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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사랑 (엡 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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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사랑 (엡 4:30)

지난 한 주간 온 나라를 감동과 환희로 몰아갔던 축구의 열기가 이제 한풀 꺾였습니다. 우리 선수들 최선을 다했지만, 아쉽게도 16강의 문턱을 넘지 못한 것입니다. 2002년도의 꿈을 재현하기 위해 선수도 잘했고, 국민도 열심히 응원했지만 지금은 여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임을 깨달았고, 이제 모두 일상생활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신문과 방송이 온통 월드컵으로 도배를 해서 자칫 중요한 것을 잊지는 않나 걱정했는데, 하나님께서 열기를 가라앉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우리가 나라의 국민으로서, 특히 이 시대를 크리스천으로서 중요한 것을 생각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6월 25일, 이 땅에 전쟁이 발발한지 꼭 56년이 되는 날입니다. 어찌 우리가 그 날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점점 전쟁이 잊혀지고 있습니다. 지난 과거 우리 나라가 어떤 나라였고, 이만큼 잘 살게 된 것이 잊혀지고 있습니다. 점점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중심이 되어 가는 시대에 우리 민족이 겪었던 전쟁의 고통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이제 짚어야 할 시점입니다. 어떻게 잘 살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특히, 월드컵 때문에 시선에서 멀어진 북한 미사일 발사 문제도 예사롭지 않은 일로 보아야 합니다.

지난 2002년에도 지금처럼 월드컵의 열기가 절정에 달할 때 서해교전의 사건이 생겼습니다. 서해교전은 월드컵 폐막을 하루 앞둔 2002년 6월 29일 서해 연평도 근해에서 북방 한계선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의 기습 공격으로 해군 6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한 사건입니다. 유족들은 지난 세월 목놓아 통곡조차 하기 힘든 분위기 속에서 지내왔습니다. 그리고 국민들도 월드컵 때문에 초점이 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남편 한상국 중사를 잃은 김종선씨가 고국을 등지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김씨는 트랩에 오르기 전 “나라를 지키려다 전사(戰死)하고 부상한 군인들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가 계속된다면, 과연 어느 병사가 전쟁터에서 목숨을 던지겠는가”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처럼 나라를 생각하는 것들로 지나가는 때에 우리 믿는 자에게도 정신을 차리게 하는 사건이 하나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강림절입니다. 교회력에서 성령강림절은 부활절이나 성탄절과 같이 지켜지는 절기는 아니지만,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절기입니다.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약속하신 성령이 최초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에게 임한 성령으로 사도행전의 위대한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그 성령이 이 땅에, 우리 교회에, 내 심령에 오신 것을 묵상하며 의미를 찾는 절기가 바로 성령강림절입니다. 이제 우리도 열기를 가라앉히고 오늘 6월의 마지막주일에 이것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에 성령의 역사만큼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생각하면서도 역시 사랑이 떠오릅니다. 가정도, 나라도 사랑이고, 주님도 사랑이듯이, 성령도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우리 속에 오시는 성령을 사랑하는 것이 믿는 자의 삶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성령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그것을 대표적으로 알려줍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성령을 근심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내 속에서 떠나지 않으시는 성령을 근심하거나, 탄식하지 않게 하는 것이 곧 성령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언제, 혹은 어느 때 근심하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가 더 성령을 깊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령행전이라 불리는 사도행전에서 그것을 몇 가지로 발견합니다.

우선, 내가 죄를 지을 때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끔찍한 사건이 나옵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소위 아나니아와 삽비라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실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두 사람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성령을 속이려다가 비참하게 죽은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당시 성도에게,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커다란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성령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이요, 성령을 속이는 것이 무서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죄로 인해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은 탄식하시고 근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사랑한다는 것은 성령을 속이지 않는 것이요, 날마다 순간마다 나를 괴롭게 하고, 더럽게 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모든 죄를 극복하며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믿는 자라도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결국 지금 내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믿지 않을 때도 물론 많은 죄를 지었지만, 믿은 후에도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어쩌면 더 많은 죄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전에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던 죄가 조금 밝은 곳으로 나와보니 더 많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의 더러운 구석을 보면서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이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 사도바울은 예수를 믿고 더욱 뚜렷이 보이고, 알게 된 죄 때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죄를 짓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가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가서야 죄의 짐을 벗을 것입니다. 거기에 가기까지 우리는 죄 가운데 살아야 하는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믿을 때와 믿지 않을 때의 죄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죄가 점점 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죄가 줄어드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으려면 반복하는 죄를 조심해야 합니다. 누구라도 한번, 두 번은 실수하고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성령을 크게 근심시키는 일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혹 죄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반복하여 죄를 짓지는 않습니까? 이젠 혹 더 무뎌지고, 감각도 없고, 많아지지는 않습니까? 이것을 성령이 가장 아파하십니다. 죄를 회개하시고, 특히 반복되는 죄를 이제 몸부림치며 극복하면서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성령이 주도하지 못할 때입니다.

