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교회를 원하십니까? (엡 3:1-13)
본문
90년대에 한국교회연구소에서 종교의식에 관한 설문조사에서 항목 가운데 “당신은 어떤 교회를 원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숫자의 사람들이,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빨간 벽돌교회를 원합니다”라고 연구소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전혀 다른 대답을 해서 아주 당황했던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마음속으로 대답해 보세요.
당신은 어떤 교회를 원하십니까?
이것은 교인이나 비교인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교회에 대하여 성경의 이해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결코 빌딩이 아닙니다.
물론 건물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교회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로마의 감옥에서 썼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옥중 서신”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던 당시의 세상은 한창 로마의 영광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가 로마의 지배와 압제를 받고 있었지만, 그러나 로마의 지배 아래 무릎 끓는 교회가 아니라, 정말 복음의 영광을 드러내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기를 원하는 기대 속에 이 편지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교회란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3장에는 교회의 본질을 드러내는 몇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1.깨달음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입니다.
3-4절을 읽겠습니다.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여러분 바울이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이 비밀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그것은 일차적으로 교회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를 가리켜서 깨달음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가리켜 “쌍둥이 서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를 읽다가 이해가 안될 때, 골로새서를 읽으면 “아! 이런 뜻이었구나”하고 알게 되고, 또한 골로새서를 읽다가 잘 깨달아지지 않을 때는 에베소서를 읽으면 서로 보완되어서, 그 뜻이 스스로 자명하게 드러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에서도 비밀얘기를 많이 하지만, 골로새서에서도 비밀이야기를 아주 많이 합니다.
골1:26절은 “만세로부터 감취었던 비밀이 드디어 나타났다”고 했고, 골1:27절에 보면 “하나님이 성도들을 통해서 이방인들에게 이 비밀의 영광을 알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일차적으로 이 비밀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시다”
다시 말해서 “그 주님이 내 안에 살게 된 것, 그래서 내가 구원을 체험한 사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 사실이 바로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밀이라는 말을 히랍어에서는 “무스테리온”이라 하고, 영어로 미스테리(mystery)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무스테리온”말은 계속 숨겨져야 할 비밀이 아니라, 자랑하고 싶은 비밀입니다.
여러분, 비밀가운데 우리가 어떤 비밀을 내가 알게 되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건 “비밀이야!” 그러면서 얘기하는 것 있죠?
그렇습니다.
나타난 비밀, 공공연한 비밀, 이제는 당연히 나타나야 되고 자랑하고 싶은 그런 비밀이 뭐냐하면, 예수님이 내 구주가 되신 것, 내가 구원을 받은 것,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것을 바울은 지금 여기에서 놀라운 비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복음을 듣고 복음을 깨달았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골1:6절에 보면 “너희가 복음을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듣고 보니까 “아!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셨구나, 나 같은 죄인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용서하시고 용납하시고 내 인생을 변화시켜 주셨구나! 하나님의 은혜는 참 놀랍구나!”하고 고백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이것이 복음을 들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성도들 가운데는 교회에 출석을 하는데도 삶의 변화가 없고, 신앙이 자라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분들은 본질적으로 “내가 정말 복음을 깨달았는가?”라고 자신에게 물어야합니다.
“깨달아 알았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는가?”하는 말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나오신다고 해서 다 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새가족반”과 같은 기초적인 성경 공부반 과정들이 준비되어있는데, 적어도 새가족 반을 통과한 사람들만을 우리교회에서 정교인으로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런 절차를 밟을 필요가 뭐가 있느냐? 다른 데서 다 공부했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확인해도 모자라지 않을 구원에 대한 확인을 “새가족반”에서 하는데, 이것이 바로 복음의 비밀을 깨달아 알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을 통과한다고 해서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복음의 비밀을 깨닫는 것,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짜 교인이 됩니다.
여러분, 교회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복음의 비밀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그 무리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2.함께 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입니다.
6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여기에서 어떤 단어가 반복하여 강조되고 있습니까?
“함께”라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깨닫게 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상속한 바를 함께 누릴 수 있는 후사가 되고, 함께 하나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공동체의 지체가 되고, 함께 하나님의 그 놀랍고 위대한 약속들에 대해서 참여하고 누릴 수 있는 축복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유태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방인들이 함께 복음을 듣고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잘못된 선민의식에 세뇌를 당해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좋은 선민의식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선민의식이란 “나만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이고 너희들은 아니야!” 라고 생각하면서 선을 긋고 담을 쌓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거의 이방인들을 개같이 취급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잘못된 선민의식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주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과 이방인 사이의 견고한 벽이 무너지고, 그들이 한 교회 안에서 같은 지체가 되는 놀라운 사실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의 하반부 전체에서 사도 바울은 바로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음에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일까요?
여기 “둘이 한 새 사람이 된다”는 말은 어떤 인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인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마치 한 사람이 되듯이 “한 공동체가 되어 화평하게 하셨다”라는 뜻입니다.
엡2:16-19절을 보면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들에게 이방인들에게도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평안을, 복음을 통한 진정한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가족(Family), 식구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께 묻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나와서 식구된 것을 느끼십니까?
다시 말해서 여러분은 가족 된 것을 느끼세요?
왜 우리가 가족 된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깊은 편견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죄성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상한 적대감과 편견이 뿌리박혀 있고, 이것이 인간관계의 상처와 갈등을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원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하나되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정말 어떻게 우리가 가족됨을 체험할 수가 있을까요?
어떤 분들은 우리 교회같이 좀 큰 교회가 되면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소위 예루살렘 교회의 숫자가 적지 않았습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예루살렘 교회가 약 3만명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공동체 의식, 즉 가족의식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예루살렘 교회가 적지않은 숫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공동체의식, 가족의식을 갖고, 서로 사랑하면서 그 시대를 뒤집어엎을 수 있었던 그런 놀라운 생동력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성전에서만 모이지 않고, 성전에서 흩어지면 소그룹으로, 적은 단위로 집에서 모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행2:46절에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덕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적은 숫자가 소그룹으로 집에서 모여 우리의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의 고통, 아픔, 답답함, 눈물들을 서로 이야기하고 나누며,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다 보면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건강한 교회를 향한 의지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운동이 소위 셀 교회(Cell Church)운동입니다.
셀 교회(Cell Church) 전략가들은 초대교회, 즉 예루살렘 교회가 그토록 정말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비밀을 한마디로 이렇게 말합니다.
“초대교회는 두 날개로 날고 있었던 교회였다”
여기 두 날개란, 하나는 성전에서 모이는 큰 모임의 축제요, 다른 하나는 집에서 모이는 소그룹을 통한 목장교회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전체로 모여서 같이 찬양하고 크게 은혜를 받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안됩니다.
집에서 모이는 소그룹을 통한 가정교회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내년부터 우리교회는 셀 교회(Cell Church)로 모든 교회구조를 전환하기 위한 대대적인 개혁작업에 착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짜 교회를 만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정말 그런 일들을 시작할 수가 있을까요?
제가 두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새가족 교육”을 받으시고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으시고 고현교회에 대한 소속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목장모임에서, 슬픔을 나누고 기쁨을 나누고, 성공을 나누고 실패를 나누고, 내 좌절을 나누고 고통을 나누고,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진정한 공동체를 거기서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함께 하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인식하시고 우리 모두가 고현교회에 대한 소속의식과 가족의식을 분명히 하여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경험하시고 체험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