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시대를 살아갈 때
본문
(계 2:8-11)
자아상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나 관념을 말합니다. 건강한 자아상은 자신을 얼마나 균형 있게 바라보고 인정하며 가치 있게 생각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자아상을 형성하는 질문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입니다. 이 질문에 따르면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비하합니다. 실패하고 실수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가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자기 자만에 빠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배웠고, 사람들도 존경해주니 자신은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실제보다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두 가지 경우 모두 균형 잡히지 못한 자아상은 인생을 잘못 살아가게 만듭니다. 자아상을 형성하는 둘째 질문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족, 부모와 친구, 선생님 등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나는 중요한 척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는 자아상을 형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보통 자아상은 세상에서 얼마나 성공했는지, 얼마나 인정 받는지에 따라 영향 받는 것에 불과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내 존재는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개인의 문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이 각자 자기 교회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도 교회상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또 우리 이웃들이나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교회를 만드신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웃들이 보기에 아무리 좋다고 해도 주님께서 아니라고 하시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그리스도인이 주님 보시기에 바르고 아름답겠습니까? 어떤 교회가 주님 원하시는 교회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칭찬하신 초대교회인 ‘서머나 교회’를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자신과 교회가 함께 새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를 영적으로 부요한 교회라 칭찬하셨습니다. 9절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환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받는 박해와 어려움을, ‘궁핍’은 종교적 박해 속에서 교회가 겪는 물질적인 궁핍을 말합니다. 세상적인 관점으로는 ‘세상에 득이 되지 못하는 교회, 가난한 교회’라고 무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 속에는 주님의 칭찬 ‘네가 환란과 궁핍을 알고 있지만 실상을 바라보면 그렇지 않다. 너희가 부요한 교회다. 내가 칭찬해주고 싶은 교회다. 내가 원하는 교회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이 담겨 있습니다.
뒤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이 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요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가난한 자였습니다. 하나님께 부요는 가치 있게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개인이나 교회가 영적인 것은 물론이요 물질에 있어서도 풍성함을 원할 때 주님은 물질적인 풍요 보다 영적인 풍요에 비중을 두셨습니다. 여기서 쉽게 단정짓지 말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부요한 교회라고 해서 육신적으로 아주 가난하고 핍박 받는 교회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영적인 부요함을 육적으로 잘 나타낼 수 있는 물질이라는 도구를 가지게 되면 교회는 더욱 아름다운 모습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삶은 신앙의 연조가 풍성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식이나 은혜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피폐한 경우가 많습니다. 궁핍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감사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지식이나 물질의 축복, 건강이나 가정의 평안을 주신 것에 대한 사명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영적으로 빈곤한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 미래를 열어 가고,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영광 드러내는 일에 아주 인색합니다. 시간이나 물질을 사용하거나 영적인 것에 투자하는 데에도 인색합니다. 따라서 구원의 기쁨을 가지고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위로하고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열망과 열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가난하지만, 가난한 줄 모르고 살아갑니다. 주님 보시기에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성도 개인만이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교회의 담임목사는 검증된 목사이고, 시설은 물론이요 교인들도 재능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큰 교회가 곧 좋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구성원들과 사역자, 중직자들이 복음에 대한 열정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대한 부담감이 없다면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이 드러나기 위해 애쓰는 교회라면 아무리 크고 훌륭한 교회라 할지라도 좋은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가 살아있고 복음 증거의 열정이 있으며 고통과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위로가, 성도들의 언어에는 늘 격려와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교회여야 합니다. 존경 받는 직분일수록 더 큰 섬김과 헌신으로 감당하는 교회여야 합니다. 주님 보시기에 영적으로 빈곤한 교회는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구원이 무엇인가를 두고 고민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가 없다면 영적으로 빈곤한 교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안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여러분들은 주님 앞에서 어떤 교인입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 가를 떠나서 진지하게 돌아 보십시오. 앞으로 살아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남은 날 동안 집착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구분해서 살아야 합니다.
