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최고로 중요한 이유 (고전 13:1-3)
본문
'큰 일을 하려하지 말고 큰사랑으로 일하십시오'. 테레사 수녀의 소중한 권면입니다. 그는 신앙의 핵심인 큰사랑을 잃고 그 대신 큰 일을 추구하는 현대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병든 모습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과 핵심이 사랑에 있음을 가르침과 삶을 통해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막 12:28-31). 그러나 예수님 당시 유대교가 그랬듯이 신약교회도 종종 신앙의 중심인 사랑을 상실합니다. 고린도교회가 바로 그런 함정에 빠져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엔 언어의 마법사, 깊은 신학지식의 소유자, 강력한 리더, 열정적 헌신자들이 많았습니다. 한 마디로 큰일을 할 만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내부를 들여다보면, 성도들간의 분열, 고소와 갈등 등의 내홍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랑이 저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최선의 적은 최악이 아니라 차선이다'는 격언은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되는 정말 위대한 격언입니다. 최악에 빠져 최선을 잃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차선에 매료되어 그만 최선을 놓치는 치명적 우(禹)를 범하는 경우는 매우 많습니다. 하여 바울은 최선인 사랑보다 높은 위치로 올라가기 쉬운 차선들을 하나씩 짚어 가면서 사랑이 없을 때 그 모든 것들이 다 무용지물로 전락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바울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사랑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가 있는 것들을 제 자리로 내려 앉히고 사랑을 최고의 자리에 복귀시키는 대전환을 실행할 수 있길 바랍니다.
1. 사랑은 언어의 마술보다 더 중요합니다(1)
바울은 사랑보다 높은 위치를 차지하기 쉬운 것으로 우선 언어와 관련된 재능들을 지목합니다. 즉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방언'입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방언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바울은 부연 설명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알 길은 없습니다. 다만 사람의 방언은 좀더 일상적인 언어에 가깝고 천사의 방언은 좀더 신비한 언어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을 뿐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엔 이런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사람들의 존중을 받았습니다.
사실 이는 언어로 의사 소통하는 인간 공동체에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언어는 인간이 다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입니다. 인간이 만물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도 언어 없이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언어의 능력은 사실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선물입니다. 역설적으로 언어가 잘 통하였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 공동체가 거대한 바벨탑 프로젝트를 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를 잘 아시고 언어를 혼잡케 하자 그 프로젝트는 즉각 무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언어구사와 소통의 능력은 예나 지금이나 큰 일을 해낼 수 있는 소중한 조건입니다.
지난 독일 월드컵 중계를 잘해서 어떤 사람은 확실히 뜬 반면 어떤 사람은 말 몇 마디를 잘못해 도중하차하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말 잘하기로 유명한 모 방송의 유명한 시사토론 프로그램 진행자는 모대학의 전임교수로 발탁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권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러브 콜을 받고 있습니다. 미국의 공휴일 중 이틀이 위대한 지도자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과 흑인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명 연설가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링컨은 민주주의를 한 마디로 요약한 겟치스버그 연설을 킹은 '내겐 꿈이 있습니다'는 연설을 남겼습니다.
교회에서도 언어의 재능은 훌륭한 효용가치가 있습니다. 제가 한 두 번 『긍정의 힘』라는 슈퍼 베스트 셀러의 저자인 요엘 오스틴 목사님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교회를 물려받은 지 6년만에 교회를 4배나 성장시켜 지금은 매주일 3만 명이 모입니다. 미국 기독월간 「처치 리포트」는 7월 최신호에서 미국 교회지도자 2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미국에서 영향력 있는 50대 교회를 선정했는데 요엘 오스틴이 시무하는 레이크우드 교회가 4위를 차지했습니다. 그 핵심적인 원동력은 그의 탁월한 설교능력입니다. 저도 동영상을 통해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용은 아주 단순하고 늘 반복적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가 듣기에도 재미있고 감동적이에요. 저는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이런걸 두고 언어의 마술이라고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언어의 마술을 사랑을 위협하는 위험대상 1호로 지목합니다. 언어의 마술적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고 경고합니다. 이는 단순히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당시 고린도 도시에는 디오니소스 같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징과 꽹과리를 울리며 열광적으로 우상을 섬겼습니다. 바울은 사랑이 결여된 언어의 마술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결국 우상을 열정적으로 섬기도록 도와줄 뿐이라고 넌지시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평가입니까? 목사의 설교에 나타난 말재주만 보고 그의 진정성을 신뢰하거나 그가 시무하는 교회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입니까?
