어야 할 정도로 피곤을 느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해보면 안식일은 하나님을 위한 날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휴식을 위한 날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것도 모두가 우리 인간을 위한 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은 “일을 마치시고 일에서 손을 떼셨다.”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우리를 흙으로 지으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인간이란 끊임없이 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주기적으로 쉬어야 하는 존재인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쉬니 너희도 쉬어라.”고 했습니다. 어찌 생각해보면 이 말은 강압적인 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 강압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라고 하는 초대인 것입니다.
신학자 몰트만 박사는 “하나님의 창조의 꽃은 인간이 아니라, 안식이다.”고 했습니다. 모든 창조의 사역은 안식일로 끝나고 있습니다. 창조의 마감은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을 소중히 여길 때에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이해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경외할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대학 출신이신 전주대학교의 김경래 박사는 그의 책 ‘나의 왕 나의 창조주’에서 “일곱째 날, 곧 안식일은 사람의 날이요, 사람을 위한 날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일을 멈추시고, 오히려 모든 피조물 중의 머리인 사람으로 충분한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하루를 기다려 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충분한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하루를 기다려 주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김교수는 하나님과 인간의 다른 점을 말하는데, ‘하나님은 일을 마치시고 손을 놓으셨지만, 우리 인간은 쉰 다음에 일을 시작해야 하는 존재’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아담이 창조된 날이 제6일인데 유대인의 관습에 따르면 해가 지면 날짜가 바뀐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담은 창조된 직 후 저녁부터 안식일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는 아무 일도 하기 전에 안식부터 누렸습니다. 안식일은 그에게 단순히 노동에서 휴식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었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며, 예배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먼저 쉬고 일한다는 개념이 좀 어색하여도 최초의 인간 아담은 그런 배려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인간을 위한 날입니다.
장신대학의 현요한 교수는 “내가 쉬니 너희도 쉬어라”는 그의 글에서 안식일의 규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것은 얽매는 종교적 계율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된 안식에의 초대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유익하게 하시려고 안식일을 주셨지, 우리를 얽어매고 부자연스럽게 하고, 속박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명령하십니다. “내가 쉬니 너희도 쉬어라” 이것은 하나님의 안식을 함께 누리라는 초청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만 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안식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인만 쉬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가족들과 종들, 집에 머물고 있는 나그네들, 그리고 그 집에 있는 모든 가축들까지도 안식하라고 하십니다. 일하는 가축도 쉼이 있어야 건강하고, 일도 잘하고, 오래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창조의 원리에는 복이 따르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창조라는 관점에서 안식일을 말할 때에는 안식을 지켜야 하는 근거를 하나님의 안식에 두고 있지만, 신명기5:15에서는 구원에 두고 있습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 사건을 회상하시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하면서 구원받은 백성으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으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구원하신 택하신 백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전에 종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전에는 아무런 자유가 없는 죄악의 종이었으나,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강하신 손과 펴신 팔로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안식일을 지키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성수주일 하시면서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여야겠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안식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주님의 은혜를 회상하면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겠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주일을 지키면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기억하고, 떠올리고, 회상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개신교회는 주일을 작은 부활절로 지키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주일에 대한 구별의식이 점점 식어만 가는데, 우리는 주일을 성수하여야겠습니다. 성수하라는 말은 거룩하게 지내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막2:27-28에는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했습니다.
“미르바 던” 박사는 리전트 신학교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치는 분으로 여러 권의 책을 쓰셨는데, 미국에서는 잘 알려진 분입니다. 이 분이 쓰신 책 중에 “안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원래의 제목은 “Keeping The Sabbath Wholly”라고 합니다. “온전히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그는 안식하려면 4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그침입니다. 일을 그치고, 생산과 성취를 그치고, 근심과 걱정, 긴장을 그치고, 하나님이 되려는 노력을 그치고, 우리의 소유를 그치고, 우리의 문화 순응을 그치고, 단조로움과 무의미를 그치라고 합니다. 이 그침이라는 말을 진정으로 공감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두 번째는 쉼을 말합니다. 영적인 쉼, 육체적인 쉼, 정서적인 쉼, 지적인 쉼, 사회적인 쉼을 말합니다. 분주하면 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받아들임을 말합니다. 의도성을 받아들이고, 기독교 공동체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공간 대신 시간을 받아들이고, 요구하기 대신에 주기를 받아들이고, 삶에서 우리의 소명을 받아들이며, 온전함- 샬롬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네 번째는 향연을 말합니다. 영원에 대한 향연, 음악이 있는 향연, 아름다움이 있는 향연, 음식이 있는 향연, 애정이 있는 향연을 말합니다.
