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을 위한 희망
본문
I. 서 론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자기집에 안쓰고 있는 쓸만한 물건들을 자기집 마당에 내어놓고 싸게 파는 일이 있다. 그것을 yard sale이라고 한다.
한번은 악마가 자기집 마당에 자기가 쓰던 물건들을 내어놓고 야드 쎄일을 하고 있었다. 각제품에는 각각 다른 가격이 매겨져있었다. 그런데 그 마당 한곳에는 악마 같은 물건들이 진열되어있었다. 거기에는 미움, 질투, 속임, 거짓말, 교만과 같은 것들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가격들은 매우 비쌌다. 그런데 그곳에 하도 많이 써서 눈에 띄게 낡은 물건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가격이 가장 비쌌다. 그 연장에는 “절망”이라고 써붙여 있었다. “왜 그 연장이 그렇게 비싸냐?”고 묻자 악마는 “내가 여기에 있는 모든 다른 연장으로 내 목표물을 쓰러뜨리려고 해도 쓰러뜨릴 수 없을 때 이 연장을 사용하면 백발백중 쓰러졌다. 그래서 나는 그 연장을 가장 애용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연장이 내 것이라는 것을 잘 몰랐다. 그래서 더욱더 사용하기 용이했다.” 사단은 사람들이 절망하게 되는 것보다 더 행복했던 적은 없다. 사단은 사람들이 절망하는 것을 볼 때 가장 행복해 한다.
사단은 사람을 파멸시키기를 원하며 그 일을 위하여 주로 절망을 상용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절망은 사단이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살다가 보면 우리는 절망적인 일을 만날 때가 많이 있읍니다.
도저히 피할 길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으로 둘러싸일 때가 있읍니다.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로 둘러싸일 때가 있읍니다.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게됩니다. 절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을 당할 때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말해줍니다.
성공했던 자들은 절망적인 상황을 안만났던 자들이 아니라, 완전히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졌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한다”(고후4:8)고 말씀했읍니다.
사도 바울 같은 자는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으로 둘러싸여도 절망하지 않던 자입니다.
실패했던 자들은 특별히 절망적인 상황을 많이 만났던 자들이 아니라, 조금만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도 쉽게 모든 것을 포기하던 자들입니다.
그러면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 -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지 않을 수는 없읍니다.
그러나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도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절망은 사단이 우리를 파멸시키려고 사용하는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절망적인 상황을 만났을 때 어떻게 그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요 ?
오늘은 절망적인 상황을 만날 때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가를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II. 본 론
1. 절망의 원인
절망을 극복하려면 먼저 절망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루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임하셔서는 그를 데리고 한 골짜기로 가서 그를 골짜기 한 가운데 두셨읍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보니 거기에는 뼈가 가득했읍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데리고 그 뼈들을 자세히 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 뼈가 가득한 골짜기를 사방으로 데리고 다니셨읍니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가 그 뼈들을 보니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준 이 뼈들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
(v. 11)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뼈들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있었읍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서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읍니다.
바벨론은 포로로 잡혀온 자들을 한곳에 모아두면 그들이 반란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을 사방에 흩어버렸읍니다.
그래서 그들을 디아스포라라고 합니다.
②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었읍니다.
이들에게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아무런 희망이 없었읍니다.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켜 세울 아무런 희망이 없었읍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가 절망해 있었읍니다.
그들의 절망해 있는 모습을 에스겔 골짜기에 있는 아주 바싹 마른 뼈로 묘사를 했던 것입니다.
오늘 주님 앞에 나온 성도님들 중에도 이 에스겔 골짜기의 아주 바싹 마른 뼈들과 같이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을 만났던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앞으로 살아가면서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을 만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절망적인 상황을 만난다고 모두가 절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도 절망하지 않는 자들도 있읍니다.
어떤 사람이 어린이들이 야구시합을 하는데 갔읍니다.
그는 덕아웃에 앉아 있는 소년에게 지금 점수가 몇대몇이냐고 물었읍니다.
그러자 그 소년은 “18대0이요, 우리가 지고 있어요”라고 대답을 했읍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 소년에게 “너희들 낙심되겠구나”라고 말을 했읍니다.
그러자 그 소년이 이런 대답을 했읍니다.
“우린 아직 타석에 들어서보지도 않았는데 왜 우리가 실망을 합니까 ?”
