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자유인의 모습 (고후 1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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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에 제작되어 1996년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등 5개 부문을 수상한 멜 깁슨 주연의 브레이브 하트(Brave Heart)라는 영화가 국내에서도 상영된 적이 있습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는 스코틀랜드 지역 주민들이 잉글랜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던 중에 나타난 민족 영웅 윌리엄 월레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어린 월레스의 아버지가 잉글랜드 병사들의 습격으로 죽고 마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간신히 살아 남은 어린 월레스는 다른 마을로 보내져 거기서 성장하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성장한 월레스는 다시금 자신의 고향 마을로 돌아오지만 잉글랜드의 학정은 갈수록 더 심해집니다. 심지어 프리마 녹테까지 행해집니다. 프리마 녹테란 일명 초야권이라고도 하는데 중세 시대 평민이나 농노가 결혼할 때 신랑을 대신하여 영주들이 첫날밤 신부와 성관계를 갖는 권리를 말합니다. 오늘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여간 월레스는 그 초야권을 피하기 위해 사랑하는 여인 머론과 비밀리에 결혼식을 치릅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다만 조용히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인이 잉글랜드 병사들의 손에 의해 비참하게 희생되자 그는 복수를 결심합니다. 순식간에 주둔군 부대를 궤멸시키고 반란의 횃불을 높이 들자 그 동안 잉글랜드의 폭정에 시달려 온 많은 스코틀랜드 민중들이 월레스의 반란군에 합류하게 됩니다.
1297년 에드워드 1세의 군대는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스털링(Stirling)이라는 지역에서 일대 접전을 벌입니다. 모든 면에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전술로 월레스는 큰 승리를 거둡니다. 그러나 월레스의 영웅적인 활약에도 불구하고 1298년 다시금 스코틀랜드를 침공한 잉글랜드 군은 폴커크(Falkirk) 전투에서 월레스를 무찌르는데 성공합니다. 이번에는 자신들의 안일만을 위해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월레스를 지원하지 않은 것이 뼈아픈 패배의 원인이었습니다.
월레스는 폴커크에서 패한 뒤 저항을 계속하다가 1305년 마침내 싸움에 지고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는 쉴새없이 가해지는 모진 고문 속에서도 자비를 구하지 않고 대신 자유를 원합니다. 끝내 그는 조국 스코틀랜드의 "자유(freedom)"를 소리 높이 외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그의 감동적이고 또한 장렬한 죽음은 1314년 배녹번(Bannockburn)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어내고 마침내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로부터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게 됩니다.
자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자유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하는 것을 깊은 감동과 함께 전해 준 영화로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찾아야 할 것이 자유요 또한 지켜야 할 것이 자유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 우리는 과연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습니까? 물론 오늘 우리가 말하고 있는 자유란 월레스나 스코틀랜드 민중들이 꿈꾸었던 자유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참 자유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또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갈 5:1 참조) 그 어떤 비싼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때문에 오늘 우리는 매우 역설적인 자유를 누리며 산 한 사람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참 자유하는 삶의 비결을 배우려고 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체험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못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표현이 바로 셋째 하늘입니다. 당시 그들에게 있어서 셋째 하늘은 바로 하나님께서 계신 천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비하고 놀라운 체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참으로 자랑스러운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후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시를 육체에 받아 줄곧 고통을 안고 지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로서도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극심한 고통을 안고 지내며 어떻게 도리어 크게 기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육체에 가시를 주신 하나님의 깊은 뜻을 마침내 그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도리어 크게 기뻐했던 것입니다.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했습니다. 어찌 보면 매우 역설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오늘 우리는 그에게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참 자유인의 삶의 모습을 말씀을 통해서 배우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첫째, 사도 바울은 자신이 깨닫게 된 약한 것들 외에는 결코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참으로 자랑할 것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또한 회심 후 자신이 이룬 성과에 대해서 자랑할 수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 누가 사도 바울보다 더 많은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에 대한 자랑이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돌려야 마땅한 영광을 가로채는 잘못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겸손한 태도는 자신의 약한 것들만 자랑하겠다는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인간적인 자랑들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보다는 오직 자신의 약한 것들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다는 사실을 그는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때문에 그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참 자유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가시가 자신에게 오히려 은혜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는 낙원으로 이끌려 간 신비하고 놀라운 체험 후에 얻게 된 가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그 가시를 놓고 기도하던 중에 그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 가시를 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치시는 그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가 받으셨던 고난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시로 인한 고통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벗어나려고 애썼던 그 가시가 오히려 자신을 겸손한 그리스도의 사도로 만들기 위해 주시는 사랑의 가시요 은혜의 가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육체의 고통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참 자유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약할 그 때가 오히려 그리스도로 인해 참으로 강할 때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는 그 가시로 인해 구했던 간절한 기도에 대한 응답을 통해 자신의 약함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은혜의 방편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은혜에 완전히 사로잡힌 삶을 살게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약한 것들 안에 있었습니다. 능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궁핍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곤고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와 같은 모든 약한 것들을 기뻐하며 살았습니다. 왜냐 하면 자신의 약한 그 때에 하나님의 강함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자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보다 더 확신에 찬 자유의 선언은 없을 것입니다. 그가 뭐라고 외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니라.”(고후 12:10)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그와 같은 역설적인 자유를 누리는 삶이 그 때에만 가능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얼마든지 참 자유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 자신을 솔직하게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혹시 우리 자신의 약한 것들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 그 때문에 누군가를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결과 우리의 약한 것들을 통해서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행하시는 주님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려분! 오늘 우리도 자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 자유를 오늘 우리도 마음껏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헛된 것들을 자랑하려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육체에 가시를 주셨으면 그것도 또한 우리를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는 주님의 뜻으로 알고 오히려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침내 우리가 약할 그 때에 강하고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오히려 그 주님을 기뻐하며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그 놀라운 주님의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그 주님의 부활을 널리 전하고 증거하는 참으로 충성스러운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강석공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