물론 우리는 언어의 능력을 개발하고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인들보다 방언을 더 많이 말하는 것을 인해 감사한다고 까지 하였습니다(고전 14:18). 바울은 결코 방언을 비롯해 다양한 언어의 능력 자체를 폄하하거나 비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언어의 마술에 매료된 나머지 사랑의 우선성을 놓치는 치명적 실수를 범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언어의 마술에 푹 빠져 십자가 복음을 저버릴 위기에 처한 고린도교인들에게 경고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속히 여러분에게로 가서, 그 교만해진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습니다'(고전 4:19-20). 여기서 능력이란 무엇보다도 사랑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을 스스로 실천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자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사랑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말재주보다 사랑의 능력을 더 소중히 평가하는 의식의 대전환이 우리에게 있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2. 사랑은 다양한 재능의 총체보다 더 중요합니다(2)
사랑보다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쉬운 두 번째 목록으로 예언하는 능력, 모든 비밀과 지식의 소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듭니다. 예언하는 능력이란 원래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정경을 갖고 있는 신약교회시대에 엄격한 의미에서 예언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은 없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예언자는 사도와 함께 교회의 터를 놓는 역할을 했습니다(엡 2:20). 터는 한번 놓이면 집을 다시 부수지 않는 한 다시 놓을 수가 없다는 점에서도 신약교회시대에 예언자는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언의 능력을 바울이 의도한 것보다 넓고 느슨하게 이해하면 오늘날에도 그에 유사한 능력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정확히 이해하여 그 의미를 개인, 공동체 그리고 시대정황에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는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보통 사람들은 발견하지 못하는 개인, 교회 그리고 사회와 시대의 죄악상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본대로 증거할 수 있는 담대함을 포함합니다. 교회와 사회가 잘못된 길로 걸어가지 않으려면 꼭 필요한 능력입니다.
모든 비밀과 지식이란 사람이 스스로 노력해서 터득하게 된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 즉 계시를 통해서 얻게된 지혜의 총체를 말합니다. 성경저자들, 오늘날로 보자면 탁월한 신학자를 비롯해 지적 능력이 뛰어난 신앙인들이 이런 것들을 지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성경적 진리를 시원하게, 체계적으로 그리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란 산처럼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장벽을 헤치고 나가는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믿음을 말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을 리더로 갖고 있는 공동체는 행복합니다.
이상의 재능을 모두 갖춘다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움직여 정말 큰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들은 교회와 공동체에서 크게 높임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폭탄선언을 합니다. '내가 이런 재능들을 모두 갖추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는 성과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실로 도전적인 고백입니다. 한국사회와 교회는 오랫동안 '할 수 있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물량적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데 익숙해져 왔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인물은 그 목표를 단시일 내에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재능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재능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지 '사랑을 보여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잣대로 성공의 질을 평가하려는 것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물량적 성공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왜곡된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성공의 질을 평가하려는 것은 성공에 대한 시기의 발로일 뿐이요 자신의 실패를 정당화하려는 비겁한 짓일 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사랑이 결여되어 있으면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재능일지라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예수님도 질적으로 형편없는 사람이 외형상 큰 업적을 남길 수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면 주님의 이름을 열정적으로 부르면서 이렇게 자랑스럽게 말할 것입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했으며 주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냈으며 주의 이름으로 수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응답하십니까?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거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 7:23). 정말 가슴 섬짓한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이라는 중심을 절대로 잃어서는 안됩니다. 단순히 재능과 사랑을 겸비한 사람을 선호한다는 원리적 수준에 머물러 있어선 안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실제론 사랑보다 재능을 더 선호하는 이중적인 자신의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첫째가 재능과 사랑을 겸비한 사람, 둘째가 재능은 부족해도 사랑이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재능은 있어도 사랑이 없는 사람은 아예 존경대상이나 선호대상이 되서는 안됩니다. 치유대상입니다.