여기서 미르바 교수는 그침을 아주 중요하게 말합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고 하셨지만, 원문에는 “그치셨다”는 말이었습니다. 일을 그치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이 날을 성회라고 하면서 “너희는 무슨 일이든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레위기23:3 에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의 날이라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쉰다는 말은 그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에 안식하는 것을 고려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에게는 안식일 리듬이 있습니다. 미르바는 “순종하기를 배우라. 자신의 리듬보다 우월한 리듬에 순종하는 자만이 자유롭다.”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체 리듬을 주셨는데, 일곱째 날에 안식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리듬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일곱째 되는 날에 쉰다는 사실 때문에 엿새 동안 일에 열심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생체리듬, 안식일을 주기로 하는 생체리듬은 하나님의 정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12제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막6:7에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둘씩 보내셨습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예수님에게 활동한 것을 보고하였습니다.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였습니다. 31절 말씀에서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일하라, 계속 일하라, 일에서 손을 놓지 말라, 그래야 천국에서 상이 크다.”고 말씀하지 않고,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이런 말씀은 예수님이 아니고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인간의 약함을 아셨습니다. 그런 말씀 가운데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날 제자들은 사실 쉬지 못하고 오병이어의 사건으로 인하여 더 분주하게 일하였지만 주님은 제자들로 한적한 곳에 가서 쉬라는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사랑하셔서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의 교수인 한국사람 이문장 박사는 “한국교회의 주일 성수에 관하여”라는 기고문에서 우리 한국교회가 주일을 지키는 여러 유형을 연구하고 비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성수주일이란 주일에 해서 안 되는 일들은 피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보수적으로 주일에 음식을 사먹지 않고, 오락을 폐하고 매매를 금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적 각성운동의 영향을 받은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주일성수란 새벽부터 저녁까지 교회를 중심으로 주일을 보내고, 교회 안의 다양한 모임에 참석하면서 활동하는 것을 주일성수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부류는 주일예배는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하지 말아야 할 목록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이것은 주일 성수 개념이 느슨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에 속하십니까? 우리교회는 세 부류의 교우들이 다 있는 것 같습니다.
에릭 리들은 단거리 달리기 영국 대표로서 1924년 제 8 회 파리 올림픽 경기의 금메달 후보였습니다. 그러나 100 m 경기 일정이 발표되었는데 첫 예선 일자가 7월 6일 주일 오후 3시와 5시였습니다. 그는 일정표를 보자마자 “저는 주일에는 뛰지 않습니다.”라고 단호한 결정을 대표선수단에 알렸습니다. 그의 그런 결정은 주일 성수를 위한 그의 희생적인 결단이었으며, 주일은 주님의 날이므로 주님을 위한 일만을 해야 한다는 신앙의 결단이었습니다.
에릭 리들의 100m 출전 포기를 들은 영국 전체의 반응은 냉소적이었습니다. 그를 가리켜 “편협하고 옹졸한 신앙인”, “신앙을 소매 끝에 달고 다니는 신앙심 깊은 척 하는 위선자”, “조국의 명예를 버린 위선자”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릭 리들은 100m 예선 경기를 하던 7월 6일 주일에는 스코츠 커크 장로교회에 가서 간증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날 에릭 리들은 경기장에 나가 동료들을 응원하지도 않고, 평소처럼 주일에는 교회에서,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100m 경기는 영국의 동료인 헤롤드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의 기록은 에릭 리들보다 약간 뒤졌었습니다. 에릭은 기쁜 마음으로 헤롤드의 우승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릭을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에릭은 자신의 주 종목이 아닌 200m에서 동메달을 땄고 400m에도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400m는 다른 선수들의 들러리였습니다. 예선에서 이미 스위스의 임바흐와 미국의 피치 같은 선수들은 세계 신기록을 세우면서 우승 후보로 각광을 받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결승전이 왔습니다. 에릭은 신들린 사람과 같이 무서운 속도로 첫 코너를 돌았습니다. 경기를 지켜보던 전문가들은 “에릭이 저런 속도를 유지하다가는 도중에 쓰러져 죽을 지도 모른다.”고 불안감을 표현하였습니다.
에릭 리들은 임바흐, 피치 등의 우승 후보를 제치고 47초6 이라는 세계 신기록까지 세우면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가 결승전에 출전할 때에 담당 안마사가 쥐어준 쪽지가 응답되었던 것입니다. “구약에 이런 글이 있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나도 존중히 여기리라. 최선의 영광이 있길 빌면서”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나도 존중히 여기리라”는 말씀은 사무엘상2:30 하반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는 400m우승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처음 200m는 제힘으로 최선을 다하였고,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빨리 달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주일이 자기를 위한 날이 아니고 주님을 위한 날이라는 사실을 삶으로 설교한 위대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주일은 하나님의 날이요, 우리 주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우리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일을 구별해야 됩니다. 주일에는 일손을 놓고 쉬어야 합니다. 매 주일마다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 함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은혜를 받아야만 능력을 발휘하면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일이 없었다고 하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신앙을 유지할 수 없었고, 축복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의 복음을 듣고 나가서 살 때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수주일로 일생을 복되게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