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없는 인생을 위하여 (왕하 13:14-20)
본문
한 부잣집에서 주인이 종들을 불러 놓고 같은 양의 짚을 주면서 새끼줄을 가늘고 길게 꼬라고 하였습니다.
게으른 종들은 새끼줄을 두껍게 꼬아서 금방 짚을 다 소비하고 잠을 잤습니다.
그러나 성실한 종들은 그 새끼줄을 최대한 가늘고 길게 꼬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주인은 자신들이 꼰 새끼줄을 가지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금고를 열고 ‘그 안에 동전들을 꿸 수 있는 대로 꿰어라’고 하였습니다.
주인의 명령을 형식적으로 따랐던 종들은 세끼 줄이 두꺼워서 동전구멍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새끼줄을 가늘게 꼰 성실한 종들은 많은 돈을 꿸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꾀를 부리지 않고 성실과 정성을 다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비록 정성을 들인 일이 대충 한 일보다 나쁜 결과가 나오더라도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사람은 성실함 자체가 상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칭찬 듣는 사람,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성실히 섬기는 사람이 바로 믿음의 사람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 불성실하게 형식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다가 큰 손해를 본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1. 선지자의 말을 성의 없이 들은 요아스 왕을 보십시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사]가, 마지막 임종을 앞두고 이스라엘왕 [요아스]와 만나서 나눈 대화가 이록되어 있습니다.
[요아스]왕은 [엘리사]가 죽는 것이 아쉬워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합니다.
[요아스]왕은 지금까지 [엘리사]의 기도가 이스라엘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였던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의 임종을 바라보며 [요아스]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프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앞날이 걱정스러웠던 [요아스]는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했습니다.
그런데 왕에게 [엘리사]는 활을 잡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왕의 손에 안찰을 해주고 동쪽 창문을 열고 쏘라고 합니다.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활과 살들을 취하소서. 활과 살들을 취하매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왕의 손으로 활을 잡으소서. 곧 손으로 잡으매 [엘리사]가 손으로 왕의 손을 안찰하고 가로되 동편 창을 여소서. 곧 열매 엘리사가 가로되 쏘소서....”(15-17)
[요아스] 왕은 시킨 대로 동편을 향해 활을 쏘았습니다.
그 활은 힘차게 날아갔습니다.
[엘리사]는 ‘그 화살은 구원의 화살이기 때문에 앞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아람 군대를 이스라엘이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언을 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왕에게 다시 화살들을 통에서 끄집어내서 땅을 치라고 합니다.
18절 말씀을 보니 “또 가로되 살들을 취하소서. 곧 취하매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이에 세 번 치고 그친지라.” 그랬습니다.
[엘리사]는 지금 임종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과 마주하여 유언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일들이 [요아스] 왕에게는 장난처럼 여겨졌던 모양입니다.
동쪽으로 활을 쏘라 하질 않나, 활들을 잡고 땅바닥을 치라고 하질 않나, 왕은 아이들 장난 같은 말에 ‘이 선지자가 죽어가면서 노망을 했나?’하는 생각이 들었던 지 형식적으로 세 번 탁탁탁 치고 말았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대로 보면 “세 번 치고 그친지라”라고 했습니다.
아주 무성의한 태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죽어가면서 활을 바닥에 치라고 했으면 좀 열심히 쳤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엘리사]가 그만 치라고 할 때까지 열심히 쳤으면 참으로 좋았을 일입니다.
그런데 [요아스]는 탁탁탁 세 번 치고 그쳤다고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엘리사] 선지자는 크게 화를 냈습니다.
‘좀 성의 있게 대여섯 번만 땅을 쳤어도 이스라엘에 큰 구원이 이루어져서 아람군대를 완전히 물리칠 수 있을 텐데 세 번 밖에 치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왕이 아람군대를 세 번 밖에 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아무 설명 없이 화살로 땅을 치라는 선지자의 말씀을 왕은 성의 있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 장난 같이 들리는 선지자의 말을, 성심 성의껏 따르지 않고, 형식적으로 따르다가, 하나님께 축복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요아스]왕은 선지자의 말씀에 성심껏 따르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가 없었습니다.
이왕 치는 것 조금만 성의를 가졌더라면, 선지자가 그만 치라고 할 때까지 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런데 화살로 땅을 치라는 선지자의 말씀을 진지하게 듣지 않고 장난삼아 듣고, 순종하는 흉내만 내다가, 아람군대에 대한 완전한 승리의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2. 우리도 성의 없는 태도로 살아왔던 날들이 많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 보면, 조금만 더 열심히 정성을 기울였으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일들이 많았는데, 작은 일이라고 무시하다가 후회할 때가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지속했더라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기회들을 놓친 기억도 있습니다.
사람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쩌면 실패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미국 미시간주 ‘앤아버로’라는 도시에 실패박물관이 있습니다.
