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치지 않는 고통을 가진 자 (롬 9:1- 5)
본문
제목 - 그치지 않는 고통을 가진 자
본문 - 로마서 9: 1- 5
어떤 사람이 예수를 만난 이후, 너무나 큰 기쁨과 감격에 넘쳐 그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나누었을 때,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증거에 마음이 감동하여 주님을 영접하는 전도의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많은 이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열매를 얻게 되었고, 전도의 사명을 가진 그는 후에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어서 평생을 주님을 위하여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다른 아픔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을 거절하고 오히려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녀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부모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부하는 부모를 둔 그 사람의 고통과 근심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도 주님을 만난 기쁨과 감격이 넘치지만, 혹 부모님이나 배우자들이 맏음의 동역자가 되지못함으로 인한 고통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에게 주의 위로하심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심령에 근심과 고통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영적으로 아직 건강하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 주변의 사랑하는 이들이 아직까지 주님을 영접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근심과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면 오히려 내 심령이 무디어 마치 감각없는 환자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한 근심과 고통을 가지고 있다면 저는 그것을 거룩한 근심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바울는 자신에게 그치지 않는 고통과 근심이 있었노라고 본문 1절과 2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근심과 고통이 어디서부터 왔는가하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에게서 왔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4절에서는 좀 더 근본적으로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주님을 영접하지 못한 골육친척들, 곧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들입니다.
4절에서 5절 초반까지 말씀을 보면 그들은 다른 민족보다 7가지 특별한 은혜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양자됨의 축복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첫 번째 복은 곧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출애굽기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모세를 보내면서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하시면서 큰 자부심을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장자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삼으셨다고 하는 것을 이방인의 상징적인 대표인 바로에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곧 세상사람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 줄 믿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셨다"는 말씀처럼,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장자임을 온 세상에 자랑스럽게 선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두 번째 복은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세 번째 받은 복은 언약입니다. 하나님께로 부터 언약의 출발을 시작한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복의 근원을 삼겠고 너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는 엄청난 약속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이 세가지 점진적이고도 확실한 언약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에게 복이 되어지는 그런 축복된 민족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언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와 다윗 등을 통하여 끊임없이 이어져 나갔습니다. 이 약속을 이루는 일에는 아무래도 믿음의 조상이요, 언약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아브라함 부부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은 100세가 가까워 오지만 자녀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 시대만 해도 그들의 삶의 공동체는 부족공동체였습니다. 족장이었으나 불행하게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대가 끊어지게 생겼습니다. 그러던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너희에게 아들을 주리라...." 그리고 그 아들은 단순하게 너의 집을 이어가는 후손이 아니라 민족이 될 것인데 마치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가 아멘했어요. 그러나 아멘하고 가만 생각해 보니까 주님께서 우리 가정에 자녀를 주시겠다는 언약을 생각하면 기쁘고 즐거운데, 좀 더 구체적으로 인간적으로 손을 꼽아보면 이 약속이 좀 문제가 있어요. 아들을 낳아야 되는 사라를 쳐다보면 너무 늙어 희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아닌데......."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하셨고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와의 약속이라 아멘은 했는데 현실을 쳐다보면 그건 아닌 거 같고.... 그래서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는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눈에 띈 것이 자기 가정 주변에서 늘 일을 돕는 하갈이라고 하는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그리고 부부는 이내 마음이 통하여 결론을 내었습니다. 젊은 여성이라야 아이를 낳지....그리고 하갈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 들였습니다. 지금 우리의 정서로는 아브라함이 무슨 둘째 부인을 얻느냐며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능력 있는 남자들은 부인을 둘, 셋씩 두는 것을 당연시 하고 있었습니다. 길고 이일에 오히려 아내 사라가 더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고 나니까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짓고 의기양양합니다. 이렇게 쉬운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가 왜 힘들게 고민했지...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이 태어난 후 13년이 지나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통해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축복이면 그것은 평화요, 평안이요, 은혜요, 기쁨이어야 되는데 오히려 이스마엘로 인해 끊임없는 분쟁이 생기고 시기와 다툼으로 인하여 평안은 다 깨져 버렸어요.