내 안에 들어오신 성령이 내 속에서 나를 주도하는 것과, 여전히 내가 나를 주도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들어오신 성령이신데, 이젠 내 의지로 성령께 모든 것을 맡겨 나의 삶을 성령이 주도하고, 이끌고, 성령이 지배하는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성령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주도할 때와 내가 주도할 때의 결과가 다릅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달라진 모습을 통해 발견합니다. 자기가 삶을 주도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는 교만했고 실패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했습니다. 그는 남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거칠고 사납고 정말 무식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후, 그러니까 성령이 주도한 이후에는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그는 교만하거나 떠벌리지 않습니다. 그는 실수하지 않습니다. 그는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조심하고 또 조심합니다. 그렇게 거칠고 사나운 사람이 온유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무식했던 사람이 영적으로 탁월한 지혜의 사람이 됩니다. 자기를 잘 조절하는 절제의 사람이 됩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차이를 갖게 했습니까? 전에는 자기가 주도했던 결과이고, 이제는 성령이 주도한 것의 결과입니다. 자기가 주도했을 때는 엉망진창이요, 허랑 방탕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주도하니까 내적 평안이요, 외적성숙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의 삶을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를 믿는 순간, 나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입니다. 지금 내가 사는 것은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단은 내 곁에서 나를 방해하고, 고소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넘어트리려고 하지만,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은 어떻게 해서든 나를 돕고, 이끌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 가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지배할 때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수하고 넘어지고 안됩니다. 아무리 몸부림치고 발버둥쳐도 나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내 의지는 약합니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은 강하십니다. 성령은 결코 실패하지 않고 승리와 성공으로 이끄십니다. 이런 성령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성령의 기쁨이 있고, 바로 그것이 성령을 정말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은 어떠한 경우라도 주님보다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가시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보다 성급하게 판단하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이 내 삶을 주도하도록 맡기고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을 사모하고 부어주시는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런 신앙생활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셋째, 할 일을 다 하지 못할 때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과 함께 시작하고, 성령이 임하면 무엇을 해야 하는 가로 문을 엽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은 이 말씀을 전제로 출발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증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곧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성령은 이 일을 위하여 강림하신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이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보여줍니다. 처음 성령이 임할 때 성도들은 이것을 좀 소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이후에 달라집니다. 흩어진 성도들이 그들이 가서 머무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증인이 됩니다. 성령이 기뻐하시고, 주님의 원하시는 일들을 신실하게 감당합니다. 그러다가 하늘나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할 일을 잘 감당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기쁨이었고, 성령의 기쁨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명적인 존재로 부름을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사명을 받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죽는다는 것은 사명의 마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긴 사명을 다할 때 우리를 부르십니다. 내 사명이 끝나지 않으면 결코 죽지 않습니다. 늙었다고 그냥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젊었다고 마냥 즐기고, 여유롭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귀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을 신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나의 존재가치도, 그리스도인의 참된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할 일을 억지나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사명감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성령이 탄식하십니다. 그래서 늘 우리는 내 할 일을 잘 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과연 나에게 주어진 할 일 무엇입니까? 내가 개인으로서, 가정의 위치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와 일터에서 맡겨진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해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 없이, 신실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나는 무력해지고 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도로서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전도하는데 힘쓰는 것입니다. 우리의 앞서간 성도들은 이 일에 무엇보다도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점점 이 일이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열매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중단합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할 것이라고 미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바로 나에게 주어진 내 할 일입니다. 당장의 결실이 없더라도 먼 장래를 내다보면서 눈물로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나타날 열매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시면서도 아울러 또한 ‘종’이라고도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종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고, 삶이어야 합니다. 종은 주인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맡긴 주인의 명령을 다 행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 주인 앞에서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바로 그런 자를 성령이 기뻐하십니다.

이제 한국팀의 월드컵은 더 이상 경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곧 월드컵도 끝날 것입니다. 한국팀에는 의외로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선수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매 경기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경기를 치렀던 간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이영표 선수가 돋보입니다. 그는 너무도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가 지난 프랑스와 경기를 마치고 그라운드에 무릎을 꿇고 기도한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온 세계에 비췄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제 막, 경기는 끝났습니다. 아직도 그라운드는 뜨거운 함성과 거친 숨소리로 가득합니다. 90분 내내 경기장을 달궜던 경쟁이 끝나자 누구는 탄식하고 또 누구는 환호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쁨으로 목이 쉬었고, 또 어떤 사람은 안타까움에 주저앉기도 합니다. 그러나 난, 내게 ‘태극전사’란 아름다운 이름을 갖게 하신 하나님께 겸허히 무릎꿇고 기도합니다. 오늘 나를 뛰게 만든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의 기도가 최선을 다하는 내일의 원동력이 되길 바랍니다. 경기는 끝나도 기도는 계속됩니다...”

여러분, 내 안에 영원토록 머무시는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고 사랑하는 자들이 되십시오. 나의 죄로 인해, 성령께 맡기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인해, 성령은 근심하십니다. 이제 나를 돌아보시고 성령을 근심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하면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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