그 소년은 1회초에 18대0이 되었는데도, 아직 자기들은 한번도 타석에 들어서지 않았기 때문에 포기하지도 실망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도 절망하지 않는 자들이 있읍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절망하게 되는 것일까요 ?
왜 사람들이 악마가 쓰러뜨리려고 하는 절망의 도구에 걸려들어서 파멸의 길을 가는 것일까요 ?
우리의 상황이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걸까요 ?
똑같은 상황에서도 절망하는 자들이 있고, 절망하지 않는 자들이 있는 것을 볼 때 외부의 상황이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왜 절망하게 되는 것일까요 ?
그것은 우리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절망하는 것은 상황이 절망스러워서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 절망적인 상황에 있던 이방인들의 모습을 사도 바울은 (엡2:12)에서 이렇게 표현을 했읍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던 자이더니”
그리스도 밖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세상에서 소망이 없었읍니다.
즉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절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절망하는 모습을 무신론자인,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싸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이렇게 썼다.
“사람은 자기 자신 외에는 의지할 자가 없다. 사람은 혼자이고, 아무런 도움도 없이, 자기 스스로 세우는 목표 외에는 다른 목표가 없이, 그 스스로 이세상에서 만들어가는 운명 외에는 다른 운명이 없이, 무한한 책임들 한가운데 이세상에서 버려졌다.”
즉 인간은 이세상에 고아와 같이 버려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싸르트르는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절망할 수 밖에 없었읍니다.
사람들이 절망하는 것은 이렇게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힘들고 절망적이라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절망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만이 절망적인 상황의 해답이시다.
그러면 과연 절망적인 상황에도 살 길이 있을까요 ?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읍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아주 마른 뼈들을 보여주신 후에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고 물으셨읍니다.
이것은 절망적인 상황에 살길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에스겔은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을 했읍니다.
이것은 자기는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뜻은 인간의 관점에 보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절망적인 상황에는 살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어찌 절망적인 상황에서 살길이 있겠읍니까 ?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바싹 마른 뼈들이 어찌 살 수 있겠읍니까 ?
그런데 에스겔은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을 했읍니다.
이것은 죽은 뼈들이 다시 살 수 있는지 없는지를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은 그 마른 뼈들이 다시 사는 길을 아신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에게는 절망적이나 하나님에게는 살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인간에는 살 길이 없읍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살 길이 있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19:26)에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읍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러면 어떻게 부자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읍니다.
어떻게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갈 수 있겠읍니까 ?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다고 하셨읍니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읍니다.
① 그래서 박효진 장로님은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는 책을 쓰셨읍니다.
박효진 장로님은 교도소에서 그렇게 흉악한 사형수들도 예수 믿고 구원얻는 것을 보고는 하나님에게는 고침을 받지 못하는 자들이 없다고 했읍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자 전혀 불가능한 자들도 구원을 받았읍니다.
그일을 통하여 박효진 장로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께는 희망이 있음을 발견했읍니다.
② “기도에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All things are possible through prayer)을 쓴 챨스 리빙스톤 알렌(Charles L. Allen)은 “네가 어떤 상황이나 어떤 사람이 절망적이다고 말할 때는 너는 하나님 앞에서 문을 꽝닫는 것이다”고 말을 했읍니다.
즉 하나님에게는 절망적인 것이 없는데 사람이 절망적이라고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이세상에 절망적인 상황은 없읍니다.
다만 어떤 상황을 보고 절망하는 사람만이 있을뿐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는 자에게는 절대 절망이 없읍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라”(시42:11)고 노래를 했읍니다.
하나님을 바라는 자에게는 절망이 없읍니다.
하나님에게는 절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Baily Smith가 이런 말을 했다.
“절망적인적이 있느냐 ? 대답은 간단하다. 너의 상황을 바라보던 것을 중단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다. 염세주의자는 모든 기회에서 문제를 발견한다. 그러나 낙관주의자는 모든 문제에서 기회를 발견한다. 절망하지 말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대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는 절망이 없읍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도 하나님에게는 희망이 됩니다.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면 하나님을 바라시기 바랍니다.
작년 변화산 기도회를 마치고 우리교회 한 교인이 여월동 개발지에 개발권을 하나 샀읍니다.
