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무엇 때문에? (고전 15:29-34)
본문
<초기 선교사들의 눈물겨운 고난>
선교사님들이 한국땅에 처음 와서 겪은 고생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제일 먼저 말이 서툴러서 언어 소통이 되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아마 세계 여러 나라 말 가운데 우리말처럼 어려운 말도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죽었다' 하는 말이 영어에서는 'die,' 혹은 'pass away,'
혹은 간단히 'He has gone.'하면 끝나는데 우리말은 복잡합니다.
'죽었다,' '돌아가셨다,' '별세하셨다,' '소천하셨다,'
'서거하셨다,' '세상을 버렸다,' 심지어 '뻗었다,' 등등 수없이 많습니다.
한 뜻을 전하는 말들이 이렇게 다양하다보니 선교사님들이
엄청난 혼동을 느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또 선교초기에 선교사님들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고생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우리 음식이라는 것이 대개 맵고 짜서 다른 나라 사람 입맛에 잘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 맵디매운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사람은 한국 사람밖에는 없을 것이라고.
아직 서양 음식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에 한국 음식만
먹고살았어야 할 그 분들이 겪은 고생이 눈에 선합니다.
그밖에 자기 나라를 떠나 낯선 나라에서 살아가는 외로움은 또 얼마나 컸겠습니까?
일가친척들과 친구들의 품을 떠나 이방 나라의 문화에 적응해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또한 오늘처럼 복음을 전하는 자유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많은 방해와 핍박이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당국에 체포당할지도 모르고
심지어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고 생각해보세요.
보통 믿음이 큰 사람이 아니면 견디기 어려운 순간들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아펜젤러나 존스 선교사님의 사진만 보더라도 처음 한국땅에 왔을 때의 사진과
한 4-5년이 지난 다음에 찍은 사진을 비교해보면 보통 늙은 게 아닙니다.
아펜젤러의 경우 키도 크고 몸무게도 많이 나가는 거구 중에 거구인데 몇 년 사이에
팍삭 늙은 데다가 몸무게도 쭉 빠져서 이게 과연 아펜젤러가 맞나 의심할 정도입니다.
한국 선교가 그만큼 힘들고 어렵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것이지요.
<왜 무엇 때문에?>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이 부활에 대해서 주시는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런 질문부터 던져봐야 할 것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이 분들이 이런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을까?
왜 무엇 때문에, 모든 세상적인 안정과 행복을 다 포기하고 이런 고통의 길을 걸어갔을까?
오늘 봉독한 말씀은 이미 살펴본 고전 15: 12-19절의 말씀과 비슷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이지요.
'말짱 황' 혹은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헌신도 충성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12-19절의 말씀은 좀 막연하고 일반적인 예를 들었는데 반하여
본문 말씀은 보다 더 구체적인 예를 들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 고생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이런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아펜젤러가 나이 27세의 새신랑으로서 무엇 때문에
아직 미개한 나라 한국에 와서 온갖 고생을 다 했단 말입니까?
언어 문제에다 음식 문제에다 문화적인 차이점에다가
가지가지 고생을 다하더니만, 1902년에는 이제 겨우 나이 44세밖에 안 되었는데
인천에서 배를 타고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회의에 참석하러 가다가
배가 충돌하는 바람에 군산 앞 바다 어청도 부근에서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아펜젤러는 한국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도 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바울 사도의 논리대로라면 부활이 없다면 왜 무엇 때문에 아펜젤러가 그렇게 했겠습니까?
자, 이제 이런 물음을 던지면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본문 말씀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29-32절 전반부에서는 부활이 없다면 세상의
그 무엇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왜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 고생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 다음 둘째로, 32절 후반부터 34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부활에 대한 소망을
버리게 될 경우, 방종과 타락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사람들은 내세에 대한 상벌의식(賞罰意識)이 전혀 없기 때문에 내 영혼아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면서 그저 먹고 마시는 향락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만일 부활이 없다면?>
그렇다면, 이제 29절로부터 32절 전반부에 있는 말씀을 주목하겠습니다.
여기에서 부활이 없다면 구체적으로 두 가지 무익한 일이 있다면서 예를 듭니다.
① 부활이 없다면 왜 무엇 때문에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대리로 세례를 받는단 말입니까?
여기 보면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나옵니다.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른 바 죽은 사람을 위하여 산 사람이 대리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1세기에 유행했던 한 관습인 것처럼 보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세례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세례를 베푼 주례자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분열되어서 서로 다투었던 것 아닙니까?(고전 1: 10-17 참조)
이러다 보니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있을 경우,
살아 있는 신자가 그 죽은 사람을 대신하여 세례를 받는 풍속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볼 때 다분히 미신적인 풍속이지만
사도 바울이 살아 있었을 때에는 꽤 중요한 관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외경인 마카베우스서에 보면 유다스 마카베우스가 죽은 자기 부하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은화 2천 드라크마를 모금해서 예루살렘에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와 같이 죽은 사람의 죄를 씻고 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산 사람이
모종(某種)의 대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당시에는 꽤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울 사도가 이와 같은 그 당시 풍습을 언급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여러분, 29절 말씀을 보세요.
만일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왜 무엇 때문에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정말로 살아나지 않는다면 왜 무엇 때문에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는 말씀이지요.
여러분, 바울의 이 지적은 확실히 옳은 말씀이 아닙니까?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는데 왜 무엇 때문에 죽은 사람까지 위하여
산 사람이 대신 세례를 받는다는 말입니까?
아무 소용없는 일이지요!
죽은 사람의 몸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은 사람의 구원 문제에도 그토록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닙니까?
② 그 다음에 부활이 없다면 왜 무엇 때문에 바울 사도 자신이 이 고생을 하고 있단 말입니까?