미국 코스타 집회를 가는 공항에서 서점에 들렀습니다. 비행 중에 읽을 책을 한 권 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제 눈에 띈 책이 ‘10년 후 한국’입니다. 한 경제학자의 눈에 비친 한국의 현실과 10년 후 한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분석한 책으로, 한국의 문제점을 16가지로 나누어 분석하고 있습니다. 우선 저자는 경제적으로 주력 산업이 흔들린다고 보았습니다. 지금은 몇 사람이 전체를 먹여 살리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주력 산업이 몇 년 가지 않아 중국에게 넘어가게 될 것이고, 실제로 산업의 중심도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인프라(기초산업)가 형성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파헤쳐져 사라지고 있는 실정에 일자리는 점점 사라져 가고, 사업하던 사람들도 모험을 꺼리고 안락한 삶을 추구합니다. 현상유지 하며 기회가 된다면 언제라도 기업을 정리해 버리겠다는 생각도 가득합니다. 사업에 정직하게 투자한 사람들은 망해가고 부동산에 투자했던 사람들만 큰 이득을 보는 등 경제구조가 정상이 아닙니다. 이런 면들에 대해 저자는 계속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라는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공동체가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집단적이 이기’주의에 빠져있습니다.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함께 투쟁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나누어 갖습니다. 따라서 희생이나 헌신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체 보다는 모든 관계가 ‘계약’중심의 사회로 이양됩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지만, 종합적으로 판단해 본다면 이 책의 요지는 ‘이 시대를 이끌어갈 정신적인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와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결해줄 정신적인 가치체계가 우리 나라에 없다는 점을 결론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민중주의의 허구를 볼 수 있는 눈이 사라졌습니다. 민중이 모여, 이것이 민중의 뜻이라고 외치면 다 맞는 소리처럼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있을 수 있는 허구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시대에 역행하는 민족주의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존립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저자는 미래를 낙관하거나 비관하지 않지만 책의 자료들을 통해 보면 우리 미래는 결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다. 이를 역전시킬 시대 정신이 없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나 영적인 풍요와는 연결되고 있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빈곤해지면 풍요로운 물질을 분배하기 위한 다툼과 나눔이 끊이질 않을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부터 5절, 그리고 7절까지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표준 새번역 성경의 구절입니다. “말세에 어려운 때가 올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며 감사할 줄 모르며 불경스러우며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아니하며 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선을 좋아하지 않으며 배신하며 무모하며 자만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 언제나 배우기는 하지만, 진리를 깨닫는 데는 전혀 이를 수는 없습니다.”
돈을 쓸 줄만 알았지, 돈으로 어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내는가에 대한 정신이 썩어버린 시대에서는 새로운 미래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성경은 비전이 없는 백성은 방자히 행한다고 말했습니다. 비전과 꿈을 잃어버리고 나만의 이익 앞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의 흐름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다시 질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 교회나 개인개인도 인간적으로 보면 풍요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 보면 빈궁한 삶은 아닙니까? 목사라면 내가 목사로서 진정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 목사인가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당회원으로서 당회원답게 교회 전체를 보고 교회 위기를 책임지고 미래를 열어가고자 하는 부담스러운 책임감을 가지고 있습니까? 교인으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책임지고 이 땅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낼 영적인 자원을 가지고 있으며, 위기 앞에 기도하고 전도하며 새로운 가치관을 전파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기도하고 있습니까? 영적인 유산이나 자원을 얼마나 가지고 있습니까?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운데 정신적으로는 빈곤한 것은 아닙니까? 물질적으로 풍요로워 화려해 보이지만 그 속에 비전과 꿈이 없다면 더 이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와 우리 삶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까에 관해 진지하게 살펴 볼 때가 되었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자랑하고 나타내기에 앞서 내 인생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내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질문하며 믿음의 양심을 세워야 합니다. 영적인 풍요로움을 위해 다시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교회는 현시대에 그쳐버린 교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이는 역사의 교훈이기도 합니다.
나는 자녀에게 영적인 풍요로움을 줄 수 있는 부모입니까? 이 시대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가치와 아름다움을 전해줄 수 있는 지도자입니까? 지금 어두운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가치 있는 존재로서의 교회입니까?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칭찬하신 서머나 교회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물질적인 부와 외적인 화려함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칭찬하시는 모습을 갖추어 가는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서머나 교회의 모습이 우리 교회에도 이루어지길 간절히 원합니다.
둘째 서머나 교회는 주님께 충성했던 교회입니다. 10절 말씀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여기서 ‘죽도록 충성하라’고 한 부분의 원어를 보면, 계속해서 믿음을 신실하게 지키되 죽음에 이르기까지 충성되게 지키라는 격려입니다. 우리가 찾아 볼 수 있는 충성의 동기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충성은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내 성품상 혹은 관심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것이 충성이 아닙니다. 하기 싫고 관심이 없고 견디기 힘든 일일지라도 주님이 기뻐하는 일이라면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은 자기 의가 많습니다. 그래서 분노가 생깁니다. 교회가 왜 이 모양이냐, 목사가 이 모양이냐 하고 불평합니다만, 교회 속에는 자신도 포함됨을 알아야 합니다. 충성의 원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하기 때문에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위신이나 자존심을 위해서는 공동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교회 지도자들이 있다면 온전한 의미에서 충성이 아닙니다. 나는 죽어도 나는 없어져도 나는 무시를 당해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일이라면 죽기까지 순종할 줄 아는 것이 충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 교회에 충성스러운 종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주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자존심이나 이해관계가 얽혀도 끝까지 주님만을 위해 충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자문해보십시다.