그런데 27명이 한 구역을 추첨을 해야하는데, 우리 교인은 27번째로 등록을 했읍니다.
그러므로 추첨에는 아주 불리합니다.
왜냐하면 땅을 선택하는 순번을 추첨하는데, 등록한 순서로 하기 때문에 우리 교인은 27번째로 추첨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좋은 땅을 선택할 기회가 없읍니다.
27개의 제비를 27번째로 추첨을 하여 1번을 선택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교인 내외분은 이번 제5회 변화산 기도회에 열심히 기도를 했읍니다.
그리고 제가 기도회를 마치고 경상도 청도에 가서 쉬고 있는데 전화가 왔읍니다.
27번재로 추첨을 했는데, 26번째 사람들까지 다 1번을 추첨을 하지않고 1번을 남겨두어서 우리교인이 그 1번을 차지하여 여월동에 전철역에서 가장 좋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에게는 가능한줄 믿읍니다.
절망하지 말고 절망적인 여러분 자신과 상황에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살길이 열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절망적인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실까요 ?
우리가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려면 무엇부터 시작을 해야할까요 ?
그러면 이렇게 절망적인 뼈들에게 언제부터 사는 역사가 시작이 되었읍니까 ?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 뼈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부터입니다.
아주 마른 뼈들이 다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에스겔은 믿어지지가 않았읍니다.
또한 어떻게 그 뼈들을 살려야할지도 몰랐읍니다.
아주 마른 뼈들을 어떻게 살리기를 시작한단 말입니까 ?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불가능해 보였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마른 뼈들에게 대언을 하라고 하셨읍니다.
아주 마른 뼈들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 같이 보였읍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대언을 하였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마른 뼈들이 그 말씀을 들을 때 사는 역사가 일어났읍니다.
소리가 나기 시작을 하고, 움직이기 시작을 하고, 이 뼈 저 뼈들이 서로 연락을 하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가죽이 덮였읍니다.
이것은 아주 마른 뼈들이 사는 길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대언하고 들을 때 사는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을 했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4:12)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 되어 있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읍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런 능력이 있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역사가 시작을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상황이라도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의 기분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기분이 나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기분이 나빠도 들어야 합니다.
아니 기분이 나쁠 때 더욱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우리가 듣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문제를 치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거든 더욱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거든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의 영이 새 삶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들으면 다 되는 건가요 ?
하나님의 말씀만 들으면 절망을 이길 수 있는 건인가 ?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된 에스겔 골짜기의 뼈들에게는 아직 뭔가 부족한 것이 있었읍니다.
우리나라 음료수 선전 중에 2%가 부족하다는 말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된 에스겔 골짜기의 뼈들에게는 뭔가 2% 부족한 것이 있었읍니다.
그것은 생명이 없는 것이였읍니다.
2%는 얼마되지 않는 것이나 그러나 그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없는데,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읍니까 ?
그러므로 그 부족한 2%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자에게 희망을 주는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
이렇게 에스겔 선지자가 답답해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씀하셨읍니다.(v. 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대언을 하였읍니다.
그러자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갔읍니다.
그러자 그들이 살아났읍니다.
그러자 그들이 극히 큰 군대가 되었읍니다.
이 생기가 바로 성령님을 말씀합니다.
성령님이 임할 때 비로소 생기가 돌아왔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에는 이렇게 성령님의 역사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있으나 생기가 없으면 2%가 부족한 것입니다.
이것을 A. W. Tozer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을 했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빛이라고 합니다.(시119:105)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빛은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보게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빛이 왔다고 다 보는 것은 아닙니다.
소경은 빛이 와도 보지를 못합니다.
이렿게 말씀의 빛이 우리에게 찾아왔을 때 우리의 눈을 열어 보게하는 것이 바로 성령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오셔야 합니다.
말씀만 듣고 성령님이 오시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읍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은 빛으로 이 땅에 오셨읍니다.
그러나 말씀만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은 빛이 왔음에도 보지는 못하였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읍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비취는 말씀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보게 하는 성령님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오셔야만 진정으로 절망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읍니다.
성령님이 오셔야 진정으로 절망을 극복할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과 함께 성령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말씀을 무시하고 안들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듣지 않으면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 받기 전에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성령충만 받기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절망적인 상황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능히 이기고 승리할 줄 믿읍니다.
(이한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