이스마엘이 진정 하나님의 방법으로 얻은 것인가? 아브라함과 사라는 너무나 인간적인 방법으로 얻은 열매로 인하여 크게 고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을 13년이 지난후에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아,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는 씨로 여김을 받는데, 혈통이 아닌 약속으로 난 자라야 네 후손이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약속의 자녀가 아닌 이스마엘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깨서는 근본적인 문제부터 다시 출발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얻었던 문제를 근본적으로 자기 손으로 해결해야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할 때에는 그런 아픔의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감정에 치우쳐서 결단하지 못했다면 결코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네 번째는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셨고, 수 없는 많은 말씀들을 주의 종들을 통해서 주셨습니다. 말씀을 받는다고 하는 것보다 더 귀한 복이 없습니다. 다섯 번째는 예배입니다. 광야의 백성들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고, 열두지파가 동서남북으로 세지파씩 성막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성막 위에는 야웨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막에서 제사를 드렸고 예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성막에 나아간다는 것은 그들이 항상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는 의미가 있어요. 그 성막이 예루살렘 성전이 되었고, 바벨론 포로 시기에는 그들의 삶의 자리에 시나고규라는 회당이 있었고, 해방되어 돌아왔을 때에는 모든 마을마다 회당이 자리했고,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는 교회가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아래 세워진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까지 우리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예배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그 예배자의 자세라고 하는게 있잖아요. 외형적인 자세도 준비되어져야 하지만 내면적인 중심도 준비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기에 그것은 자녀로서의 큰 특권인 줄 믿습니다.
예배만큼 큰 복도 없어요. 그러나 때대로 이 축복을 스스로 포기하는 어리석인 인생들이 있습니다.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까지 볼링선교회가 홍천 대명콘도에서 수련회가 있었는데, 거기에 이런 현수막이 붙어있어요. "주일예배 드립니다..." 무슨 이야기예요? 주일을 빼먹고 놀러온 교인들을 위하여 예배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집사, 권사들이 주일날 콘도에 가서 놀일이 뭐가 있어요? 주일날 스키를 타고, 주일날 물놀이 할 이유가 뭐가 있느냐 말입니다.
그러나 가끔씩은 그런 분들도 있습니다. 연약한 분들이지요. 혹은 믿지 않는 남편이나 가족들로 인하여 집사인 아내가 눈물 머금고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지요. 그런 경우는 우리 주님이 용서하시겠지요?
여섯 번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복은 약속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 약속 중에 최고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곧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복은 조상들을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요셉, 등 수많은 조상들을 주셨습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수많은 조상들이지요. 여러분 가정은 믿음의 조상들이 얼마나 되는지요. 우리 나라는 1885년에 기독교가 들어왔기에 길어야 5대, 보통 집안은 3대 정도면 신앙의 가문으로 최고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스스로 1대째인 가정도 있을 거예요. 만약 1대째면 신앙생활에 애로사항이 많아요. 가족이 안 믿는 사람으로 인하여, 부모가 안 믿기에 제사 때만 되면 참 피곤하지요? 그렇다고 해서 나는 예수 믿으니까 제사 안 지내요 라고 말하면서 도망가서는 않됩니다. 저는 그렇게 권면하고 싶습니다. 좀더 적극적으로 찾아가서 미리 준비할 돈 다 드리라고 말입니다. 예를들어 형제가 셋이면 경비 100만원을 삼등분하여 33만원씩 내야하지만 여러분이 40만원 내시면 분위기가 훨씬 더 좋아질것입니다. 주일날 결혼식있으면 토요일에 미리가서 축하하고 축의금 전하면 아무도 싫다는 사람 없겠지요. 문제는 인색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려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7가지 복된 은혜를 입은 이스라엘이지만 정작 그들은 다윗의 후손으로 그리스도 메시아가 오셨을 때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고통이 여기에 있습니다. 정작 나는 다른 이방인들을 위해 말씀을 증거하면 구름떼와 같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는데, 정작 내 혈육, 내 친척,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찌하여 예수를 거부하고, 그리스도라 영접하지 않는 것인가!
이것이 내게 그치지 않는 근심이요,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다른 사람을 전도하면 전도가 잘 되어서 일년에 몇 명씩 열매가 있는데, 오히려 내 가족, 내 부모, 내 친척들에게 전도 할때는 열매가 없어 마음의 근심과 고통을 가진 분들도 많을실줄로 압니다만 그러나 소망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바울사도가 가졌던 근심과 고통을 주님께서 아시고 위로하신 것 처럼, 우리에게도 함께 하실줄 믿습니다. 바울은 어디를 가나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둘째는 헬라인에게라며 제일 먼저 자기 동족에게 전도하는 열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영접하기 보다 비방하며 오히려 핍박하기 일 수 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이 가진 고통과 근심은 말할 수 없이 컸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동족 구원의 열정을 이어간줄로 믿습니다. 저는 이 바울이 가졌던 고통과 근심을 거룩한 근심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바울이 가졌던 민족을 향한 이 거룩한 근심,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가지고 이것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마침내 그들의 마음의 강팍함이 깨지고 심령이 열려서 주님을 영접하는 그 시간까지 우리가 소망을 잃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에게도 바울의 고통과 근심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또한 바울의 심정을 다시 한 번 알게 되니 감사합니다. 낙심치 아니하고, 좌절하지 아니하고,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