치유대상에 열광하는 가정, 교회와 사회는 깊이 병들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회양극화의 심화 그리고 미국과 북한에 대한 시각편차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한미 FTA를 둘러싼 논쟁으로 사회구성원간에 불신은 깊어져만 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대로 담임목사직 세습, 재정비리, 성폭행 등 각종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 교회와 사회에 결코 재능 있는 인재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각종 재능은 있되 사랑이 결여된 사람이 교회와 사회의 지도자 위치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부터 먼저 사랑을 그 어떤 재능보다도 더 소중한 가치로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것입니다.
3. 사랑은 구제와 헌신보다 더 중요합니다(3)
사랑의 중심적 위치를 위협하는 세 번째 목록으로 바울은 놀랍게도 구제와 열정적 헌신을 듭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얻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을 먹이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나눠주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행위입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런 놀라운 구제행위에도 사랑이 결여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희생적인 구제행위도 결국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기 위해 계산된 이기적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이는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도 속기 쉽습니다.
지난 6월 26일 세계에서 두 번째 부자인 미국의 워렌 버핏이 자기 총재산의 80%에 해당하는 374억불(대략 36조원)을 5개 자선 단체에 기부한다고 발표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기부금 중 대부분을 이미 세상을 떠나긴 했지만 자신이 아내 이름으로 된 재단에 기부하지 않고 세계1위 부자인 빌 게이츠 부부가 운영하는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보내기로 해 감동을 더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더 감동 받는 것은 그의 기부행위에 대한 설명입니다. 버핏은 경제잡지인 「포천」과의 인터뷰에서 '운이 좋아 부자가 됐으니 사회로부터 번 재산을 사회로 돌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연히 사회로 돌아가야 할 것을 되돌리는 것일'뿐이라는 것이죠. 자기를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잘 안보입니다. 물론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마음은 주님만이 아십니다. 그런 언급마저 사람들로부터 박수와 갈채를 받기 위한 것이라면 아무리 희생적인 기부행위라고 해도 거기엔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한국개신교회는 한국사회복지활동의 70%를 담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늘 서운해합니다. 실적에 걸맞은 한국개신교회의 이미지와 위상을 개선하기 위해 홍보활동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핵심을 놓친 생각입니다. 한국개신교회의 사회복지활동이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행위는 아니었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홍보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발상이 바로 그런 마음 자세를 반영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을 위하고자하는 진실한 마음만이 기부행위의 유일한 동기가 될 때 기부행위는 비로소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훌륭한 목표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 불사르는 행동 역시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느부갓네살 왕이 만든 금 신상에 절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자기들 목숨을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질 각오를 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헌신적인 행동에도 사랑이 결여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언덕의 한 성도님이 매우 존경하여 추천한 팀 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참조하였습니다. 그 설교에 나와있는 예보다 더 좋은 예를 찾을 수 없어서 그대로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혹시 『오만과 편견』이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죠. 셋째 딸 메리가 등장하는 데 그녀는 가족들 중 가장 도덕적인 크리스천이고 항상 기독교의 덕목들을 사람들에게 훈계조로 말합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오스틴은 그녀의 경건의 동기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녀는 가족들 중 가장 평범했고,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가장 종교적이고 희생적인 사람이 되는 편을 택했다'. 사실 저도 마음이 많이 찔리는 구석이 있습니다. 저는 학창시절 공부로나 신앙생활로나 소위 모범생/우등생그룹에 속했죠. 그러나 나의 신체적·경제적 여건이 뛰어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꼭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산다면 거기엔 사랑이 결여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전태일 열사를 존경합니다. 그가 노동자의 권리 회복을 위해 자기 몸을 실제로 불살랐다는 점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는 마음의 결단을 내리는 날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 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푸소서'. 그의 불사르는 행동에는 깊은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경고합니다. 이런 사랑이 담겨 있지 않으면 재산을 모두 팔아 기부한 사람도, 자기 몸을 불사른 사람도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인정과 칭찬은 별거 아닙니다. 수시로 변할 뿐 아니라 길게 가본들 당사자에게 그 유효기간은 죽음과 함께 끝납니다.
오늘 바울은 사랑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그 가르침의 방법에도 사랑의 정신이 깃들여 있습니다. 남을 빗대어 비판하지 않고 자신의 경우로 가정해서 교훈을 전개합니다. 이제 바울의 가르침을 마음에 깊이 새겨 다른 어떤 차선에도 마음의 첫 자리를 빼앗기지 말고 오직 사랑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살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