이 박물관에는 1965년부터 37년간 미국의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당해 시장 개척에 실패한 신제품들을 모아놓았습니다.
식품 이만팔천여점, 음료 팔천여점, 이용제품 일만 삼천여점, 가정용품 육천칠백여점, 애완동물용품 일천여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회사에서 신제품을 만들면 그 중에 80-95%는 실패한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사실은 이 박물관은 신제품들을 모아놓은 곳인데, 신제품 거의가 다 실패하기 때문에 실패박물관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요즈음 미국의 큰 회사 임원들이 이 박물관을 찾는다고 합니다.
과거의 실패를 거울로 삼아 다시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계속해서 실패박물관에는 시장개척에 실패한 수많은 제품들이 쌓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회사에서 만들어낸 제품들만 실패한 것이 아니고, 우리 각 개인이 인생을 살면서 했던 일 중에 많은 일들이 실패합니다.
실패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후회 없는 실패가 있고, 후회 막심한 실패가 있습니다.
열심히 했지만, 전쟁이나 천재지변이나 IMF 같은 돌발변수로 실패하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해도, 역시 실패 했을 터이니 후회 막심한 실패는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실패한다면, 그런 실패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좀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는데, 게으르고 나태해서 실패했다면, 그 실패는 후회 막심한 실패입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정성을 다 기울여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정말 정성을 들여서 해 봅시다.
우리는 많은 일들을 더 잘 할 수 있는데, 더 잘하지 못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나에게 시간과 재능과 능력이 있는데, 그것을 다 사용하지 않을 때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 섬기는 일을, 정성을 들여서 해봅시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잘 섬길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 섬기는 일에, 내가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는데, 게으르고 나태하고 성의가 없어서 못하고 있는 부분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기쁨도 없고 신앙이 성장 하지도 않고, 맨 날 교회만 왔다 갔다 하지, 생활도 변화도 없고, 하나님의 축복도 받지 못하고 사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대개가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분들입니다.
하나님 섬기는 일에, 정성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에, 모든 정성을 다하여서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
/. 예배를 정성을 다하여 드려야 합니다.
예배는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예배는 신앙생활의 완성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고 은혜를 받아야, 힘을 얻어서 봉사할 수 있고 전도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않고 하는 봉사는, 곧 지치게 됩니다.
예배를 잘 드리지 않고 성경공부를 하면, 자기 교만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정성껏 드려야 합니다.
우선, 주일 예배에 정성을 다해서 참여해야 합니다.
조금만 정성을 기울이면, 빠지지 않고 참석할 수 있습니다.
정성만 있으면, 얼마든지 지킬 수 있습니다.
만약 주일에 결혼식이 있으면, 결혼식 전날에 찾아가서 당사자와 부모를 만나서, ‘저는 내일 교회 가는 날이라 일찍이 찾아왔습니다. 대신 교회에 가서 두 사람이 잘 살도록 기도하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면, 결혼 당일에 온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할 것입니다.
주일은 하나님께 꼭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정성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도, 성의가 없어서 나오지 못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피곤하다.’ ‘친구가 찾아왔다’ 별 핑계를 다 댑니다
/.예배시간을 지키도록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마태복은 25장에 보면, 열 처녀 비유가 있습니다.
신랑을 맞이하는 열 명의 처녀들이 신랑을 맞이하러 갔습니다.
다섯 명의 처녀들은, 신랑이 늦게 올 것을 대비하여, 기름병을 따로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다섯 처녀는, 기름병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신랑이 늦게 오자,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들은, 등불이 꺼지자, 기름을 준비하러 갔습니다.
그 때에 신랑이 와서, 모두 결혼잔치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기름을 준비하러 간 다섯 처녀들은, 시간이 늦어서 잔치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왕 예배드리는 것, 조금만 더 시간에 신경을 써서, 예배시간 10분전에 나와서 준비기도하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은혜 받을 수 있게. 복을 받게 드려야 합니다.
외국에서는, 손님을 초대하면, 너무 일찍 가도 실례라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충분히 실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시간은 일찍 오실수록 좋습니다.
/. 몸과 마음을 다해,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들어왔을 때에는, 많은 신자들이, 토요일 저녁에는 꼭 목욕을 하고, 다음날 교회에 왔다고 합니다.
그 때에는, 목욕시설이 없던 시절입니다
데운 물을, 통에 붓고 목욕하던 시절입니다
목욕을 하고 왔으니, 옷은 얼마나 정성껏 준비했겠습니까?
토요일이 되면, 할 수 있으면, 몸가짐을 바르게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토요일 날 모임이 있으면, 늦지 않도록 하고, 할 수 있으면, 술자리 같은 것은 피해야 합니다.
주일날 입을 옷도, 토요일 날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꼭 비싼 옷을 입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깨끗한 옷, 내가 가진 것 중에서, 제일 좋은 옷을 입어야 합니다.