교회는 평신도들의 사역 현장이 아닙니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평신도들의 역할이 아닙니다. 평신도들의 사역 현장은 속한 가정과 일터와 사회입니다. 교회는 사회에서 사역을 잘 할 수 있도록 공급해주는 곳입니다. 목회자의 역할은 평신도들의 사역이 잘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역의 현장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에서 충성 봉사 다하고 가정이나 직장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충성스러운 종이 아닙니다. 가정, 직장,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삶의 모습이 바로 충성스러운 종의 모습입니다. 회사에서 교회 일을 한다고 순서지 만들고 회사 프린터를 사용해서 일한다면 어느 회사가 좋아하겠습니까? 교회를 위해 충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착각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남들보다 더 무거운 도덕적 무게가 있습니다. 더 많은 사명이 있기에 더 부지런히 뛰어야 합니다. 교회 일을 한답시고 가정에서 가정 일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면, 과연 충성된 종으로 서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숙고해봐야 합니다.
서머나 교회는 대표적인 우상숭배의 지역에 위치한 도시였습니다. 특별히 로마황제를 숭배하는 ‘데아 로마’라는 종교가 있었습니다. 신전과 사제들도 있었습니다. 서머나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일년에 몇 차례씩 신전에 와서 신상에 절을 하고 증명서를 받아갔습니다. 증명서가 있어야 집을 사거나 취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증명서가 없으면 살아가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살아가는 데는 힘들고 어려웠지만 구원의 주이신 하나님께 대하여 합당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연적으로 서머나 교인들의 삶은 궁핍하고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성도들은 주님께 충성하기 위해 궁핍을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충성이란 내가 좋을 때는 하고 나쁠 때는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충성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불이익이 있고 당장 유익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라면 포기하려는 자세입니다. 가난해질지라도 가난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기원 후 155년 서머나의 폴리갑 감독이 순교했습니다. 폴리갑 감독은 많은 사람들이 존경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한번이라도 예수를 모른다고 하면 살려주겠다 했을 때, 폴리갑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86년 동안 살아오면서 하나님께서는 한번도 나를 모른다 하지 않으셨고, 지금까지 선하게 대해주셨습니다. 이 하찮은 죽음 앞에서 나 살겠다고 지금까지 신실하셨던 하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폴리갑 감독은 필라델피아 지역에 사는 11명의 교인과 함께 화형을 당하여 순교의 재물로 바쳐졌습니다. 감독은 자신을 땅에 묻지 말 것도 부탁했습니다.
시대가 지나면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점점 어려워 질것입니다. 경제적인 빈곤도 각오해야 합니다. 사회적인 무시와 멸시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끝까지 충성할 백성이 있는 한 하나님의 교회는 버림받지 않습니다. 초대 일곱 교회는 지금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서머나 지역에 폴리갑 기념 교회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지금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말에 의하면 터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서머나 도시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한 순간에 그치고 말 나 중심적인 생각을 따르지 않고 주님 뜻에 순종하고 따라가는 믿음 안에서 살아갈 때 그에 상응하는 면류관을 주실 것이라 하신 약속을 지키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물질적인 풍요보다 영적인 풍요를 사모합시다. 그리고 주님을 향한 충성이 무엇인지 이번 기회에 바로 정립합시다. 열심이 나를 위한 것인지 아닌지 분별해야 합니다. 서른이 넘어가면 정신 차려야 합니다. 세상에 연연해서 살아갈 날들이 많지 않습니다. 화살처럼 날아가는 세상 앞에서 허상을 벗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셋째 서머나 교회는 하나님 약속을 붙드는 교회였습니다. 11절 말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둘째 사망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서머나 교회의 교인들이 정말 두려워했던 것은 이 땅에 잠시 잠깐 머물다 가는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원히 형벌 받을 둘째 사망을 두려워했습니다. 육신의 죽음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사는 천국을 소망하며 둘째 사망의 길로 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서머나 교회 성도들이 따라가고 믿었던 것은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람의 약속은 오래 못 갑니다. 증서를 쓰고 도장을 찍어도 소용없습니다. 사람의 약속을 너무 의지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은 절대 아닙니다. 자신을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경험이나 물질, 지식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뜻하시면 한 순간에도 흩어지고 없어질 것에 불과합니다. 서머나 교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물질 때문에 고생하는 것도 한 순간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를 통해 서머나 교인의 믿음을 기록했는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시는 이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보이는 것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약속을 따라 나아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길을 걸었으나 끝내는 가나안 땅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지식을 믿었던 사람은 광야에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두고 위대한 존재라 하지 않고,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잘 깨집니다. 그러나 질그릇 속에 보배 되신 그리스도를 품고 있기에 존귀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그릇 귀한 그릇이 사용 받는 것이 아닙니다.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이 쓰임 받습니다. 좋은 그릇이지만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쓰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약속을 붙들고 나 자신을 날마다 믿음으로 비우지 아니하면 나도 모르는 세상 더러움이 내 마음을 차지하게 되어 더럽혀집니다.
