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막 9:38~50)
본문
시작하는 말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성공적인 삶의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이 뿌려 지는 곳에 좋은 결과가 일어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곳에 “화목 하는 일”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계속 야기시키는 문제의 인물은 어디 가더라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화목하게 하는 자는 어디를 가더라도 환영을 받으며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화목은 평화와 같은 말입니다.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면 자녀들이 불안합니다. 정치가 화목하지 못하면 국민이 불안합니다. 세계가 평화롭지 못하면 온 세상이 불안해합니다. 교회가 화목하지 못하면 교인들이 불안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도 세상을 화목하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샬롬”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에이레네”(평화, 화목)를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막9:5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 자신들안에 소금의 성분을 간직하고 서로 화목 하라”는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1. 신앙의 본질을 지니고 화목해야 합니다.
소금은 녹을 수는 있지만 상하지는 않습니다. 소금기운이 약할 수는 있지만 절대 부패되지는 않습니다. 그냥 홀로 있을 수는 있지만 상하여 벌레나, 구더기가 쓸지는 않습니다. 소금은 소금의 독특한 성분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마5: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주님의 선언입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의 소금으로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인류의 소금으로 오셨다면 우리는 이 지역사회의 소금으로 보내진 것입니다.
창세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롯의 가족들을 소돔과 고모라에 거주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패역한 그 사회를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롯의 처는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소금기둥이 된 롯의 처는 그리스도인들의 교육자료 및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원리적으로는 소금이 변질될 수 없지만 현실적으로는 변질된 소금 같은 자들이 많습니다. 소금덩어리 같은 자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습니다. 변질된 소금 기둥 같은 자들이 여기저기 버티고 서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옛말에 “소금도 곰팡이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변질 될 수 없지만 기독교는 변질되어 본질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신학적으로 변질될 수 있고 , 교리적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교파적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성경이 무용지물로 버림을 받고, 총회의 헌법과 예배모범이 힘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장로교나, 감리교나, 성결교의 특징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특징 있는 교단의 교리가 사라지고, 지금은 한국교회가 “두루뭉수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본질을 잘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세상의 소금이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소금이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생활신조를 뚜렷이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이웃에서 소금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근본적인 본질을 유지하면서 화목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마태복음10:34-39절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하고 지켜 나갈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2. 스스로 개선해 가면서 화목해야 합니다.
만일에 땅에 소금이 없다면 식물들이 생명을 유지할 수도, 자라날 수도 없습니다. 토지는 0.0 몇 %정도의 미량의 염분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동식물은 0.0 몇 %정도의 염분을 섭취하여 자라나고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분재가 죽는 이유 중의 하나는 염분 부족인 경우가 있습니다. 염분을 적당하게 섞어 주면 잘 자랍니다. 염분 대신에 멸치대가리 같은 것을 묻어주면 싱싱하게 자랍니다. 특히 해송이나, 동백나무 같은 것은 염분이 부족하면 이내 죽어버리고 맙니다. 소금은 성장, 치료, 유지, 지탱의 역할을 합니다.
열왕기하2:18-22절에
"➀엘리사가 여리고에 머무는 중에 무리가 저에게 돌아오니 엘리사가 저희에게 이르되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더라 ➁그 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➂엘리사가 가로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➃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➄그 물이 엘리사의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날에 이르렀더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사는 여리고의 오염된 병든 물을 소금을 뿌려 치료했습니다. 그 결과 물이 고침을 받아 토산물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소금이 뿌려진 곳에 개선의 역사, 나아짐의 역사, 치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는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이 날마다 개선이 되어야 합니다. 영육 간에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생활의 열매를, 신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옛말에 “소금 먹은 소 굴 우물 들여다보듯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소금 먹은 소가 물을 마시기는 마셔야 하는데 굴에는 들어갈 수 없고, 굴 밖에서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은 반드시 스스로 개선되고, 치료받고,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마태복음7:3-5절에서
❶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❷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❸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관리를 게을리 하고,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들추어낸다거나, 비판하게 되면 결국은 화목이 깨어지게 되고, 불화와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말에 “서투른 백정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관리 없이 남을 관리하려다 실수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못된 소금 사람 잡는다.”는 의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못된 소금은 상처 난데 뿌려 지는 소금입니다. 상처 난데 소금 뿌리면 불화와 싸움과 전쟁만 일어 날 뿐입니다.