좋은 옷 놔두었다가 어디다 쓸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입고 오시면 좋지 않습니까?
/. 헌금을 정성을 다해 드려야 합니다.
내 힘에 지나도록 드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능력 한도에서, 정성을 다해서 드려야 합니다.
옛날 신자들은, 돈을 다리미로 다려서, 헌금을 하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헌금할 돈은, 미리 집에서 챙겨서 오셔야 합니다.
이왕 하나님 섬기는 것, 정성을 다해서 섬겨야 합니다.
이왕 예배드리는 것, 정성을 다해서 드려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 받는 도구입니다.
예배는 몸과 마음과 헌금을 준비하여서 드려야 합니다.
이런 예배가 정성이 있는 예배입니다.
구원의 왕을 만나는 기쁨과 경외감이, 예배드리러 나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어야 합니다.
/. 사람들에게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속을 썩이는 아들을 둔 부모님 형제들, 어떨 때는 정말 차라리 죽고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남편이나 아내에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차라리 사라져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만큼 미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죽거나 사라져 보세요.
후회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잘해주는 건데, 좀 더 따뜻하게 대해 주는 건데, 이렇게 빨리 죽을 줄 알았으면, 그 때 용돈이라도 넉넉하게 주는 건데 후회하게 됩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오늘 죽어도 후회함이 없으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 쏟아야 후회하지 않습니다.
항상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죽거나 병들면 못합니다.
상대방이 병들거나 죽거나 멀리 떠나면, 해주고 싶어도 해주지 못합니다.
그들이 나에게 어떻게 하든지 상관 말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야 합니다.
정성을 쏟으면 그만큼 돌아옵니다.
예수님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한 만큼, 나도 너에게 한다.”
우리 대부분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그가 나에게 해주는 만큼이 아니고,
그가 나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만큼 해주어야 합니다.
별 쓸모없는 것도, 정성을 들이면, 가치 있는 것으로 변화됩니다.
쓸모없이 보인 사람들도, 정성을 다하여 돌보고 섬기면, 쓸모 있는 사람들로 바뀝니다.
밥상을 차리는 주부들은, 이왕 차리는 것, 좀 귀찮고 힘들어도, 모든 정성을 다하여서 차려야 합니다.
진수성찬을 차리라는 것이 아니고, 김치에 된장국이라도, 모든 정성을 드려야 합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에든지,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 이탈리야의 지체 높은 공작이,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노동자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 노동자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아주 진지하게 상자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작은 노동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만들고 있는 상자를 어디에 쓸 생각입니까?”
“공작님, 저는 여기에 꽃씨를 뿌릴 생각입니다.”
공작은 아주 재밋다는 듯이 계속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흙을 담아야겠군요. 기왕 흙으로 채울 상자라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정성을 다해서 다듬습니까? 적당히 해두시지!”
“저는 무슨 일이나 완벽하게 하기를 좋아합니다.”
“쓸데없는 일에 애를 쓰고 있군요. 꽃을 가꿀 상자를 말끔하게 만들었다고 누가 쳐다볼 줄 아시오? 아무거나 그저 상자면 되었지. 그렇게 훌륭하게 만든다고 누가 알아주는 사람 있습니까?”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셨던 예수님이었다면 그분은 능히 할 수 있는 일을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대충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미켈란젤로]에 대한 일화입니다.
남들이 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해왔다고 해서, 더 정성을 드릴 수 있는데 하지 않았다면, 크리스천의 삶의 자세가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이보다 더 잘 할 수 없을 만큼,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십니다.
/////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무엇을 하든지 모든 정성을 다 기울여서 하나님과 사람 보시기에 아름답게 처리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회에서 신임을 받고 인정을 받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실력 있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성실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제 아무리 실력이 있다 해도, 진실이 없고, 성실함이 없는 사람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진실함이 있고, 성심을 다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인정해 줄 수밖에 없습니다.
금년도 우리교회 표어는 <사명을 위해 지음 받은 우리>입니다.
우리 모두 사명을 따라 각자 맡은 부서에서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사역을 열심히 감당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 모든 사명을 감당하되 후회가 없도록 성실하게 감당합시다.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최선을 다해 진실하고 성실하게 감당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실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성실해야하고, 믿음의 삶에 성실해야 합니다.
장난삼아, 성의 없이, 탁탁탁 치고 멈추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최선을 다하고, 성심을 다하여 순종하는 모습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아스] 왕의 모습을 잊지 마십시다.
[엘리사]가 말씀할 때, 성의를 다하여 바닥을 내리쳤더라면, 원수들을 영원히 막아냈을 것을, 성의 없이 세 번만 친 것으로 인해, 세 번의 승리밖에 얻지 못했던 슬픔을 기억하시고, 이제부터 우리는,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하여 성심과 성의를 다하고, 몸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김포중앙교회 사역자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박영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