이번 코스타 집회를 참여하는 동안 지난날 목회했던 시카고의 교회에 갔습니다. 섬겼던 교회를 가보았습니다. 저와 제 아내의 건강을 상할 만큼 교회에 헌신하고 섬겼던 교회를 8년 만에 가게 되었습니다. 한번쯤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돌아보던 차에 새로 부임한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일주일째 금식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젊을 때 같이 활동했고 지금은 장로님이 되신 집사님의 집을 방문해서 교회 여러 소식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어려웠지만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소식은 모두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세워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경험이나 위신, 자존심, 이익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은 사업이 흩어졌거나 가정이 분리되거나 불과 8년 사이에 이런 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한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의 물질과 현실을 보고 갔던 사람들의 미래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영적인 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성도들의 삶은 하나님께서 새로이 만들어주셨습니다. 장로님이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씀하시길, “그날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합심하였다면, 모두 좋은 공동체가 되었을 텐데…... 어느 날 사진을 보노라니, 모두다 흩어져 버리고 어렵게 되었네요.”라고 하셨습니다.
유명한 스티븐 호킹 박사도 노벨상을 받은 자신의 이론을 스스로 수정했습니다. 우리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됩니다. 물질도 별볼일 없습니다. 거기에 생명과 영혼을 걸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인격도 믿지 마십시오. 며칠만 굶어 보십시오. 화나는 일 몇 개만 만들어 보십시오. 여러분의 인격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인격이 드러날 것입니다. 별볼일 없습니다.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주님의 모습을 따라가며 주님의 약속대로 내 삶을 결단하는데 있습니다.
로마에서는 면류관을 쓰는 사람이 두 사람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황제요 다른 한 사람은 경기에서 승리한 사람이었습니다. 황제처럼 화려한 인생은 아닐찌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경주에서 승리하여 주님 앞에 영혼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고자 하는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눈물과 탄식과 근심이 있는 이 땅에서 조금 더 잘 살면 무엇 하겠습니까? 오늘 고난과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향해서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이겨 나가야 합니다. 사업의 어려움에도 믿음을 잃지 않고 믿는 사람의 선한 자존심을 지켜 나가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버리지 않습니다.
지난 7월 8일 우리 곁을 떠난 한의사 이상호 선교사님의 죽음을 저는 자주 묵상합니다. 한의학의 최고라는 경희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과정을 마친, 풍요롭고 안락한 미래가 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아내인 황기선 집사님도 한의사입니다. 어린 남매와 아내를 데리고 이상호 선교사님은 불모지의 땅 스리랑카로 갔습니다. 선교사님의 집안은 믿는 집안이 아니었기에 자신에게 있는 믿음에 대한 부담감과 열정, 그리고 자신을 의사로 만들어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진료 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리라 다짐하며 떠나갔던 것입니다. 선교사님의 마지막 선교지가, “트링코말리”라고 하는 스리랑카 반군이 자리 잡았던 곳으로 일시적인 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달 생활비가 6만원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이들에게 의료혜택이 갈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수 천명이 몰려와 쉴 틈 없이 일했다고 합니다. 본인의 열정 때문에, 자신의 몸을 소홀히 대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약재를 구하기도 힘든 상황 속에서 동분서주하며 뛰어다녔습니다. 헌신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즐거움을 위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처럼, 자신에게 주신 복음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자신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떠나갔습니다. 이상호 선교사님의 삶은 결코 죽음으로 끝난 삶이 아닙니다. 함께 활동했던 단원들이 장례식장에서 읽었던 조시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봉사활동은 무슨 상품도 유행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 삶을 여전히 사랑합니다.
바람 한번 맞지 않고 피지 않는 꽃이 없다고 하듯
오늘의 아픔은 구름처럼…… 바람처럼 떠나가겠지요.
그리하면 나는 또 잊은 채 다가오는 하루를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내일이 되어 비가 올지…… 바람이 불지는 모릅니다.
그러면 다시 다부지게 가슴을 펴고 일어나야겠습니다.
내 삶을 사랑하는 만큼
내 주위의 사람을 사랑하니까요…….
나로 인해서 그 사람들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사랑이야 말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
더더욱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상처 입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질의 풍요보다도 영혼의 풍요를 원하시는 주님은 주님을 위한 충성의 선택 앞에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하고 기다리십니다. 약속을 따라 살아가는 주의 백성을 한번도 버리지 아니하시는 주님을 붙잡고, 세상 줄을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가 오늘 나눈 말씀 앞에 도전 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교회가, 내 삶이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지 고민하며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교회가 되기를, 믿음의 동역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드리며 축원합니다.
출처/김형준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