어릴 때 교회의 장로님이 다른 이들보다 조금 앞서 나가셨습니다. 어디서 새끼 돼지를 거세하면 잘 자란다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마취도 시키지 않고 돼지를 거세를 하고 소금을 한 줌 넣고 작업을 끝내셨습니다. 거세된 새끼 돼지가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1-2)고 말씀하셨습니다.
3. 독특한 맛을 지니고 화목해야 해야 합니다.
소금은 조미료 역할을 합니다. 소금은 음식과 입맛과의 중간 역할을 합니다. 소금이 음식의 맛을 내는 동시에 사람의 입맛을 돋웁니다. 음식을 맛있게 먹게 하므로 사람의 건강을 유지하게 합니다.
특히 맛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해 특별히 제조된 소금입니다. 만일 맛소금이 맛을 잃고 맛을 내지 못한다면 맛소금은 이미 맛소금이 아닙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맛을 내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 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눅14:34-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맛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맛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 독특한 맛을 지니고 있어야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그래야 세상을 살맛나는 세상으로, 화목한 세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걱정입니다. 기독교의 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교단의 독특한 맛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맛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교역자들의 원래의 맛을 찾지 않고는 앞으로의 교회를 이끌어가지 못합니다. 장로들의 원래의 맛을 찾지 못하면 기울어지는 교회를 붙잡을 수 없습니다. 권사들의 원래의 맛을 회복하지 않으면 교회에 보탬이 못됩니다.
각자의 진정한 맛을 지니고 있을 때에 진정한 화해, 즐거운 화목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맛을 지니고 있을 때에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옆 사람을 살맛나게 할 수 있습니다.
4.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화목해야 합니다.
겨울에 눈이 왔을 때 소금을 뿌리면 눈이 녹아 길이 터입니다. 길이 얼어 미끄러울 때 소금을 뿌리면 얼음이 녹아 길이 미끄럽지 않습니다.
소금이 녹을 때에 언 것도 녹일 수 있습니다. 소금이 녹지 않으면 절대 언 것을 녹일 수 없습니다. 내 자신이 녹지 않고는 절대 다른 이들을 녹일 수 녹일 수 없습니다.
시편147:13-18절에
❶저가 네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너의 가운데 자녀에게 복을 주셨으며 ❷네 경내를 평안케 하시고 아름다운 밀로 너를 배불리시며 ❸그 명을 땅에 보내시니 그 말씀이 속히 달리는 도다
❹눈을 양털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같이 흩으시며 ❺우박을 떡 부스러기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 추위를 감당하리요 ❻그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 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녹이고, 이웃을 녹이는 데는 다른 방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녹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녹이고, 가족들을 녹이고, 이웃을 녹입니다.
대결국면, 긴장국면은 화목을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소금이 뿌려지는 곳에 해빙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개입되는 곳에 해빙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5. 불쏘시개가 되어 화목해야 합니다.
불을 지피는 데는 불쏘시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냥불 가지고 장작을 태울 수 없습니다. 불쏘시개가 있어야 장작에 불을 붙입니다.
꺼져가는 연탄불이나, 숯불에 소금을 뿌리면 불꽃이 활활 타올라 꺼져 가는 불씨를 살려 줍니다. 생나무를 태울 때 소금을 뿌리면 생나무에 불이 붙어 타오릅니다. 불씨를 살리는 데는 희생이 따릅니다. 희생 없이 꺼져가는 불씨를 살릴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으로서 자기들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성령의 불이 타오르게 했습니다. 성령불쏘시개 역할을 했습니다. 자기의 몸을 태우면서 불쏘시개 노릇을 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이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남의 상처 난 가슴에 염장 지를 것이 아닙니다. 남의 영혼에 성령의 불을 지필 수 있어야 합니다. 끝내는 화목해 질 수 있습니다.
6. 약속을 지켜가면서 화목해야 합니다.
옛말에 “소금이 쉴 때까지 해보자”는 말이 있습니다. 끝까지 해보겠다는 말입니다. “소금이 쉬겠느냐?”는 말도 있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레위기 2:13절에 “네 모든 소제 물에 소금을 치라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고 말했습니다. 소금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약속한 것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엉뚱한 짓을 하면서 화목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자가당착이요, 자기모순입니다.
끝맺는 말
소금이 들어가는 곳에는 좋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런 소금을 두고 이웃과 화목 하는 성도들은 인간관계를 잘 맺어서 일상생활에서 성공하고 승리합니다. 기독교인들의 성공의 열쇠는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는 생활을 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19절에서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서 3:9절에서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