여러분, 이제 30-32절 후반부 말씀을 주목하세요.
여기서 사도 바울은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왜 자신이
그토록 온갖 고생을 다하며 복음을 전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세요.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정말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온갖 고난을 다 겪었습니다.
지금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순간에도 시시각각 위험을 무릅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외칩니다.
실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날마다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사는 사람입니다.
또한 32절 말씀을 보세요.
바울 자신이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웠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방법으로 한 것이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맹수와 싸웠다는 말은 실제로 사자나 늑대와 싸웠다는 뜻이 아니고
에베소 지역에서 큰 박해와 반대를 받았다는 하나의 비유입니다.
고전 4: 11-13절을 보면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어떤 고난을 당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욕을 얻어먹고 온갖 박해를 받아서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고후 6: 3-10절에서도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을 하나 둘 열거하고 있습니다.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후 11: 23-33절에서 바울은 더욱 더 자세하게
자신이 당한 환난과 핍박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수고도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많이 하고 매도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채찍을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대해를 떠다녔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부활이 없다면 바울이 왜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을 사서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죽은 자의 몸의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왜 무엇 때문에 여러분이 오늘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왜 무엇 때문에 십일조 헌금도 하고 감사헌금도 하고 가지가지 예물을 드립니까?
부활이 없다면 새벽기도는 왜 하는 것이고 전도와 봉사는 왜 하는 것입니까?
부활이 없다면 왜 선교사님들이 해외에 나가서 그토록 고생을 합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하는 일체의 신앙생활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바울의 논리대로 한다면 "말짱 황이요!"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만다는 것이지요!
옳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사활이 부활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이 있음을 믿기에 바쁜 시간을 쪼개고
없는 물질을 나누어서 주님께 바치고 수고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이 있음을 믿기에 온갖 고난을 기쁨으로 이겨내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잃고 향락주의에 빠져 사는 자들에게 주는 경고>
이렇게 우리의 믿음과 수고 등 일체의 것이 부활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 뒤 바울 사도는 32절 후반부로부터 34절까지에서 부활을 믿지 않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이들은 틀림없이 현세주의에 빠져
타락과 향락으로 치달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32절 후반부에 보면 이들은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이 말씀은 사 22: 13절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말씀인데,
예루살렘 거민들은 앗수르 제국이 예루살렘 성을 완전히 포위한 가운데에도
두려움과 떨림으로 통회하고 자복하는 대신에 마치 내일은 없다는 듯이
흥청망청 소를 잡고 양을 잡고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향락에 빠졌습니다.
"내일 죽을 것이니, 오늘은 먹고 마시자!" 했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활과 내세와 천국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현세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향락주의에 빠져 그저 오늘의 쾌락에 탐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의 부활이 있음을 믿기에 오늘을 진지하고 의미 있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최후심판 때 우리의 모든 행위를 엄중하게 물으신다는
사실을 믿기에 오늘을 신앙적으로 윤리적으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33절 말씀을 보면 바울은 그 당시 유행하던 희랍 속담 하나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는 속담이지요.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준 새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나쁜 동무가 좋은 습성을 망친다."고 번역했습니다.
둘 다 비슷한 뜻이지요.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34절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나쁜 동무와 연결되어 있다는 말씀이지요.
더 정확하게 말해서 에피큐로스 학파라는 희랍의 쾌락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피큐로스 학파 사람들은 쾌락을 늘리고 고통을 줄이는 것을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일부는 이와 같은 향락주의 철학에 빠져서 부활을 부인했다는 것입니다.
나쁜 친구와 사귀어 선한 행실을 더럽히게 된 것이지요!
그리하여 34절에 보면 바로 이런 이들을 향하여 바울은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오늘 여러분이 부활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어설픈 세상 풍조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현세의 쾌락에만 눈이 멀어서 시간을 낭비해서 안 됩니다!
부활이 있기에 우리는 오늘을 진실하고 성실하게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순교행렬, 왜 무엇 때문에?>
여러분, 교회사를 읽어보면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터툴리안이라는 교부는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말했습니다.
과연 그랬습니다.
십자가 위에 거꾸로 못 박혀죽은 베드로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사도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바울 사도도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사도 교부인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맹수형을 당했는데
맹수형을 당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맹수들을 빨리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맹수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겁을 먹어 달려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맹수들이 저를 재빨리 삼켜버리도록 제가 유인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맹수들이 자기 몸을 깡그리 삼켜 장사 지내는
수고를 덜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유언까지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그나티우스는 자신이 순교 당하는 날이 구원을 위한 생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교부 폴리캅은 화형을 당할 때 예수를 저주하고 로마 황제를
숭배하면 살려주겠다는 집정관의 말을 듣고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지난 86년 동안 저는 그리스도를 섬겼습니다.
그 분은 저에게 그 어떤 그릇된 행위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저를 구원하신 왕을 어떻게 모독할 수 있단 말입니까?"
여러분, 교회사를 읽어보면 이와 같이 감동적인 이야기들은 끝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왜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이 자신감에 가득차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었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물론이고 자신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지요.
부활을 믿지 않았다면 이들이 이렇게 까지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부활과 관련해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져 봐야 합니다.
"왜 무엇 때문에?"
부활이 없다면 왜 무엇 때문에 아펜젤러나 존스 선교사님이 한국에 와서 그토록 고생했을까?
부활이 없다면 왜 무엇 때문에 여러분은 이 바쁜 주일에 일을 하든지
어디 놀러 가든지 아니면 집에서 편안히 쉬지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까?
부활이 없다면 왜 무엇 때문에 그 아까운 시간과 물질을 쪼개어 주님께 바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의 대답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과 봉사와 충성, 일체의 것이 다 말짱 도루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현세주의와 향락주의와 허무주의를
다 이겨내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